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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 김인주(金仁珠) - 파란중첩의 생애 4. 또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1 나는 애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와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도 부두노동을 하였다. 어느날 길가에서 옥씨 어머니를 만났는데 “선생님이 피난 오셔서 고생 중에 계시니 무엇 드릴 것 없느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수중에 아무것도 없고 몸은 병들었으니 선생님께 가셔서 저를 식구로만 인정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선생님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셨다고 한다. 2 우리는 남동생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창고를 얻어 방을 꾸미고 살았다. 그 후 대구고등학교에 남편이 취직이 되었으나 너무나 박봉이므로 나는 월급 탄 돈으로 소아복을 사서 장사를 시작했다. 3 어느 날 어떤 부인이 낙하산 기지로 속치마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치마 사라”라고 하기에 “좀 쉬어 가라”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예수 믿는 분인가”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우리 어머님도 예수를 믿는데 참 이상한 예수를 믿는다”라며 주님이 한국에 나타나셨는데 지금 찾지를 못해서 찾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드린다”라고 하였다. 4 그래서 “어머님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더니 “지승도” 라고 하는데 얼마나 기쁜지 “어머님을 내일 모셔 오라”라고 했더니 그다음 날 모시고 왔다. 5 지승도 모친은 선생님의 행방을 모르고 피난 나와서 항상 애타게 소식을 그리워하던 터에 나를 만나게 되자 “선생님 주소를 아느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며칠 전에 원필씨로부터 주소를 받았지만 장사를 벌여 놓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처지였다. 어머니께 주소를 드리고 “만나시면 곧장 편지하시라”라고 부탁했는데 선생님께 가서는 함흥차사다. 6 그 후 식구들에게 부산의 친정댁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는 친정에 가서 올케와 같이 범일동(凡一洞) 산(山)에 올라가 2일간을 골짝마다 다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옥씨 어머니만 찾으면 될 것 같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따님(나하고 동기 동창)을 찾아갔더니 정애를 시켜 수정동(水晶洞) 집을 가르쳐 주었다. 7 그곳엔 원필씨와 이봉운 장로님 가족, 득삼(得三)씨, 성실(聖實)씨, 오 집사 등 몇 분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때 성실씨가 부민동에 살기 때문에 원필씨가 나와 같이 다니라고 하여 매일 아침마다 우리 집에 와서 예배보고 120가정에 축복받은 구옥수(具玉秀)씨도 우리 집에 같이 있었고 문정숙(文貞淑)씨도 같이 있었다. 그 후 몇 주일 후에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부산의 영도에서 집회를 가지셨다. 그때 유효원, 효영, 효민씨, 김관성 장로님, 김찬균씨 누님 등이 입교했었다. 8 나는 선생님이 옥중에 들어가신 후부터 왼쪽 머리가 칼로 저미는 것 같이 쿡쿡 쑤시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심장병으로 인하여 손발이 붓고 항상 놀래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9 선생님을 만난 후부터 매일 밤 영적으로 내일 공부할 원리를 30일 동안 지도 받았는데 다음날은 꼭 그 원리를 강의하여서 참으로 실감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밤이 되면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혜자 아빠는 언제나 내 뒤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아무 반대도 안 했다. 그처럼 하늘이 내게 은사를 베풀어 주셔서 아프던 모든 병이 다 나아버렸다. 10 이렇게 갖가지 역사가 벌어져 식구들이 많이 모이는데도 유효민씨 부인은 선생님과 같은 마을 사람인 고로 잘 믿지를 않았다. 하루는 성경을 가지고 와서 선생님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데 “성경을 아무 곳이나 펴보라”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시고는 펴는 곳마다 알아맞히셨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평양에서 내가 매를 맞을 때마다 식구들을 보내시던 역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11 부산 영도에서는 신희씨 댁에서 집회하다가 방이 좁아 딴 곳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이봉운(李鳳雲) 장로님이 교회에 계시면서 식구들에게 많은 밥을 해서 대시며 반기셨는데 그때 밥은 참으로 맛있었다. 12 선생님께서 서울에서 내려오셨다가 가신 후 아빠도 경희대학교가 개교하므로 서울로 같이 올라가자고 하는 것을 신앙생활에 해가 될 것 같아 애들 셋을 데리고 부산에 그냥 남았다. 13 나는 교회에 하루라도 안 가면 못 살 것 같아 매일 나갔고 식구들과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 매일매일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자꾸만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어느 날은 ‘있는 돈으로 쌀을 사라’라는 음성을 듣고 쌀을 잔뜩 사 놓았다. 얼마 후에 아빠가 편지를 하다가 안 되니 직접 내려왔다. 14 나는 쌀 때문에 못 가겠다고 했더니 쌀을 팔라고 해서 팔려고 내놓았는데 팔리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빠는 그냥 상경한 후 생활비도 안 보내 주었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10원밖에 안 남았는데 아빠가 경희대 학생 편에 1만 원을 보내 주었다. 그 돈을 조금씩 아껴쓰고 꼭 10원이 남았을 때 이번엔 외할머니 편에 1만 원을 보냈고, 또 10원이 남았을 때 1만 원을 보내왔다.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15 교회에 나가면 원리강의도 들었지만 사진을 제작해 팔았기 때문에 그 일을 도와야 했다. 나는 아빠가 출근한 후엔 사진을 가위로 잘랐다. 얼마 동안 자르고 나면 손이 아파도 수경씨가 길거리에서 판매할 생각을 하면 ‘무엇이 아프냐 어서 자르자’ 하며 일했다. 사진은 만드는 대로 잘 팔렸다. 사진을 판 돈으로 식구들의 생활을 했다. 사진이 마르지 않을 때는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철판을 사다가 얹어 말리곤 했다. 16 식구들이 많으니 빨래도 많이 나왔다. 하루 건너 30~40가지씩 쌓이는데 그것을 가져다가 집 근처의 수양버들이 있는 집에 잠깐 맡겼다 가는 집 동정을 살피고서 풀을 쑤어가지고 중랑교 강에서 씻어 풀을 먹여 모래강변에 말려 놓고 구옥수씨와 같이 마늘장아찌와 고추장, 김치로 밥을 해서 먹으면 꿀맛 같았다. 17 구옥수씨 하는 말이 “어머니 우리가 무슨 복이 많아서 이런 빨래를 맡아서 하게 되지요?” 하면 “오냐, 네 마음이 착하다. 이런 시절이니 우리가 이런 빨래를 하지, 이후엔 우리 손에 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빨래해가지고 오는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이 컸다. 18 그렇게 계속했지만 새 식구가 오는데도 빨래를 이고 가야만 했던 일, 누가 강의 듣고 집에 가라는 분도 없고 빨래를 속히 해 와야 한다는 분도 없건만 바쁘게 보냈다. 몸이 아파서 좀 쉬어 보자고 누워 있으면 팔다리가 더 쑤셨다. 19 하루는 뜰을 정리하느라고 집에 있노라니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왜 다리가 이렇게 아픕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가라!” 음성이 또 들렸다. 그래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대문을 나서니 아픈 다리는 어디 갔는지 펄펄 날 것 같이 빨리 걸리는데 이것이 축지법이지 다른 것이 축지법이냐 하고 있는데 “양윤영씨 집으로 가라”라고 해서 걸어서 홍릉고개를 넘어 동대문까지 버스를 타고 장충단 양윤영씨 댁으로 갔다. 20 그날이 한충화 선생이 입교한 지 1년 되는 날이라고 잔치를 하고 있는데 불쑥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어떻게 알고 왔느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셔서 왔어요” 했더니 “앞으로 심령만 맑으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 알고 찾아온다”라고 말씀하셨다. 21 흥인동교회로 이전해서 있는 동안 이화여대 교수님들, 학생들, 연희대학교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다. 지금 미국 선교사로 계시는 김영운(金永雲) 선생은 양윤영씨 댁에서 아픈 몸을 끌고 오셔서 유효원 협회장님의 강의를 누워서 듣다가 점점 일어나서 들으시더니 매운 것, 짠 것 다 먹고 아무것이나 소화시켜 건강을 찾으면서 강의를 다 들었다. 22 김영운 선생은 김활란 총장이 제일 믿었던 사람으로 통일교회를 조사하라고 보냈으나 입교하게 되자, 학교 측에서는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다 해서 교수 5명과 학생 14명을 출교시켜 버렸다. 23 그 후 점점 핍박이 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선생님과 김원필씨, 유효원씨, 유효영씨, 유효민씨 등 다섯 분이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3개월 후에 무죄로 풀려나오시고 원필씨만 병역기피로 6개월형을 받았으나 복역 태도가 좋아 크리스마스 때 특사를 받아 나왔다. 24 나는 1963년도부터 본부교회 부인회장으로 임명되어 서울이 10지구로 분리될 때까지 일을 보았다. 원리시험은 3차 때 합격을 했고 제1차 7년노정 헌신상도 받았다. 한동안 동대문교회에서 부인회 일을 보다가 전국순회사 임명을 받게 되었다. 25 그 후 777가정 축복 때 1, 2, 3차에 약혼들을 하는데 나는 시험에 들었는지 아무래도 혜자를 참여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선생님께 “내가 정성이 너무 없어서 축복받지 못 할것 같다”라고 말씀 올렸더니 화를 내셨다. 26 그때부터 서둘러서 아빠에게 축복기금을 달라고 하였더니 “통일교회 축복받으면 행복하나” 하기에 “말할 것도 없이 행복하지요” 하고 대답했더니 “행복하다면 축복받게 하지” 하고 거의 끝에 가서 약혼을 하고 아슬아슬하게 777가정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아빠는 제1차 교수 원리세미나에 갔다 와서 “통일교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증명이 되었어” 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27 혜자의 결혼식 날엔 입장권 5매로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부부, 막내동생 등 다섯 명만 입장하고 친척들은 들어 가지도 못했다. 그 후부터는 아빠가 많은 이해를 하게 되어, 내가 순회하러 나가고 혜영이가 교회에 바쁜 일이 있어 늦게 와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 주어 참 감사함을 느낀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이 심정, 이 생각이 계속되기를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아버지의 영광의 한 날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다. |
証言 - 金仁珠 - 波乱の多い生涯 ④ - 再び神の愛の中で 私は、子供たちを連れて釜山に避難して来て、主人に会った。主人も埠頭の仕事をした。 ある日、道端で玉オモニに会い、「先生は避難してこられ苦労していらっしゃるので何か差し上げる物はないか。」と聞かれた。私は手元には何もなく、身体は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のて、先生の所に行って、「私を食口として認めてください。」とお願いした。先生はその言葉を聞いて喜ばれたということだった。 私たちは、弟の世話で辛うじて倉庫に部屋を構えて暮らした。その後、大邱高校に主人の就職が決まったのだがとても安月給なので、もらった月給の中から子供服を買い商売を始めた。ある日、ある婦人が落下傘の生地で下着を作って持ってきて「買いませんか。」と言うので「ちょっと休んでいきなさい。」と言うと「イエス様を信じている人ですか。」と聞いた。 そうだと言うと「家の母もイエス様を信じているんだけど、何とも変なイエス様を信じているんだ。」「主が韓国に現れたんだけど、まだ見つかっていないのでどうか会わせてくださいといつも祈祷する。」と言うのだ。それで「お母さんの名前は何でしょうか。」と聞くと「池承道」と言うのであった。どんなに嬉しかったことか「お母さんを明日連れていらしゃっい。」と言うとその次の日連れてきた。 池承道氏は、先生の行方が分からず避難してからはいつも消息を求めていたところに私に会えたので「先生の住所を知っているか。」と聞かれた。私は何日か前に元弼氏から住所を聞いていたが商売を始めたので今日明日と延び延びになっていた。お母さんに住所を差し上げて「お会いされたらすぐ手紙を下さい。」とお願いしたのに先生のところに行ってから話のつぶてだった。 その後、家の者には釜山の実家に行って来ると言って実家へ行き、兄嫁と一緒に凡一洞の山に登り二日間を谷ごとに捜し回ったが、見つからなくて帰ってきた。あれこれ考えて玉オモニさえ探し出せばいいのだと思い、再び釜山に下りていき、娘(私と同級生)を訪ねていったところ、水晶洞の家を教えてくれた。そこでは元弼氏とリ・ホンウン長老の家族、徳三氏、聖實氏、呉執事など何人かが礼拝を捧げていた。そのとき、聖實氏が、富民洞に住んでいるので、元弼氏が自分と一緒に通えというので毎朝私の家に来て礼拝を捧け一二○家庭の祝福を受けた具玉秀氏も私の家に一緒にいたし、文貞淑氏も一緒だった。その後何週間か後に先生がソウルから下りてこられ釜山地域での集会を持たれた。そのとき、劉孝元氏、孝永氏、孝敏氏、金クァンソン長老、金賛均氏のお姉さん方が入教した。 私は先生が獄中に入られてから、頭の左側が刃物で切られるようにぶすっぶすっと痛んで、心臓病のために手足は腫れ、いつも多くの苦痛を抱えていた。先生に会ってからは、毎晩霊的に明日勉強する原理を三〇日間指導を受けて、次の日行くと必ずその部分の講義があり。本当に実感の湧く信仰生活をしながら、夜になると家に帰って来た。主人はいつでも私の後を付いて来たので、何の反対もしなかった。そのようにして天が私に恩恵を施して下さり。苦しんでいた全ての病気が治ってしまった。 こうしていろんな役事が起こり。食口もたくさん集まったが、劉孝敏氏夫人は先生と同じ町の住人なのであまり信じなかった。あるときは聖書を持って来て、先生の反対側に座っていたのだが「聖書をどこでもいいから開いてみなさい。」と先生は言われ。開いた所全部を言い当てられた。私はその光景を見て、平壌で私が鞭で打たれる度に食口を送られた役事と同じだと思った。 釜山地域ではシンヒ氏のお宅で集会を持ったが部屋が狭くて別の所に引っ越しをしたのだがそこでは李鳳雲長老が教会に住みながら食事を作ってご馳走し嬉しそうにされていたが、そのときのご飯は本当においしかった。 先生はソウルから下りて来られ、また行かれたあと、主人も慶煕大学が開校するのでソウルに行こうというのを信仰生活に支障をきたすのではと思い、子供たち三人とともに釜山に残った。私は教会に一日でも行かない日があると死にそうで、毎日行き食口と本当に親しく過ごし毎日が喜びの連続だった。ところが主人はしきりにソウルに上がってくるようにと言うのだった。ある日「あるだけのお金でお米を買え。」という声を聞いて米をどっさり買い込んだ。 しばらくして主人が手紙を送ってもだめなので直接下りてきた。私が米のために行けないと言うと、米を売るようにと言うので売ろうと並べていたが売れなかった。仕方なく主人はそのまま上京してからは生活費も送ってこなかった。どうにかこうにかして暮らしていたが一〇ウォンになったとき、今度は私の母宛に一万ウォンを送ってくれ、また一〇ウォンだけになると一万ウォンを送ってくれた。その後、私たちはソウルヘと上がってきた。 教会に行けば原理講義も聞いたが、写真を制作して売っていたのでその仕事を手伝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私は主人が出勤したあと、写真をハサミで切った。しばらく切り続けると手が痛くなるが秀卿氏が道端で売ることを思うと「何が痛いものか。早く切ってしまおう。」と頑張った。 写真は作るだけよく売れた。写真を売ったお金で食口は生活した。写真が乾かないときは火を炊いて、その上に鉄板を買ってきて載せ乾かしたりした。 食口が多いので洗濯の量も多かった。一日おきに三〇~四〇枚ぐらいたまるのでそれを持って家の近所のしだれ柳のある家にちょっとの間預けてから家の様子を窺って糊を炊き中浪橋の川元で洗い、糊を塗って砂浜で乾かし、具玉秀氏と共にニンニクの漬物やコチュシャン、キムチでご飯を食べると蜜のようにおいしかった。具玉秀氏が「お母さん、私たちが何の福があって、この洗濯をするようになったのかしら。」と言うと「よしよし、おまえはいい子だね。 こういうときだから私たちがこんな洗濯をするんだ。時が経てば私たちの手元には来もしないだろうよ。」と言いながら、洗濯を終えて帰ってくる喜びは言葉にできないほどだった。新しい食□が来るようになってもずっと続けた。講義を聞いて帰りなさいという人もなく、洗濯を早くやりなさいという人もなく忙しく過ごした。具合が悪くなって少し休もうと横になると手足がもっと痛くなった。 あるときは、庭を整えようとして家にいると足が痛くて歩けなくなった。「お父様、なぜ足がこんなに痛いんですか。」と聞くと、「行け。」という声がまた聞こえた。それでやりかけの仕事もそのままにし、門をでていくと痛かった足はどこへやら、ぴんぴんになりさっさと歩くことができた。これが縮地法でなくてなんだろうと思いながら歩いていると「梁允永氏の家に行け。]という声が聞こえ、歩いてホンヌン峠を越え、東大門までバスに乗り梁允永氏の家に行った。 その日は韓チュンファ先生が入教して一年になる日だといって宴会をしているところに入っていくと「どうやってしったんだ。」と聞かれるのだった。「お父様が教えてくださって来ました。」と言うと「これから心霊さえ明るければ私がどこに行っても探してくるんだね。」と語られた。 興仁洞に教会が移転していた期間、梨花女子大学の教授たち、学生たち、延喜大学(現在の延世大学)の学生たちがたくさん入ってきた。今、アメリカに宣教師としていらっしゃる金永雲先生は梁允永氏の家で病身で来られ劉孝元協会長の講義を横になって聞いていたが、だんだん身体を起こして聞くようになり、辛いもの、塩辛いもの、何を食べても消化でき健康を取り戻されて講義を全部聞いた。 金永雲先生は金活蘭総長がいちばん信じていた人で統一教会を調べるようにと送ったのだが入教してしまったので、学校側ではこのままてはいけないと思い教授五名と学生一四名を退学させた。 その後だんだん迫害が始まり遂には先生と金元弼氏、劉孝元氏、劉孝永氏、劉孝敏氏等五名が西大門刑務所に入ることになった。三ヵ月後に無罪放免になった。元弼氏だけは兵役忌避で六ヵ月の刑を受けたが、服役態度が良くてクリスマスに特赦を受けて出て来た。 私は一九六三年から本部教会婦人会長に任命され、ソウルが一〇地区に分かれるまで仕事をした。原理試験は三次のとき合格し、第一次七年路程献身賞も頂いた。しばらく東大門教会で婦人会の仕事をしてから全国巡遊師の任命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 その後七七七家庭の祝福のとき、一、二、三次と約婚をするのだが、私は試練されたのか娘の恵子を参加させられそうになくて先生に「私の精誠が足らなくて祝福を受けさせることがてきません。」とお話すると、先生は私を叱られた。それからあわてて主人に祝福献金をくださいと言うと「統一教会の祝福を受けると幸せになれるだろうか。」と言うので「言うまでもない事です。」と答えると、「幸福になるんだったら祝福を受けさせよう」と言ってほとんど最後のほうで約婚をして七七七家庭祝福を受けた。 その後、主人は第一回教授原理セミナーに行って来てから「統一教会が異端でないことが証明された。」と言って喜んだ。 恵子の結婚式の日は入場券五枚しかなくて父、母、長男夫婦、末っ子等、五名だけ入場し親戚は入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 それからは主人がいろいろと理解するようになり、私が巡廻に行き、恵英が教会で忙しい仕事があり、遅く帰ってきても広い心で接してくれて真に感謝したものだ。 私は死ぬまで私のこの心情が、この思いが続くことをお父様に祈祷を捧げお父様の栄光の日を見てから死ぬのが私の願いだ。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