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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소유효과에 가린 십자가효과>의 줄거리:
소유효과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을 때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으로 느끼는 심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애지중지하던 중고차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중고차 시장에서 책정된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아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유효과 때문에 벌어지는 정말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보물 되심이 마음에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타나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는 십자가효과가 무효가 돼버리는 거구요.
소유효과에 가린 십자가효과
(이사야 54장 1~17)
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소유효과에 가린 십자가효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소유효과에 가린 십자가효과’
미국 듀크 대학에 댄 애리얼리(Dan Ariely) 교수는 미국의 행동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입니다. 이분이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학 농구의 결승전이 엄청난 인기가 있어서 입장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표를 구하기 위해서 며칠 전부터 매표소 앞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려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첨을 해야 할 정도입니다. 밤새 기다려도 표를 사는 것이 아니라 추첨권을 받는 것입니다.
댄 애리얼리 교수는 이렇게 표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100명을 표본으로 삼아 첫 번째 실험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이라도 표를 구할 수 있다면 얼마를 내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평균적으로 우리 돈 18만 원의 정도의 가격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실험으로 표를 구한 사람들 100명을 표본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표를 팔수밖에 없다면 얼마에 팔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생겨납니다. 이 100명은 평균적으로 무려 250만 원에 표를 팔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같은 입장권이고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인데도 14배라는 엄청난 차이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기도 하고 낡으면 버리고 같은 것을 다시 사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행동 안에서 어느 정도의 타당한 가격이 매겨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특정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애지중지 소유하는 것들에 실제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시시한 것이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심리적 애착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가치가 상승했다고 믿게 되는 비합리적 성향입니다. 이것을 바로 소유효과(Endowment Effect)라고 합니다. 내가 가진 가치가 타인이 가진 가치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효용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는 이 소유효과가 십자가효과를 지우고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앞서 보았던 53장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이 받으실 지독하고 참혹한 수난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 메시아의 수난 역사를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타납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석들도 어려워합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홀로 된 여인’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의 상태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70명으로 시작해서 250만으로 불어난 것이 노예로 살 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도 출산이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5절에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실 때에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즉 선민의 그룹이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선민은 곧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1절에 나오는 잉태와 출산의 개념이 단순히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민은 혈육에 의해서 잉태되어 태어나는 자들이 아니라,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임으로 태어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받으실 수난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선민이 태어나게 될 것임을 오늘 본문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이제 엄마 뱃속에서는 아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한때 아기의 세상은 엄마의 뱃속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태어남을 통해 이제 엄마의 뱃속에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로 태어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 사건은 영적으로 아기 만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세상과의 경계선입니다. 엄마의 배가 세상과 아기를 구분하는 경계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경계로 세상과 하늘이 구분됩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사건을 아기가 태어나는 것으로 비유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에서의 삶이 어머니 뱃속의 삶이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이제 아기가 태어나서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마음은 다시 세상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아기가 태어나려다가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마음은 이제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늘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런 예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교계의 현실을 보면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 하늘로 태어난 사람보다도 여전히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아 보입니다.
2~3절을 보면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라는 말처럼 선민이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당이 미어터지는 것과 같은 수적 부흥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태어나는 사람이 많아지리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영적인 개혁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현재 상황만을 보자면 통합측 장로교단에서만 한 때 470만이었던 교인이 250만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이 250만조차 허수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에서 주일날 교회에 가는 사람이 250만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으니 오늘 말씀이 와 닿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어떻게 보자면 정리가 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은 십자가에서 죄 사함만 받아놓고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가려는 아기처럼 살아온 성도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성도들이 정리되고, 정말로 십자가 너머에서 살고자 하는 홀로된 여인의 자식과 같은 자들이 많아지는 과정일 것이리라는 희망적 기대를 갖게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 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십자가와 관계없는 삶에서는 더는 보물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외통수 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넘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을 보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하나님을 보물로 여지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너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물 되심을 외치고 가르쳐야 하는데 정작 선민이라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보물임을 배워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 사함은 받았지만 보물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가 앞서 예로 들었던 소유효과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은 실제로는 보물이 아닌데도 과장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는 곧 마음이 붙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붙잡거나 담게 된 근원적 이유는 바로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시기 위한 하나님 크기의 공백입니다. 이 공백은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을 발생시키고 채우고자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를 통해 마음을 채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집착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자녀를 붙잡고 있습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는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자녀를 마음에 담음으로써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진공청소기로 카펫을 청소하다보면 강력한 흡입력이 카펫까지 들어 올립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의 공백은 우리의 삶에 이러한 진공상태를 일으킵니다. 마음의 공백이 자녀를 붙들면 소유효과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면서 엄청나게 과대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대상이 재산입니다. 재산이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그것이 하나님의 크기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농구의 결승전 입장권을 못 산 사람들은 18만원을 제시했습니다. 당연히 실제 가격은 그보다 훨씬 아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구입해서 팔려고 하는 사람들은 입장권의 가치를 250만 원으로 평가했습니다. 자신이 가졌기에 과대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에 똑같은 소유효과가 작용합니다. 본래대로라면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우는 것에 있어서는 세상의 것들은 가치제로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돈의 액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다 팔아도 나 한 사람에게 존재하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적은 돈이라도 엄청나게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소유효과입니다.
배우자에게 매일 불평불만을 하는 이유는 배우자로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유효과에 의해 배우자를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몸이 아픈 사람들은 건강을 제일로 여깁니다. 건강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믿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건강해지면 금세 바랄 것이 더욱 많아집니다. 건강이 결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건강을 붙들고 있기에 건강이 보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유효과 때문에 10만 원도 안 되는 입장권이 250만 원으로 과대평가되듯이, 이 세상에는 과대평가되어 보물로 여겨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마음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채울 수 있으리라고 과대평가되었기에 놓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실제로 입장권을 250만원에 산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더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팔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배우자가 아무리 잘났어도 자녀가 아무리 잘났어도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채우는 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물며 못난 배우자나 자녀들이라면 아예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등이나 꼴등이나 마찬가지로 마음을 채우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신데, 세상 것을 보물로 여기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보물로 알고 있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 죽으는 것입니다. 소유효과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십자가 너머에 계신 진짜 보물이신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대상들에는 어떠한 필요가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에서만 세상은 비로소 가치를 가집니다. 내 마음을 보물이신 하나님으로 채우고 나서 배우자나 자녀를 대해야 하고 직장생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배우자는 하나님의 그림이 그려지는 화폭이 됩니다. 기쁨의 물감, 만족의 물감, 감사의 물감으로 배우자라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물이신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과 만족과 감사의 물감으로 자녀의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이 나의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표현되는 무대입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직장과 그밖에 모든 세상의 대상들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표현되는 대상이지 나를 위해 소용되는 대상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소유효과 때문에 마음 채움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세상의 대상들을 보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서도 하나님이 보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기에 귀합니다. 결코 내게 소용이 있어서 귀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마음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게 소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서는 끝없는 부족함이 느껴지고 불만이 생겨날 뿐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을 보물로 여기는 동안에는 십자가효과는 발휘될 수 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을 보물로 여기는 소유효과에 붙잡혀 사는 동안에는 십자가에서 죄 사함 받은 것조차도 효과를 잃어버립니다.
죄 사함을 받는 이유도 십자가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이지 못할 바에는 죄 사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인 사람만이 천국에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우리의 보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 예루살렘은 보석으로 만들어져있다고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보석들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보석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여겨서 십자가 너머로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보석으로 여기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보석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이 진짜로 보석을 보았을까요? 성령을 통해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이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요한이 알고 있는 보석들을 비유로 삼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물이심을 표현하기 위해 보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건강도 나의 보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대상들은 내가 하나님을 보물로서 가질 때에만 비로소 쓰임 받게 됩니다. 나와 같이 보물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할 존재들이지, 내게 소용이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내게 보물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죄의 체질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 소유효과를 갖습니다. 소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는 그것들이 내 마음을 채워 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는 ‘자녀가 잘 되면 하나님 없어도 만족할 수 있다, 돈 많이 벌면 굳이 하나님 안 찾아도 만족과 기쁨이 있다’라고 속삭입니다. 이 마귀의 속삭임이 ‘돈 벌면 기쁠 수 있다’라는 확신이 되어서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소유효과를 발동시키려는 마귀의 속삭임을 나의 확신으로 믿고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효과를 발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물로 보이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보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극복하고 하나님만이 보물임을 믿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소유효과에 가려져버린 십자가효과를 살려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물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십자가효과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넘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만이 보물이심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십자가를 넘어가서 보물이신 하나님을 차지하시고, 보물을 가진 자가 되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되 목적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옵소서. 하나님만이 내게 소용 있는 보물임을 굳게 믿어서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십자가 너머에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