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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의 줄거리:
십자가를 앞둔 시점에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동시에 세상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성전의 멸망을 결정하심으로써 동시에 이 세상 삶의 본질적인 성격도 결정해버리십니다. 바로 재난입니다. 이 세상 삶은 재난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결정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복음이 끼어듭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
(마가복음 13:1~10)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
언제나 성경을 대하면서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나 계시록을 비롯한 예언서들에서 언급된 종말에 대한 묘사들은 어둡고 우울하고 무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암울한 종말이 성전의 멸망을 신호탄으로 하여 시작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가 출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거짓 믿음과 거짓 구원을 남발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을 팔아먹는 하늘장사꾼들이 역사 속에서 생겨나리라는 것입니다. 또 난리가 나고 그 소문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도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남한과 북한의 대치, 일본과는 무역전쟁을 비롯해 끝도 없이 전쟁은 치러지고 있습니다. 또 종교적으로도 중동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종말의 모습을 묘사하시는 가운데 10절에서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쁨의 소식이라는 뜻의 복음은 종말이라는 말과는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전쟁에 끌려 나가서 어머니만 남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무엇보다 애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을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아버지와 아들도 무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쁨을 주는 소식이 어머니에게는 복음입니다. 본문에서 복음으로 번역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암울하게 묘사되는 종말의 모습 속에 어떻게 이러한 기쁨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헤롯 대왕의 성전 부지는 가로가 360미터였고 세로가 4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시설이었습니다. 성전 건물의 기둥들은 모두 대리석이었으며 외벽은 특별히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습니다. 또 지붕은 황금색 지붕을 얹어서 햇빛이 비칠 때마다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보는 사람마다 놀랐다는 역사가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전을 보자 제자들 또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유대인들의 자랑이었으며 미신의 발생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이 건재하는 한 하나님이 나라를 지켜주시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영적인 용도로 바르게 활용될 수 없는 한 무가치한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채 예수님께 성전의 화려함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십니다. 헤롯 대왕이 성전을 증축하기 위해서 동원한 석재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도 허물어지게 됩니다.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된 이유는 성전을 지을 때 돌과 돌 사이에 보석이나 금화를 넣었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파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전이 무너진 뒤에 종말이 시작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존재 의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12장 29~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럴 때에 이웃에 대한 사랑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된 믿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마음이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전은 마음이라는 로켓을 하늘로 발사하기 위한 발사대와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원죄로 말미암아 마음을 세상으로 채우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성전과 비교함으로써 잘못된 일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있었듯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겨야 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 돈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형통이나 건강과 장수 혹은 번영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상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을 통해 마음은 하나님을 찾아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던 하나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셨고, 솔로몬도 성전을 짓고 헌당기도를 할 때에 열왕기상 8장 30절에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은 이처럼 땅에 묶여 있는 마음을 상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죽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성전을 영적인 용도에 맞게 사용하지 못했고 성전 건물의 존재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선민이 세상 사람들과 같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선민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기에 이방인과 같아지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담은 마음이 어린양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길은 열릴 수 있었고, 이러한 역사는 선민들로부터 시작해 이방으로 퍼져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해야 했던 선민들이 오히려 이방인들과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담은 상태를 유지하고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없애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없어짐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결정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복음이 완성되고 머지않아 AD. 70년에 성전은 파괴됩니다. 그로부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관하심은 재난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재난은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이전 말씀에서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이 가짐을 토대로 삼아서 높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서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에 기반을 둡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안정을 꿈꿉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재난을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지구상의 인간세상에서 안정이란 없음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만 들어도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실제로 난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안정된 삶을 구축하려는 마음과 삶에 타격을 입게 됩니다. 또 민족과 나라가 대적하게 됩니다. 민족과 나라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한 토대입니다. 이 토대가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흔들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강대국이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을 따라잡으려 애쓰는 중국에도 사람들이 꿈꾸는 안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미국 내에서만 4천만 명이 실직했다고 합니다. 거의 우리나라 인구에 육박하는 숫자가 실업자가 된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에 안정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돈도 제일 많고 군사력도 제일 강한 미국인데 안정이 없습니다. 남북문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집니다. 남북관계가 좀 안정적으로 유지되나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삐라사건으로 인해 안정은 깨어집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연재난 중에서도 특별히 지진과 기근을 언급하십니다. 땅이 흔들리는 지진은 결국 삶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기근은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인 일용할 양식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난의 모든 성격은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신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선민들의 마음이 이방인과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여 많이 갖고자 하고 모은 것을 토대삼아 그 위에 서서 높아지려 하는 이유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의도로부터 성전의 제사도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성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뇌물을 바쳐서 세상에서 안정을 찾기 위해 성전을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충성하고 봉사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타락한 선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삶을 살고자 육체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직장생활과 자녀들의 진로가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희망일 뿐이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안정됐다 싶으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살면서 길어야 한 달이나 안정을 누릴까 일 년이라도 안정을 누려본 사람이 드뭅니다. 돈이 많다고 안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 회장이 돈이 많다고 해서 안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삶의 토대는 언제나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개인의 안정만이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재난이 벌어지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또 대형 예배당 조직을 이끄는 목사님들은 안정을 위해 자녀에게 세습까지 합니다만 그것이 과연 안정적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이토록 사람들이 안정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재난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안정의 토대를 흔드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멸망이 이 결정을 드러내시는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재난을 결정하신 이유는 성전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은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를 성전을 통해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를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선민들에게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자 성전은 존재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멸망시키며 재난을 결정하시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많이 모아서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75억 인류의 희망이고 바람이라면 그 토대를 흔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민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민족과 나라의 토대마저도 하나님에 의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 속에 복음이 존재합니다. 75억 인류의 삶은 죽을 때까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찾으려 할수록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어떤 사람의 삶도 세상에서 안정의 토대를 찾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찾고자 하는 바람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난 속에 있는 복음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기쁨의 소리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안정을 위해 붙잡아야 될 대상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열렸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이 저주의 자리가 복음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으신 자리는 바로 세상을 붙잡았던 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성취되게 됩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를 고집스럽게 붙잡는 것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자리가 나의 자리임을 마음속에서 생각합니다. 십자가 붙들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짐은 곧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에는 더 바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게 되고 이것이 나를 향한 최고의 사랑이 됩니다. 십자가가 나의 자리임을 고집하고 머물러 있었을 뿐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은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은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설령 그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만난 하나님이 이번에는 나를 통해 이웃을 상대하시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인 이유입니다.
한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안정을 찾고자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가짜 예수와 가짜 복음이 미혹하게 됩니다.
6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는 많은 사기꾼들이 예수를 사칭하였고 가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사칭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가짜 예수를 소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녀의 문제로 목사님과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죽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복음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로써의 자아의식을 그대로 인정한 채 하나님께 기도하면 자녀의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조언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목사가 해줄 수 있는 상담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아버지로써의 자아의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로써의 자아의식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모든 설교는 가짜이며 미혹입니다. 마음에 세상의 가치를 담는다는 것은 세상 것과의 관계로부터 나라는 자아의식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신분과 위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죄 사함을 통하여 삶에 안정이 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여 마음에 세상을 담았다면 이미 죄의 상태입니다. 세상 앞에서 자아의식을 가졌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통한 자아의식이 우선시되는 것이 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세상을 품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두 미혹의 영들에 사로잡힌 가짜 선지자이며 가짜 예수입니다.
우리는 자녀 앞이라고 부모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를 앞에 두고서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고 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고 자녀라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설령 대통령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아의식이 정체성이 될 수 없습니다. 조찬기도회에 가서 대통령을 위해 축복기도를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일깨워줄 수 없다면 가짜 목사일 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예수를 마음대로 만들어서 믿고 있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은 대통령이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라는 것뿐입니다. 대통령자리에서 청와대에서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며,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대통령을 통해 오천만 국민이라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이며 참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재난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안정적 조건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안정을 허락하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이 세상에서의 안정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흔들리는 삶의 토대 위에서 평강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복음을 붙잡는 것뿐입니다. 누구와 만나든 어떤 상황에 있든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내 것으로 삼는 상태에서만 흔들리는 삶의 토대에서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핍박조차 누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있어야 될 자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임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누구를 만나든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세 가지 일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로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