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이들이 있다. 1919년 3월 1일 태극기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열사, 의사들은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다. 보훈의 달 3월을 맞아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 집안에서 태어난 유명인들을 찾아봤다.
3월 만세 운동의 주역 독립운동가 후손들
신해철과 그의 외증조부 이성구 선생./플리커, 신해철이 '신해철닷컴'에 공개한 이성구 선생 사진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은 독립운동가 이성구 선생의 외증손자다. 이성구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펼친 인물이다. 그는 선천면사무소 방화사건을 주도해 보안법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10년 형을 받았다. 그 후 상해 일본영사관에 2차례 폭탄을 투척해 징역 7년 형을 추가로 받았다. 결국 이성구 선생은 경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도중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성구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신해철은 2009년 자신의 홈페이지 '신해철닷컴'에 외증조부인 이성구 선생의 사진을 직접 공개했다. 그리고 자신의 외증조부가 "3·1 운동 후 자진 체포되신 후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MBC 라디오스타 ,채널에이 '풍문으로 들었소' 캡처
가수 송대관은 전라북도 쪽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송영근 선생 손자다. 송영근 선생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1919년 3월 16일 정읍시 태인면 장날을 이용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배포했다. 그는 호남 지역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일본 경찰은 송영근 선생을 체포하고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송영근 선생의 부친은 금광을 운영하던 만석꾼(큰 부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부친은 금광을 운영하며 번 돈을 독립투사 자금으로 헌금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일본 경찰이 남은 금광과 땅을 모두 빼앗았다고 한다. 송대관은 "젊은 시절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지만 비참하진 않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가난을 견디는 힘이 됐다"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배성재 아나운서와 신영호 선생./배성재 인스타그램 캡처, 공훈전자사료관
배우 배성우, 배성재 아나운서 형제도 독립운동가 후손이다. 그들은 신영호 선생의 외손자다. 신영호 선생은 경성 중앙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들고 귀향했다. 그리고 청주에서 만세 시위 물결을 일으켰다. 청주농업학교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을 제작하던 도중 일본 순사에게 발각돼 징역 10개월 형을 받았다. 배성재 아나운서는 2019년도에 100주년을 맞이한 3·1절 기념식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당시 기념식에 참여한 유지태, 이제훈, 차범근은 현장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했다.
김지석·홍지민도 독립운동가 후손
SBS '미운오리새끼' 캡처
2019년 SBS '미운우리새끼'에 출연한 배우 김지석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김구 선생의 제자인 독립운동가라고 밝혔다. 김지석이 언급한 할아버지는 바로 김성일 선생이다. 김성일 선생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6년 중국 봉천에서 독립의용단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김성일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일 선생은 홍커우 의거가 발생한 1932년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됐다. 이후 약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KBS '티비는 사랑을 싣고 시즌2' 캡처
뮤지컬 배우 홍지민은 독립유공자 홍창식 선생의 딸이다. 홍지민은 2월 KBS '아침마당'에서 독립운동가 아버지에 대해 "16세부터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셨다. 아버지가 저랑 정말 똑같이 생겼다. 모든 재능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홍창식 선생은 1942년 1월부터 비밀결사 '백두산회'에 가입해 함북 일대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김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운동가 후손, 정치인부터 프랑스 명예영사까지
윤봉길 의사./시대청년 유튜브 캡처
국민의힘 윤주경 의원은 도시락 폭탄으로 잘 알려진 윤봉길 의사의 손녀다.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윤 의사는 1931년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 후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 연회에서 도시락 모양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들고 있던 물통 모양의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일본 경찰들은 그를 체포했다. 그는 제압을 당할 때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고 한다. 윤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이회영 선생./국가보훈처
변호사이자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기자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가문은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다. 당시 조선 4대 부자로 불리던 우당 가문이 처분한 재산은 현재 시가로 6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만주로 떠나기 직전까지 이회영 선생은 항일 의병 자금 조달, 을사늑약 파기 운동, 을사오적 암살 모의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또 그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고종에서 직접 건의하기도 했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됐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이종걸 의원은 “할아버지(우당 이회영 선생) 명예에 흠집을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목표”라고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홍재하 선생(오른쪽)이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파견 교육을 받으러 온 한국군 장교 또는 생도와 함께 태극기를 들고 선 모습.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0년대 중반으로 추정./MBC '백년만의 귀향, 집으로' 캡처
프랑스 명예영사 장자크 홍푸안씨의 부친은 프랑스에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독립운동한 홍재하 선생이다. 홍재하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던 독립운동가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 러시아, 영국 등을 거쳐 1919년 프랑스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보냈다.
1920년 1월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그해 7월부터 제2대 회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번 돈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내는 자금책 역할을 했다. 또 3·1 운동의 정신을 프랑스에서 기리는 활동을 했다. 장자크 홍푸안씨는 2019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아버지 홍재하 선생의 훈장을 대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