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가열로 내로 옮겨라,나도 함께 근무한다.
박회장님과 가열로 내에서 정비관계를 확인 점검하는 장면(1975)
일본 제철기술자가 남기고 간 말은 많은 여운을 남겼다. ‘보일러
파이프는 고장부분만 수리하면 1년 내내 수리하게 된다’ ‘재질은
비싼 것 보다 수리주기에 맞추어 선택하는게 좋다’라고 했지만 그 주기와 적절한 재질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 사이도 스키드 파이프는 3-4개월이 멀다 하고 누수가
발생했고 테이블 롤러의 베어링도 계속 파손되었다. 베어링은 그런대로 예비품을 다량 확보해서 교체하면
되지만 스키드 파이프는 부분수리지만 노내 작업이 되어 1,300도의 열을 드라이 아이스로 강제냉각을
하고 방화복을 입고 작업해도 수리 전후의 냉각과 내화재의 건조곡선에 따라 서서히 승온 해야 하므로 정비기간이 최소 한주이상 걸렸다. 이는 눈에 보이게 감산으로 이어지고 회사의 경영에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정비부서로서는 적절한 방법도 재료도
없이 누수가 될 때마다 대안이 없어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수리자재 수급도 쉽지 않았다. 특수강은 당장 사오는 게
아니고 해외로 주문해서 구입해야 했다. 그런 어느 날 회사를 출입하는 한 고철업자가 포신(砲身)이 특수강으로 열에 견고하다고 했다. 지프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라 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특수강 못지않아 부분수리시 사용하기도 했다. 포신은 생각보다 고열에 강해 쓸 만했다. 하지만 포신의 배기공과
길이가 짧아 대체재는 되지 못했다.
스키드 파이프 누수는 주변을 둘러싼
내화재의 균열이 주원인으로 보였으나 노재과에서는 파이프의 누수로 내화재가 탈락된다고 주장했다. 내화재는 물을 만나면 흐물흐물해지기 때문이다.
일본 제철기술자가 마지막 남긴 여운을 되씹어보지만 아직은 그에게 이런 것 저런 것을 물어 볼만큼 개인채널이
형성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섣불리 물어보다 가는 아주 닫혀버린다.
하루 빨리 채널을 형성해서 개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회사의 바람이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러자면 그가 잊지 않도록 자주 연락하면서 끈을 이어가야만 했다.
일본에 비가 많이 올 때나 태풍이 불 때는 안부전화도 하고 생일이나 일본의 절후에는 선물도 보내며
인간적인 관심만을 보여주어야 했다. 회사의 선물이나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방패막부터 쳐 버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본휴일을 낀 주말에 가족과 함께 한국여행도 초청해 보기도 했다. 수영공항(당시 해운대 부산공항)에서
픽업해서 회사 게스트 하우스에 숙식하면서 가족끼리 시라기(新羅) 관광을
하기로 했었다. 무료로 초청하면 그들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채널이 형성되는 줄 알았는데 어디나 정비담당자는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워 쉽게 약속을 하고도 성사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직접 찾아가서 부딪혀 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 주변의 일을 만들어 가까이 가니 시내에서 한번 만나자며 사전 약속을 하고 호텔에서 연락하면 그를 회사 밖에서 만나게 된다. 이 경우 한국에서 접대 받은 게 있어서 대개 그들이 대접을 해주지만 때에 따라 내가 부담한다. 그와 식사를 하면서 어떤 사고는 이리 처리하고 있는데 일본은 어떠냐며 정비과장으로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뉘앙스(Nuance)를 보여주며 일본도 초기에 그랬냐는 둥 하면서 한두 마디씩 확인을
한다. 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화가 통한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 개인채널이 형성되는 것이다. 개인채널이 형성되면
기술인으로서는 크다란 울타리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코멘트는 스키드 파이프의 누수는 내화재의 균열이 먼저이고 균열은 시공 후 표면의
작은 돌기물이 슬라브에 걸려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파이프 수리는 년 1회
비싼 내열특수강보다 가성비가 좋은 보일러용 고급강관을 사용하라고 했다. 어차피 열에 견디는 것은 내화재이지
특수강이 아니라는 것이다.
파이프의 교체부위도 노 내만 하는게 아니고 입구와 출구까지 해서 신구 파이프를 연결하는 용접부가 노
외에 위치하도록 한다고 했다.
스키드 파이프의 외곽 내화재 시공은 내화재를 지지하는 Y형
칩을 단 1mm라도 길게 하고 틀을 만들어 압축주입해서 파이프와 일체가 되도록 하고 특히 외부 표면에는
돌기물이 없이 파이프처럼 평탄해야 슬라브와 미끄럼이 원활해서 제품의 스키드 마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화재는 틀을 양분해서 내화재를 넣고 철사로 묶어서 건조시켰기 때문에 표면이 그리 매끄럽지가
않았다. 표면에 작은 돌기라도 있으면 수십 톤의 슬라브 힘에 밀려 균열이 생기는 것으로 보였다.
테이블 롤러의 베어링도 전체의 1/3정도가 고장 나면 남은
것은 아깝지만 잔존수명을 무시하고 무조건 전체를 교체하는 게 정비시간으로 인한 감산보다 이익이라고 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그날 저녁은 살 것 같았다. 귀국하자 바로 직계만 상세내용에
대한 출장보고를 드리고 다음 대수리를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회사는 바로 3기확장 기획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포철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어서인지 고로도 대형으로 1, 2기
고로의 거의 배가 되는 년산 280만톤짜리를 기획했다. 완성되면
하루 철강생산량이 거의 일 7500톤, 1,2기 설비와 합쳐
연산
550만톤에 달한다. 550만톤체제는 그 당시 단위제철소로서는 철강경쟁자로 부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회사는 일본제철소의 경쟁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자 일본측의 공식적인 기술통로는 꽉 막혀 버렸다. 그
전까지 만해도 그런대로 상세하지는 않았지만 윤곽만은 소통이 되었는데 그 길들이 공식적인 채널은 완전히 차단당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개인채널은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해 대수리때 스키드 파이프 수리에 모험을 걸었다. 노재과는
수차 틀을 만들어 압축 주입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모의 시공을 해 본 결과 Y형 칩도 키울 수 있었다. 대수리 전에 새 파이프 주변에 틀을 고정시키고 콘크리트 전주 만들듯 압축주입을 해서 숙성시켰다. 며칠 후 틀을
제거하자 내화재 표면이 파이프처럼 매끄러웠다. 슬라브가 큰 마찰없이 이송될것 같았다.
드디어 대수리가 시작되었다. 종전 노 내만 교체하던 스키드
파이프를 입출구에서 절단했다. 노내에서 할 때는 노열 때문에 며칠 기다려서 했는데 노 외에는 열이 쉽게
비산되어 첫날 쉽게 절단했다. 그러고 나니 노자체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이게 가열로였던 가를 모를
정도로 바뀌어 버렸다.
이를 들은 열연공장장이 놀라서 쫓아왔다. 뒤이어 열연부장이
오고 생산담당 부소장도 와서 가열로를 망가트려 놓았다고 난리가 났다.
‘정비과장이
회사를 망쳤다고 야단이었다’ 정비 측에서도 부장과 부소장 급인 공작정비본부장이 오셔서 정비는 정비에게
맡겨 달라고 설득했으나 생산 쪽에서는 공장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고 사장과 회장에게 보고를 드렸다.
얼마 후 회장님이 직접 오셨다. 이미 가열로 내 쇠붙이는
전부 철거되고 노내 작업을 위해 입출구에서 송풍과 배풍을 시키며 공기 단축을 위해 드라이 아이스로 내부를 냉각하고 있었다. 회장님은 기가 찬지 한참 바라보시더니 정비사무실로 따라오라고 하셨다. 부장과
본부장과 함께 회장님 앞에 섰다.
일본을 다녀와서 얻은 자료를 근거로 출장 후 보고 드린 대로 정비 측에서 수차 시뮬레이션을 하고 결정한
것이라고 부장님께서 설명을 드렸다. 회장님께 도면을 보여드렸지만 그건 안심을 시켜 드리기 위한 제스츄어였다.
회장님은 한참 무언가 생각하더니 ‘자신 있어, 가열로를 원상태로 수리할 자신이 있느냐?’고 본부장에게 하문하셨다. 본부장이 ‘일본에서 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입니다’라고 안심을 시켜
드렸지만 그래도 회장님은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았다.
회장님은 그것 때문에 일본을 다녀온 줄을 아시지만 생산부서는 그 내용을 모르고 야단인 것이다. 그런 게 공개가
되면 온 개인채널이 막혀지므로 사내에서도 기밀 중에 기밀이었다.
갑자기 회장님께서 ‘정비과장이 배포하나 크구나, 자신 있어?’ 하고 또 물으셨다. 부장님과 동시에 ‘예, 자신 있습니다’고
대답을 드렸다. ‘그럼, 가열로를 살려 놓아’하시고는 근심 어린 얼굴로 회장실로 돌아가셨다.
몇시간 동안 진땀을 흘린 탓으로 정신이 멍했지만 작업상태를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수리현황판을 보고
있는데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정비과장은
가열로 수리가 끝날 때까지 근무위치는 가열로 내부(內部)로
하라’며 당장 책상을 그리로 옮기라는 것이다. ‘회장님도
책상을 옮겨 가열로 내에서 함께 근무하신다'는 것이다.’
아직 가열로는 열이 높아 드라이 아이스로 강제 냉각 중이라 사람이 들어갈 여건은 못되었다. 비서실에 지금 온도가 높아 못 들어가니 적당한 온도에 옮기겠다고 답변을 했다.
비서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정비과장 책상 하나 버려도 당장 옮기라는 회장님의 명령이라며
회장님 책상도 지금 옮긴다고 했다. 책상 하나가 문제가 아니고 가열로에 대한 중요성과 심각성을 알리는
뜻으로 보였다.
가열로 내는 벽면의 잠열로 사람이 들어가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회장의 뜻을 안 이상 바로 책상 설합내 서류들을 별도로 보관하고 책상과 의자를 가열로 내로 옮겼다. 뒤이어
회장님 책상도 옮겨왔다. 당장 책상주변 둘레 고무가 녹아내리고 의자의 스폰지가 타 버렸다.
이제부터 대수리 콘트롤 타워는 정비사무실이 아니고 가열로 안이었다.
부랴부랴 현황판을 가열로 인근 벽면으로 옮기고 그 다음 날 아침부터 그곳으로 출근했다. 아침이면
회장님도 바로 가열로로 오셨다. 5월의 계절이지만 가열로 내부는 아직 한증막 온도 보다 높았다. 곧 옷에 불이 붙을 것 같은데 회장님은 군에서 단련된 분이어서 그런지 태연하게 앉으셔서 이것 저것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리계획을 점검하셨다. 물론 부장님도 본부장님도 함께였다.
본부장이
회장님께 ‘아직 뜨거우니 밖에서 점검하시지요’라고 권유를
드렸다. 회장님도 ‘뜨겁긴 뜨겁구먼’ 하시며 밖으로 나오셔서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신 채로 30분쯤 바라보시며
정비과장은 여기 있지 말고 할 일을 하라고 하셨다. 회장님은 본부장과 부장이 안내를 하고 나는 작업원들과
같이 방화복을 입고 연신 비지땀을 흘리며 노열때문에 시간을 정해서 교대로 하는 작업내용을 체크했다. 대수리 4일째쯤에는 노내에서도 일을 할 만큼 온도가 낮아졌다. 회장님도
직접 하루에 한 두 번 나오셨다.
대수리 5-8일차는 노내의 책상을 노 전면으로 옮기고 스키드
파이프를 부착하고 후속작업을 했다. 겉모양으로는 가열로가 전상태로 돌아간 셈이다.
회장님의 책상이 옮겨온 다음부터는 생산부서도 함께했으나 가열로 모양이 갖추어 지자 대학동기인 생산부서 과장(공장장)도 ‘이제는 정비를
믿는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대수리 9-13차는 가열로의 대수리 마무리와 생산부서에서
새로 도장한 내화재를 건조곡선에 따라 가열로를 승온하는 기간이다. 한꺼번에 온도를 올리면 내화재가
손상되므로 건조 스케쥴에 따라 차츰차츰 온도를 올려야 했다.
마지막날 조업팀과 정비팀이 함께 시운전을 하면서 새로 정비한 설비들을 조정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대수리가 끝나고 조업이 시작되었지만 며칠 동안은 잠이 오지를 않았다.
하루가 지나면 오늘은 무사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평소 같으면 누수가 생길 만한 4개월이 지나자 이제는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연 비싼 특수강을 쓰지 않고도 1년을 잘 견뎌줄까? 하는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집에서도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당시 회사 SOP는 야간에 한시간 이상 예상되는 사고는 당직차가 정비과장을 데리러 왔다. 통금시대이지만 당국에서 배려하여 회사의 당직차는 운용하는 편의를 봐 주었다.
그러느라고 회사는 당시 그 귀한 전화기를 정비분야 간부에게는 설치를 해주었다. 긴급연락을
위해서다. 그래서 잠 잘 때도 늘 전화기가 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정비과장이
되면서 시도때도 없이 주중과 주말을 회사에서 보내느라 자신도 모르게 멀어진 교회를 생각하며 하면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