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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
본문<요6:27~33>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지난주에는 두 양식(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만 조금 더 부연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썩는 양식이란 예수를 따르는 목적성이 땅의 것, 육의 것을 위해서 믿는 것을 말하고, 영생하는 양식이란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목적성이 하늘의 것인 죄사함을 통해주어지는 영생이라는 ㅎ님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합니다. 죄사함을 통해 얻어지는 영생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이를 다른 말로 하면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마저도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 ㅎ님이 주셔야 믿게 되는 것이기에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구원의 근거가 되는 십자가도 주님이 행하신 것이고, 믿음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니, 구원은 사람 편에서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위해 부모가 모든 것은 준비해 놓고 출산하여 키워 가듯이 우리 ㅎ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을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사람 편에서 할 일은 단 1도 없고, 오직 ㅎ님 편에서 다 해 주시는 구원, 그래서 이게 복된 소식이고 좋은 소식이며 기쁜 소식이기에 줄여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행4장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 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예수 이외에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구요. 그래서 본문 27절에서 인자는 ㅎ님이 인치신 자니라고 합니다. 인을 쳤다는 말은 ㅎ님이 인정하여 구원자로 도장을 찍은 자가 오직 예수님 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오신 예수뿐이고 그 분의 십자가뿐 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IX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믿으면 산다’라고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서와 시가서가 IX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5.39절에서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때의 성경은 아직 신약이 없었던 때이니 구약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구약이라는 옛언약도 실상은 그 주인공이 IX라는 말입니다.
특히 죄사함의 규례를 다루고 있는 율법에서 명시된 성막 5대 제사 제도가 다 장차 오실 IX의 십자가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가 IX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사의 여러 가지 목적성을 5대 제사로 규정하여 시행해 왔는데, 이 모두가 IX의 십자가로 응축된 진리에 대한 메시지였다는 의미입니다.
5대 제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첫 번째, 번제란 말 그대로 불태워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양의 몸을 예리한 칼로 각을 떠서 불사르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과 뼈가 산산이 찢기고 으스러져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참혹한 죽음을 번제로 표현 했습니다.
소제란 곡식의 가루를 ㅎ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번제와 곁들여 드리게 됩니다. 밀과 보리가 여러 과정을 통해 가루가 되듯이, 예수님의 일평생 전체가 세상 죄와 싸우는 전쟁 속에서 몸과 마음이 산화되는 모습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IX의 거룩하신 삶이 ㅎ님께 의가 되어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도 의롭게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제란 IX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아 속해짐(즉 탕감)을 말 합니다. ㅎ님의 의를 이루기는커녕, 우리는 죄만 지었는데 주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에게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영원한 용서를 하시겠다는 약속의 제사입니다. 이를 히10장에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라고 말씀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고 변동이 없는 ㅎ님의 사랑입니다(히10:5~6/10/14/17~18)
이렇게 IX의 대속의 은혜로 ㅎ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화목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아먹으라고 별도로 화목제를 구약에서는 드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번에 모든 것을 성취하신 언약의 피 흘리심입니다.
마지막 속건제가 또한 중요합니다. IX의 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이지만, 삶 속에서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바울의 탄식처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탄식합니다(오호라 곤고하도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하신 대언자 하늘의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때마다 시마다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주님의 용서함을 받게 되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에게 성령의 힘을 빌려서 매번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지 않고, 왜 여전히 죄 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짐을 허락하실까요? 이는 우리 육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의 속성에 대한 통제를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어도 자신이 항상 죄와 싸워 이긴다면 자만함이 스며들어 고개를 쳐들고 사는 더 무서운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연약한 지체를 정죄하고 ㅎ님의 은혜마저 망각하는 데까지 망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ㅎ님의 쓰시는 고육지책이 바로 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죄에 취약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언제나 도움을 주시는 ㅎ님, 그리고 용서해 주시는 ㅎ님의 은혜 안에서 살라는 의도에서 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ㅎ님의 약점을 이용해서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뼈도 못 추리는 징계를 당하고 말 테지요. 물론 그래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때요 죄가 좋으니 한번 해 보실래요? ㅎ님의 매 맞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시험해 보시지요(헐..)
이 같은 5대 제사의 압축판이 대속죄일의 속죄제입니다. 이날 염소가 백성들의 죄를 끌어안고 번제단에서 각이 떠지고 불태워 집니다. 이 번제단의 제물이 바로 XI의 십자가 대속의 피 흘리심이었습니다. 그 피를 대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 ㅎ님의 처소에 들어가서 법궤 위에 7번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가 다 사해집니다(7은 완전하게 속해짐 의미). 이때 법궤 위의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속함(즉 탕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속죄소입니다.
시은좌란 ㅎ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자리라는 의미 값을 가집니다. ㅎ님의 자비와 긍휼로 용서를 베푸시는 자리가 용서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속죄(탕감)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ㅎ님 편에서는 은혜를 베푸는 시은좌라고 하고, 우리 편에서는 속죄소-이렇게 이중 계시를 담고 있는 자리가 법궤 뚜껑입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지요? 우리의 범죄가 상징으로 담겨 있습니다(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 각각 우리 죄의 상징물임-거역, 배신, 불신)
즉 법궤 안은 죄인인 우리가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IX의가 피가 그 위에 뿌려짐으로 우리가 용서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같은 복이 세상에 어데 있습니까? 아무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그냥 죽어 지옥가야 마땅한 우리가 값없이 조건도 없이 그냥 ㅎ님의 택하심과 사랑하심을 입어서 죄사함 받고 ㅎ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8-29절>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즉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야”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즉 영생은 너희가 무슨 일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IX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은 인간이 하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이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19:16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 속에 유대인들의 구원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에게 영생의 조건은 선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뒤에서 설명이 나오는데 부자 청년을 말합니다. 청년은 가능성의 상징입니다. 그 무엇도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때가 청년 아닌가요? 부자란 성공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이란 자랑과 자신감이 가득한 자를 빗댄 말입니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자가 와서 주님께 물었지요.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겁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선한 일이란 당연히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잘해왔다고 자부하여 주님께 질문 한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님의 역질문인 ‘네가 율법을 잘 지켰느냐?’ 물으시자, 자신있게 ‘제가 어려서부터 지키었으니 아직도 부족한 게 있을까요?’ 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카운터펀치를 날립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켰다고? 그렇다면 온전하고자 할진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주님은 왜 이런 제안을 하실까요?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을 설명코자 하심입니다. 율법을 압축하면 무엇일까요? ㅎ님 사랑 이웃사랑 입니까? 맞지만 또 틀립니다. 그 사랑 앞에 단서가 붙는 사랑입니다. ㅎ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무얼 말하지요? 하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너는 못하는 무능한 존재임을 알라먹으라는 말인가요? 후자지요(HOW?)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은 분명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에, 주변에 가난한 자들을 자기 몸처럼 대했다면 너의 소유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 이지요. 그런데 너는 재물이 많구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곧 나를 따르는 거야-라고 철퇴를 휘두르신 겁니다.
율법의 기준이 이러할 진데 누가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들은 남보다 조금 더 열심을 내면 그게 ㅎ님께 인정을 받을 줄 아는 것이지요. 즉 율법을 절대적 기준인 100%를 지켜야 온전히 지키는 것인데, 이것을 덮어버리고 상대적 개념으로 지키고는 이정도면 남들보다는 잘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율법을 대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 서두인 마5장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왔노라.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아주 무거운 말씀을 하시잖아요. 너희는 살인도 안했고 간음도 안한 깨끗한 자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형제를 미워만해도 살인이야,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야(행위 이전에 마음의 생각이 죄=> 모두 죄인), 만일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버려야 나머지 몸은 지옥에 안 갈 수 있어. 만일 오는 손이 범죄하면 잘라버려야 남은 몸이 지옥을 안 갈 수 있어..이게 바로 율법의 엄위한 기준이라는 겁니다. 아니, 한쪽 눈이 범죄하면 빼버리라네요? 손도 자르라네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런데 부자청년은 율법을 그저 형식적으로, 관념적으로 지키고는, 이정도면 합격이겠지 하고 자만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와서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었나이다.’라고 자랑한 것이었지요. 이 부자청년은 율법의 의로 치장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자기 소유가 많은 고로 포기할 수가 없어서 되돌아갑니다. 그러자 주님은 뒤통수에 대고 일갈 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도다.
한마디로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발상은 집어치우라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천부당만부당 하다는 말씀이지요. 이같이 인간의 행함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아니 수백 번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자발적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ㅎ님의 은혜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거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묻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부정해 버리십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믿음을 통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것이고 이것이 ㅎ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갖고 있었지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ㅎ님의 긍휼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수 없이 ㅎ님을 거역하고 배신해도 버리시지 아니하고 다시 용서하고 또 다시 용서하시는 그 이면에 숨은 ㅎ님의 자비와 인자와 긍휼을 모르고, 이방인처럼 세상의 것을 채워달라고 불평 불만하는 배신과 거역을 반복하면서도, 왜 자신들을 계속 용서하시는지 그 은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곳곳에서 ㅎ님은 탄식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구나. 부탁한다 이놈들아, 여호와를 알라, 힘써서 여호와를 알라-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이웃나라를 돋보고 우리도 저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네, 하면서 그들이 섬기는 신을 따라 우상숭배까지 더하는 죄를 저질러 왔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구약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무지하고 무가치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아예 다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야 마땅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ㅎ님은 이런 자들을 다시 끌어 앉고 용서 하십니다. 이것이 ㅎ님의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랑을 성취시키기 위해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지요. 예수가 오신 것은, 우리가 범죄해서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갑자기 설계 변경한 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우리 인간의 속성을 다 아시고 그런 무가치한 자들을 구원키로 작장하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ㅎ님의 작정을 ‘창세전 예정’, 혹은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에 따라 예수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에 따라 번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IX의 십자가는 ㅎ님의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의 확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5:8) 읽고, 우리란 누구지요? (요15/택하심을 입은 자들, 요일4장 ㅎ님 사랑 임한 자)
이렇게 ‘ㅎ님의 일’이란 IX를 믿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ㅎ님의 일’이라고 하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그야말로 일을 하려고 덤벼듭니다. 부자청년이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심산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인들은 여전히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ㅎ님의 일이란 교회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ㅎ님의 일과 반대되는 일은 세상 먹고 사는 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을 위해 충성봉사하고 헌금내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각종 행사에 열심을 냅니다. 수많은 교회 행사에 참여하느라 주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주일 내내 교회 행사에 붙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ㅎ님의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지요. 그 바람에 교회는 날로 부흥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신도 망하고 교회도 변질됩니다.
-거짓 교회: 사단의 회, 귀신의 처소(큰 성 바벨론)
이들은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람의 열심과 충성이 좋은 믿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부자청년의 관념에서 선한 일이란 율법을 잘 지키고 선을 베푸는 착한 삶으로 알고 있듯이, 오늘날 신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믿음’도 교회를 위한 자기 열심과 충성으로 여기며 동분서주 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목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이 원인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에게서 듣는 것은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가도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한 목소리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에서 나온 개신교의 신앙노선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사람의 행함에 방점을 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니 말은 같으나 내용은 완전히 삼천포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오직 믿음’을 외치지만 실제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예수가 거짓 예수인데 어떻게 ‘오직 믿음’이 가능할까요?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일, 십일조 준수에 각종 헌금, 그리고 착한 삶, 선한 삶을 힘쓰며 구원을 위한 보험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증거물은 마음의 안식입니다(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게 뭔 말인지 몰라. 우이독경일 뿐, 말씀 따로 신앙 따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행함’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행함의 짐을 예수께서 자신의 육체에 담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행함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마음의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믿음의 터에선 이러한 마음의 안식은 불가능합니다. 구원이 인간이 하기에 달려 있는 믿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직 믿음’을 외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이러한 마음의 쉼을 누리고 있을까요? ‘행함’의 굴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있을까요?
진정한 자유함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무너질 때에 가능합니다.
나는 결코 ㅎ님의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로구나. ㅎ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죽음 밖에 없구나. 이렇게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가 ㅎ님께 시선을 두며 ㅎ님의 의로 오신 IX의 십자가를 의지할 때에 비로소 안식과 평안이 덮쳐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상태를 일컬어 진리를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자기 것이 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란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가 믿게 되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지식을 의미 합니다. 나는 십자가 아니면 죽는군요. 십자가가 나의 생명이고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진리를 아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솟구칩니다. 나를 포기하고 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오는 행복과 만족은 받은 사람만 아는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래서 ㅎ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고 하는 겁니다.
<30-31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님에게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면 모세가 행한 만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시105:40절을 보면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했던 메시아는 바로 이러한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역시 고기를 달라하면 메추라기를 가져오시고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해주시는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예수 역시 이러한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입니다. 그 예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예수입니다. 먹을 것을 요구하면 하늘에서 메추라기와 만나와 같은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시는 예수입니다.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이렇게 착한 예수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자녀와 가족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교회 지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예수 이름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요즘 북한 핵 문제로 한반도에 전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 때, 함께 모여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을 막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임금 삼고 하늘에서 오늘 표적을 구하는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이들의 모든 기도가 땅의 것들, 썩어질 양식임)
<32-33절>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모세가 행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였습니다.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먹었던 만나는 앞으로 등장할 참 떡의 예표에 불과했다.) 율법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그림자였듯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역시 장차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그림자였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였지만 그들의 결국은 광야에서 멸망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 그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은 이 만나 표적을 통해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40년간 만나로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길로 나가지 못했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방 민족의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공짜로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애굽의 음식인 부추와 마늘과 파와 고기를 달라고 보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다 광야에서 다 멸망당해 죽었습니다.)) ...오늘날로 버전 엎을 해서 우리들의 모습으로 조명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처한 환경은 누가 조성한 겁니까? 내가 재수가 없어서 이런 지경인가요? 아니면 ㅎ님의 안배하신 것인가요? 참새 한 마리도 ㅎ님의 허락이 있어야 땅으로 떨어지는 걸 믿는다면 모든 일에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 앞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대로 입니다. 그들을 책임져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어린 양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예수를 그 선지자로 보았으면서도 그에게 여전히 썩을 양식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다면 결코 이러한 일로 예수를 찾고 예수를 임금 삼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실패에 대해 기록해 놓고 있는 구약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사람들 역시 여전히 썩어질 양식을 위해 예수를 임금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은 과연 어떤 자들인가요?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이 모여 성경을 이렇게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성경의 교훈을 받고 그것을 따라 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안 되는 자들임을 깨닫고 내 육신의 일을 내려놓기 위함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성경을 힘써 배우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ㅎ님이 주시는 믿음을 받은 자의 새로운 모습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매사에 죄를 이기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신령한 삶을 살아 내는 것일까요? 이도저도 아닙니다. 중요한 변화는 자신이 죄 밖에 나오지 않는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욕심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는 자가, 성령으로 구원 받은 자이고, IX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 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악 덩어리인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하신 ㅎ님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은혜에 그저 감격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아먹는 자,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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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