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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0장 31-39절
내가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고자 하시며, 내놓으신 목숨을 다시금 취하고자 하십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고, 버리신 목숨을 스스로 취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인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성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인성만이 아니라 신성으로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이 모든 권세를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말씀 합니다. 분명 성자도 하나님이시지만, 질서와 권위에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행하는 분으로 있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계셨지만 종교지도자들 안에서조차 예수에 대한 생각이 일치가 되지 않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어떤 자들은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눠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눠진다고 해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많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을 통해 더욱 드러나는데, 저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전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보였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양은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는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 역시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기 때문에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생명이며, 영생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에 들어선 자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한번 그리스도의 양으로 있게 되면 그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한 확신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게 주신 이가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신 분으로 그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의 뜻이 내 뜻이요 그의 능력이 내 능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로부터 내 양을 빼앗을 수가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저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한복음 8장으로 가면 예수님의 말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한 바가 있었습니다(요8:58-59).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실 때 그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동일한 본체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물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24절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내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미 질문을 할 때부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답을 듣고자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답변으로 오지 않자 저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저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한 것은 한 예로 신명기 13장 5절과 같은 말씀에 근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그러나 말씀의 합당한 적용이 아니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죄악 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시험하기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두 번째 시험이 그 내용인데, 거기에서 사탄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것을 시험합니다. 이렇게 시험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마4:5-6). 그러나 예수님은 또 기록되었다는 말씀으로 그 시험을 물리치시는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마4:7).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이해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말씀답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오용하거나 악용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죄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오용하고 악용했습니다. 매주 오후에 기독교강요를 살피고 있지만 가톨릭 역시 거룩한 말씀을 요용하고 악용했습니다. 말씀 자체는 거룩한 말씀으로 있지만 그 말씀을 가지고 오용하고 악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오용하고 악용한 사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답을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경우 말씀에 근거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판단일 뿐 사실은 재판을 열어 거짓 선지자인지를 확인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질서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런 성경의 질서도 버렸습니다. 또한 말씀에 근거한 판단 자체도 틀렸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말씀에 대하여 무지한 자로 있었던 겁니다. 말씀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인데, 어떻게 구약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만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음성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그의 음성이 곧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고, 그의 음성이 곧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이런 점에서 혹 세상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고, 아무리 화려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음성과 일치되지 않는 이상 그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아무리 좁고 협착할지라도 거기에 그리스도의 음성이 있다면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돌을 들어 치려고 하지만 그 말씀을 오용하고 악용할 뿐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32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예수님 자신이 한 일 가운데 선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악한 일로 인하여 해를 끼친 일이 있다면 내가 행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한 일, 거기에 무슨 불의한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했다고 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이 어떻게 악한 일이겠습니까? 행하신 모든 일이 선한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돌로 치려 한다면 도대체 어떤 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특히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이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만물보다 크시다고 말씀한 바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자신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이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말하면서 그가 선한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너희도 알고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선한 분으로 있는데, 그분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 행하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악이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난 시간에 살핀 25절 말씀에 근거하자면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계속해서 밝히고 있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할 것을 요청했고,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25절로 답변하셨는데 그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의 행하시는 일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할 때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이 단순히 선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선한 일로 나타내신 모든 일이 내가 그리스도임을,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저들의 대답은 33절로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이 선한 일이요, 단순히 선한 일을 넘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때 선한 일 자체를 인정한다면 그가 그리스도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해야 되지만, 여전히 저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엇만 인정하느냐?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인정합니다.
이어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은 선한 일 자체가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라고 말하는데, 사람이면서도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돌로 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을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임을,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저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만 주목할 뿐입니다. 그의 부모가 누구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냐? 그의 고향은 어디냐? 나사렛이라고 할 때 그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타날 수 있는가? 이런 외적인 것만 주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 그리고 그가 행하시는 일을 통해 그가 구약에서부터 예언해 오던 메시아임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빌립보서의 증거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할 때 종의 형체만 볼 뿐 근본 하나님의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 보여줬지만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로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과 그가 행하시는 일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께서 깨달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는 다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 1장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단순히 선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보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자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영생은 결코 주어질 수 없습니다. 누구만이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과 영생을 받는 자로 있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 선물을 저와 여러분이 받았다면, 지금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33절 하반부를 보시면 유대인들은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말 자체만 보면 이런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이 취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이런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교리가 신인협력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말하자면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에 감사해서 선한 열심을 냈는데 그것도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의 일부를 사람이 취하는 것, 이것이 신성모독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고 박탈하는 것입니다. 즉 저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칭해지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만 보고 있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이 취할 때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모든 만물을 통해 알지만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모든 불신자는 바로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쨌든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교훈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보면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시편 82편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구약을 통칭해 부를 때 율법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좀 더 구분해서 말할 때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좀 더 세분하면 누가복음 2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경우 시편을 인용하고 있지만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 다시 말해 구약 성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내가 너희를 신,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신들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시편 82편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여기서 ‘너희’란 재판관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시편 82편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운 재판관들을 ‘신들’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재판할 권위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편 82편에서 신으로 번역된 단어는 ‘אלהים’[엘로힘]이라는 단어인데, 주로 하나님께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예로운 직분을 맡기신 자들에 대하여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천사에게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권세를 그들에게 부여해 주셨다는 의미로 ‘신들’이라고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한 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35절을 보시면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재차 강조하기를 내가 너희를 선들이라고 한 성경의 말씀은 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대상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권위로 세운 사람들에 대하여 신들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로힘’인데, 그들을 세우시면서 ‘엘로힘’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36절 때문입니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로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밝힌 것처럼 말씀이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1:1).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으로 있습니다(요1:3). 당연히 속성에 있어서도 성부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거룩하게 하지 않아도 그분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서 자주 표현되는 게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질서입니다. 스스로 죽으실 수 있고 또한 스스로 부활할 수 있지만, 성자는 성부의 뜻을 따라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거룩하게 해야지만 거룩한 분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은 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사실,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거룩조차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로 세상에 보내신 자가 성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도 ‘신들’이라는 표현을 돌리는데,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신성모독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좀 더 비교해서 말하자면 시편 82편 6절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입니다. 여기서 재판관을 향하여 신들로 부르기도 하고, 지존자의 아들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엘로힘, 즉 하나님으로 부르기도 하고, 그런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거룩하지만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며, 스스로 세상에 오실 수 있지만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82편의 경우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예수님은 그런 불의와는 먼 분으로 계십니다. 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요,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하심을 입었습니다. 저들도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는 불의함이 전혀 없습니다. 선하다고 인정 받을만한 일만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어떻게 신성모독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37절과 38절입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로 증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능력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알리신바 되었고, 세례 요한의 질문에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이사야 35장 5절과 6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이런 일이 없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 모든 일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행하실 수 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일로 알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이 모든 일들을 보면서는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믿음과 말씀과 이적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성경은 분명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롬10:17). 이적이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표적과 기사와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행14:3). 표적과 기사와 같은 능력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목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믿음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와 같은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이적은 오직 주의 말씀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과 상관없는 이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할 때(딤전4:5) 말씀과 상관없는 이적은 거룩과 먼 것입니다. 특히 말씀과 무관한 이적 자체는 사단도 할 수 있는 일로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살후2:9-10).
이런 측면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그 행하는 일로 나를 믿으라는 것은 이적으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일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참된 믿음으로 이끌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정하면 내 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내가 행하거든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행하는 바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행하는 일이요, 더 나아가서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3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오늘 본문 39절은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예수를 잡고자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말씀을 따라 그가 행하신 일들을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 당시 그들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앞으로 끌고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그 일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불신앙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의 손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는 나가셨는데, 아직 법정에 서서 판결을 받고 또 죽음에 이르러야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기 위함이지만, 그것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잡고자 하는 자들의 손을 벗어나 나가셨던 것입니다.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와 하나이신데, 저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떻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물론 어떻게 해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할 때 그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자와 양의 비유와 비유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친절하게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에 대해서는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수 없이 많은 이적을 베풀었다고 할 때 그 모든 이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처럼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올무에 매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에서 풀어지도록 하는 역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선한 일로 있습니다.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일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목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가 하시는 말씀의 해석에 대하여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가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바가 선한 일이라고는 인정하면서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하고 살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구약의 말씀을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했지만, 저들 눈 앞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저들은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해 그의 말씀을 주목하고 그의 말씀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그가 성부 하나님과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저들보다 지혜롭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저들보다 지식에 있어 월등하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학벌이 저들보다 좋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이해력이 저들보다 낫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영원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의 양 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양 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들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바 된 말씀을 고백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은혜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내가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하시는데, 그의 모든 행함은 무엇을 위한 것으로 있는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즉 그가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의 역사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때 거룩한 행실의 모든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행함 역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를 나타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 걸맞아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우리의 모든 행함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아들이신 그리스도도 그렇게 사셨는데, 은혜로 아들이라 칭해진 우리의 삶은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로 나타낼 수 있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