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시편 36:9]
시편 36편에는 인간의 사악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이 대비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여기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경외는 '놀람과 두려움'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나의 생각을 넘어선 신비 앞에서 겸손하게 서게 한다.
욥기 1장 1절에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가 선과 악의 구분점이 되는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눈은 의기양양하여 자기의 잘못에 무감각하고,
입은 사기와 속임수에 능하여 좋은 일과는 담을 쌓으며,
마음은 자나깨나 남 속일 궁리하며 악에서 떠날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니,
사망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도다.
결국,
악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악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도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 그는 악인이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점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인 것이다.
혹자는, 의인과 죄인의 구분이 윤리적인 잣대가 아니고, 칭의 혹은 이신득의므로 비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죄에 물들어 살고 있어도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비윤리적인 삶이나 죄에 대해 민감하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악의 본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해야할 대상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지식이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늘 함께 있지만, 하나님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다.
6절에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라는 말씀을 눈여겨 보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인간이야 인간의 관점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이길 바라지만, 창조주에게는 다른 피조물들도 똑같이 사랑을 받아야하고, 구원받아야하는 존재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사설을 펼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 '동물신학'이네 뭐네 떠들고 있다는데 이러다가는 '식물신학'도 나오게 생겼다.
그들에게는 신학이 필요없다. 타락한 인간에게나 신학이 필요할 따름이다.
게다가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학이다.
신을 인간이 규정한다는 것자체가 불가한 일이다. 신은 단지 경외의 대상이다.
결국, 신학은 이 두려움(경외, 신비)의 대상 앞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학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한결같이 단물을 내는 생명의 샘이시고,
한결같은 빛으로 우리를 비춰주시는 분이시다.
그의 사랑은 변함없고 한결같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횡포로부터 한결같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나 불안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외 또는 신비, 초월, 저 너머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알 수 없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먼저 믿고,
믿기 때문에 그분을 이해하려 하고, 표현하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