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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뒤죽박죽 천국 가는 순서>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천국을 들어가는 순위를 정하십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세리와 창녀들 보다 순번이 뒤로 밀리게 됩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리고 두렵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세상에서 쓰레기로 취급을 받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쓰레기까지는 아니라 오히려 두렵습니다.
뒤죽박죽 천국 가는 순서
(마태복음 21:23~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뒤죽박죽 천국 가는 순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뒤죽박죽 천국 가는 순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순서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 장관 국회의원 등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재벌회장으로부터 시작해 대기업회장 중소기업회장 자영업사장 등의 순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공부가 주된 관심인 학생들은 1등으로부터 시작해 성적을 등수로 매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들에게 순서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분야에는 순서가 있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는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사회에서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에 1등으로 들어갈 그룹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는 명명백백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쓰레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가리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위치에 계신 분들이라면 기성교단들의 총회장이나 가톨릭의 추기경이나 교황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교계 서열에서는 1등의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천국과 관련해서 이러한 순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 쓰레기와 다름이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리와 창녀는 여호와 신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사회에서는 쓰레기로 여겨졌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예수님과 사회지도층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사적인 감정으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천국과 관련된 객관적인 논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 쓰레기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가 천국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객관적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천국을 현실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천국을 사후세계에 대한 보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을 사실로 고백할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붙일 현실로는 승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두 아들의 비유에 앞서 23~27절에서는 예수님의 권위를 묻는 질문이 나타납니다.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본문의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말로는 순종했지만 실제로는 거역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말로는 거역했지만 이내 뉘우치고 순종하였습니다. 결국 포도원에 가서 일은 한 것은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포도원이란 선민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민이 평생 하는 일은 신명기 6장 5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온 인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직 선민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선민들이 이 말씀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이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선민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선택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선민들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 돈이나 권력이나 자녀의 형통이나 건강 등의 이 세상의 것들을 선택해서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즉 이것들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오직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가능합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선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으로 비유된 선민의 평생의 일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 말로는 순종했지만 행동으로는 거역하였습니다. 이 첫째 아들은 대제사장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같은 사회지도층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소위 유대사회의 엘리트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측면에서 볼 때에 이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으로써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게 됩니다. 육체로 접하는 세상의 가치들 중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고자 합니다. 그 결과 세상 가치들이 없으면 근심걱정하고 가지게 되면 기뻐하고 만족해합니다. 따라서 선민의 일이란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죄의 속성 즉 이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자 하는 나 자신을 성전의 번제단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성전 존재의미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 기뻐하려는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에 이 세상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하나님과 선민 사이에 존재하는 계약과도 같은 관계를 전제로 놓고 볼 때에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의 내용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의 도’가 바로 선민으로써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대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게 됨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의의 도’를 따르지 않는 삶이란 마음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돈 권력 명예 같은 이 세상의 가치를 선택하여 마음을 채우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세상을 선택한 자신을 물에 빠져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합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인간쓰레기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포기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회지도층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일컬으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곧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뜻으로써 하나님과 끊어졌음을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세리와 창녀들은 자신들의 천한 직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귀한 직업을 가졌다고 여겨지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끊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이르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육상의 자손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들은 세리와 창녀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쓰레기로 취급 받으며 끝나는 인생인줄로만 알았는데 자신들도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소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다시 태어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아버지의 명령에 말로는 거역했지만 이내 뉘우치고 순종한 두 번째 아들로 비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과 관련된 객관적 논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32절에서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이라는 말씀은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외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오른편에 천국이 있고 왼편에는 몸으로 만나는 세상이 놓여있다고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빨아들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까이 가지고 오시기 전과 또 성전 번제단에서의 죽음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원죄의 속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의 존재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천국을 가까이 가져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마음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몸을 따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 예수님이 가져오신 온 천국을 추구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사회의 지도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들을 얻는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권력과 명예와 재물 등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많이 획득하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세리와 창녀들은 이와 대비되는 계층이었습니다. 세리는 민족을 강탈해서 세금을 착복하는 매국노 소리를 들었습니다. 돈을 얻는 대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돈을 숨통으로 여겼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창녀는 돈도 많이 벌지 못했을 것이고 멸시도 받았으므로 이 세상의 가치획득의 경쟁에서 꼴찌 수준에 머물러 있던 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외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풀어서 이해해보자면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획득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아! 이제 방향을 바꾸어서 천국으로 들어가자!”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두 계층으로 반응이 갈라지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대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한 사회지도층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얻기에 유리한 위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 쪽으로 멀리 멀리 떠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으로 돌아오려면 세상을 향해 멀리 간만큼 힘들게 돌아와야만 합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는 세상의 가치를 얻기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향해 몇 걸음 떼지 못했기에 마음이 천국 쪽을 향해 돌이키기도 그만큼 쉬웠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나사로는 세상의 가치를 향해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었습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심지어 건강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획득 경쟁의 출발점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천국이 제시되었을 때에 그 즉시 마음을 돌려 천국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의 거리감이야 말로 천국과 관련된 객관적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대한 반감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반드시 거지 나사로의 상태를 거쳐야만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들이 담기지 않는 마음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일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는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는 자녀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더라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습니다. 죽은 가장이라면 집안이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더라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획득 경쟁에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고 곧바로 천국으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말입니다만 대형교회의 목사님과 개척교회의 목사님 중에 누가 더 천국가기가 쉬울까요? 대형교회나 개척교회나 세상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의 마음에서 교인이 많아야 좋고 예배당 건물이 커야 좋다는 세상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면 천국으로 돌아올 길은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 목사님의 마음에서 교인이 단 한 명만 있고 교회가 작아도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는 선민의 규칙이 적용된다면 천국 길은 너무도 가깝습니다.
부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 이런 자녀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천국을 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가 말도 안 듣고 공부도 못 한다면 그 만큼 천국을 향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보다 쉽게 천국을 향하게 했으니 오히려 부모님에게 큰 덕을 끼치고 있는 셈이니 복 받은 셈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에 이 객관적 기준이 적용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 달려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 방향에 천국을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 끝에 천국이 있었다면 엘리트 그룹의 사람들이 천국을 독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기준으로 할 때에 천국은 세상의 반대편에 존재합니다. 세상에서 높은 순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이 개관적 논리를 모르거나 경시합니다. 유대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써 이 사실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과 같습니다.
본문 31절에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간다고 했으니 나중에라도 들어가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대사회의 지도층에서 몇 명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을 지를 생각해보면 나중을 기대하기란 요원합니다. 평생을 추구해온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겨서 천국을 향하게 되었어도 몸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일하고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이제 이 모든 일들에 천국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나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23~27절까지를 보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의 권위를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에는 일말의 두려움이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또한 피하지도 않으시고 의연하게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이 일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천국에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뜻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시고 계셨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마음을 천국에 보낼 때에 예수님과 같이 천국의 권세를 드러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시작은 십자가를 붙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리와 창녀 그리고 거지 나사로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될 때에 마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천국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마치 물의 흐름을 따라 뱃놀이를 하듯이, 포석정에서 왕이 허락한 술잔이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오듯이, 벨트를 타고 돌아가는 회전초밥 집에서 초밥을 먹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삶을 주셨는데 이 세상 가치획득 경쟁에서 뒤지지 않겠다고 바보처럼 살아왔습니다. 가까이 온 천국은 2000년 전부터 준비되어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아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으로 끌려가는 마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채우시기를 바라고, 이 세상의 삶은 하늘로부터 비롯된 아버지의 뜻을 받으며 두둥실 뱃놀이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가까이 온 천국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 아버지로 채워져서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몸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하늘에서 비롯되는 뱃놀이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