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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 받은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이>의 줄거리:
사도행전의 기록을 따르자면 하여간 성령만 강림하시면 반드시 따라오는 현상이 방언과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1,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도가 된 모두에게 방언과 예언이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겐 성령 강림이 없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일상 언어가 방언이나 예언과 그 본질이 같아진 것입니다.
성령 받은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이
(사도행전 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 받은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 받은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이’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전도보고를 한 뒤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에 들려 전도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데 사도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방문하여 이번에는 무려 3년을 체류하며 전도활동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에서의 3년은 바울의 전도활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대한 영향력도 컸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서 바울은 3년을 체류하는 동안 골로새, 히에라볼리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에베소, 버가모, 서머나,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게디게아, 두아디라 일곱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본문은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전도활동의 초반에 나타났던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 수님을 믿으면서도 요한의 세례 외에는 몰랐던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의 진수를 배우게 되었고, 이에 깨달음을 얻고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1절에 기록된 제자들이란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 외에는 모르던 시절에 가르쳤던 제자들입니다. 이들 또한 요한의 세례만 아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었기에 바울은 이 열두 사람을 만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연상시키기에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사건을 에베소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은 계속 말해오고 있는 요한의 물세례와 본문에서 새롭게 언급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성령강림과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성령강림의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강림이 기록된 모든 장면에서 방언과 예언이 꼭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그러했으며 고넬료 집안의 성령강림 때도 방언과 예언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다만 바울의 1차, 2차 전도활동을 통해서 많은 제자들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의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루디아는 헌신적인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방언과 예언을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편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심한 박해와 궁핍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고 훌륭하게 믿음을 지켜나가면서 하늘의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성령이 강림하셨기에 이러한 믿음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령강림 사건에 방언과 예언이 동반된 것에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성령강림의 사건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원초적인 믿음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강림 사건에서 방언과 예언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가 있으셨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방언과 예언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방언과 예언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사건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은 모두 언어를 통해 일어나는 본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적 언어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언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방언은 의미를 전혀 모른 채 나오는 언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도 내 입으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곧 그 언어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조차도 방언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활성화되는 중에 나타납니다. 언어는 곧 나의 의도를 담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내가 모르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나의 의도가 담길 수가 없습니다. 이점은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권을 행사하시면서 이루고 싶은 뜻과 연관된 말들이 사람을 통해 나타날 때 예언이 됩니다. 방언과 예언의 공통적 특징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인격을 거치고 입을 통과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성령강림의 증거로 제시되는 이유는 바로 성령의 임재하심 때문입니다. 즉,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씀이 입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방언과 예언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신 사람의 언어가 갖는 가장 본질적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면 방언과 예언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는 말 또한 동일한 본질적인 특징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동일한 언어적 유전자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제시하는 중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사람은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도 내 안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바깥에서 만들어진 말씀이 나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를 마주 대하고 있을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 나오게 되는 말과 생각 또한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말씀과 생각이 인격과 입을 통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방언과 예언이 흔한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이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방언과 예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궁핍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언어와 생각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극심한 궁핍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도움을 바라기는커녕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부터 외부에서 들어온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방언과 예언의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의 세례에 이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누구에게나 성령을 보내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말과 생각이 바뀌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바깥에서 만들어진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내 입을 통해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방언과 예언을 기록으로 남기시고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평생을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말씀을 받아서 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말을 하는 동안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혼돈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답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짐을 느끼지 못하는 공허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부딪치고 넘어지는 흑암 속에 있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과 생각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내 속에 머물고 있는 말이 생각이고, 내 바깥으로 나온 생각이 말입니다. 생각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기에 말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가운데 내 바깥에서 들어온 생각과 말씀으로 살아갈 때는 질서와 광명과 열매 맺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공허가 사라지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질서가 생겨납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누구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든 합당한 때에 합당한 내용의 말들이 나오게 됩니다. 생각과 언어가 바뀔 때 삶 전체는 변화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빠져있던 삶이 질서와 열매와 광명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과 예언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의 모든 언어가 공통적인 본질을 갖게 됩니다. 나의 안에서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바깥에서 만들어진 언어들이 들어오면서 나의 생각과 말이 됩니다. 그럴 때 삶 또한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상황과 대상들이 오감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오감을 통해 세상과 붙어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저 세상에서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게 됩니다. 마음에서 좋음과 싫음에 대한 느낌과 판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겨난 좋음과 싫음에 대한 판단의 느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 생각이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그 좋음과 싫음의 기준이 어디에서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건강보다는 돈을 더 좋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이 좋지만 일의 성취 자체를 더 좋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분야에까지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똑같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어떤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꿉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선택은 어떤 기준을 통해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오감을 통해 느끼는 세상에 대한 좋음과 싫음의 기준에는 악령이 작용합니다. 좋다고 여기는 마음은 곧 믿음입니다. 돈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은 돈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흔히 선물로 표현합니다. 믿음이 선물인 이유는 내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가장 좋다면 반대로 돈이 없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돈이 좋게 여겨지는 것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주는 자가 악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성령의 선물이듯이, 돈이 좋고 건강이 좋고 출세가 좋고 승진이 좋다면 그것이 세상가치에 대한 믿음이고 악령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언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악령이 준 좋음에 대한 믿음을 따라 나타나는 언어는 타락한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가치에 대해 좋음과 싫음에 대한 마음의 느낌을 따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면서 언어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로부터 요한의 물세례의 중요성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인격은 통째로 죽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물세례의 의미입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공자의 사서삼경이나 석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지식인의 글이나 석학들의 사상도 우리의 마음을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과 마주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한 좋음과 싫음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악령에 의해 마음이 지배되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물세례를 베풀던 요한의 위치에 대해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타락한 상태이기에 인격이 물에 빠져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인간이 처한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를 파악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혜택이 여기서 끝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님이 임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요한의 물세례가 내 안에서 생각과 말이 만들어지는 인격적 과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고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사태 파악을 의미한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그 죽음의 실질적 실현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물세례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께 빠져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의 과정이 바뀌게 됩니다. 악령이 세상의 가치를 좋은 것으로 믿게 하였다면, 성령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게 해주십니다. 돈이 좋다고 믿는 동안에는 실제로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은 항상 돈을 마주하는 상태입니다. 돈과 나의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이 역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게 될 때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과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고, 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는 마음 상태에서 언어가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세상가치들과 하나님이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돈은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돈에 대해 좋음을 느낄지라도 나타나는 말은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마주 대할 때에 스스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주체성을 제외하고 하나님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가질 때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나의 마음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에 방언과 예언이 동반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강림하셔서 하나님과 마주할 때는 더는 내 안에서 만들어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악령에 의해서 세상 것이 좋다고 믿어졌듯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이 믿어지게 되면 언어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가치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때는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같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과 예언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한 뒤에 기도가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본문에 담겨진 의미와 일치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대화해야 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면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고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나는 듣는 자가 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내용에 대해 생각과 말씀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방언과 예언이 언급된 이유는 예수님을 믿게 된 모든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언어가 방언과 예언처럼 바깥에서 만들어진 언어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방언과 예언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입니다. 내 바깥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하다 보면 필요에 따라 예언도 나오고 방언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일상적인 언어가 내 바깥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받아서 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데일리 벱티즘(Daily Baptism)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날마다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세례가 인격이 통째로 물에 빠져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예수 이름의 세례는 인격이 십자가의 예수님께 빠져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세례와 예수 이름의 세례가 날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질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가장 좋은 분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의 생각과 말이 되어 주십니다.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본질의 언어를 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하루종일 악령이 주는 세상 좋음의 믿음을 따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언어는 중단되고, 성령이 임하셔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언어를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이끌어 가는 언어 대신에 질서와 열매와 광명의 삶을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탄이 개입된 생각과 말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내 안에 오신 성령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언어들로 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럼으로써 진정한 질서와 열매와 광명의 삶을 맛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