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임금님보다 높아야 누리는 참 평안>의 줄거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참 평안은 임금님이나 아니면 세상 각 분야에 있는 일등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않으면 받아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주 쉽습니다.
임금님보다 높아야 누리는 참 평안
(요한복음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임금님보다 높아야 누리는 참 평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임금님보다 높아야 누리는 참 평안”
임금님의 통치능력에 의존된 평안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아닙니다. 임금님뿐만 아니라 이 세상 각 분야마다 1등의 자리보다 아래에 있는 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1등 자리 아래에서 누리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니며, 1등에게 의존되어서 주어지는 평안도 참 평안이 아니고, 1등을 향하는 길 위에서 찾는 평안도 참 평안이 아닙니다. 반드시 1등보다 위에 있어야 참 평안은 주어집니다. 각 분야에서 1등 하기도 힘들고 임금이 되기는 더욱 힘듭니다. 옛날에 임금은 나라에서 1등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 안에 있는 백성이 진짜 평안을 누리려면 임금님보다 위에 있어야만 합니다. 임금님 자리에 있어도 안 되고, 임금님의 통치력에 의존되어 있다면 진짜 평안은 누릴 수 없습니다. 임금님이 성군이라서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이 주는 가짜 평안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16~17절에서 언급하신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앞에서는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보혜사 성령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거하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평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이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모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에 관한 말씀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성령의 역사와 율법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나의 바깥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성령이 임하시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직접 역사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고 결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의한 일로 봅니다. 나만이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아님을 알 수 있고, 성령께서 지금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기능을 움직여 가심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2장 9~10절을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천국에서 보고 계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서 나와 관계된 것들 중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성령님이 개입하시면서 아버지가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결심하시는 것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연결시켜 주십니다.
이것을 점선과 실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시며 나와 관계된 것들에 대해 가지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점선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점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름이 존재를 가리키듯이 이 맥락에서 성령님을 가리키는 진리란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점선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에 작용하셔서 이 땅에서 실선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점선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실선으로 바뀌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과 행동의 점선은 우리의 말과 행동의 실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이 땅에서 나를 통해서 합치하고 일치하게 나타나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짜 어렵습니다. 내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말과 행동을 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이라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백분의 일, 만분의 일 확률로 이루더라도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여 말과 행동을 해나가기는 익숙할 뿐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원하는 대로 도달한 적도 없으며 도달하더라도 문제가 됩니다. 단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아버지의 것과 똑같아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이 아닌 한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느끼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우리가 멋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겠다고 할 때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멋대로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이미 겪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30절에서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란 공중에 권세 잡은 자 마귀를 가리키시는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빌라도나 헤롯이나 산헤드린공회의 권세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단체입니다만 의미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인 임금과 같은 단체였습니다. 이 세상의 1등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임금이라고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을 따라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속성입니다. 빌라도나 헤롯 혹은 산헤드린공회의 재판을 받을지라도 실제로는 그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갈 길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 그들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해 영사기의 비유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카메라가 아니라 영사기와 같습니다. 카메라는 렌즈 바깥에 있는 피사체를 필름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영사기는 안쪽에 있는 필름에 이미 영상이 있습니다. 영사기의 렌즈는 받아들이는 기능이 아니라 안에 있는 영상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기능을 합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영사기의 삶입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대해서 이 세상은 피사체가 아닙니다. 성령이 들어와 계시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들을 향하여 쏴야 할 생각의 내용, 감정의 내용, 의지의 내용들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미 내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모든 상황에 대해 존재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것을 받아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담아주십니다. 눈앞에 무엇이 보이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말썽을 부리든지, 배우자의 수입이 적든지, 직장에 문제가 생겼든지, 몸에 이상이 있든지 환경적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임금님으로 상징되는 권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돈을 잘 벌든 못 벌든 그 상태를 받아들여서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를 발동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 위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사하게 하시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바깥의 대상이 임금님이라도 상관이 없고 각 분야의 1등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권세자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의식과 마음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과 단절되고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의식과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끼고 아버지의 좋음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실제로 아버지의 좋음이 쌓여가고 아버지와의 친분이 두터워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의식과 마음이 죽은 상태입니다.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고, 세상 것들을 좋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성령님께서 의식과 마음의 자리에 오십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 가시며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 바대로 임금님조차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파하다가 산헤드린공회에 끌려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산헤드린공회는 임금님과도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전달해주고 계셨고 그것을 영사기처럼 바깥으로 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공회의 재판을 받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면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영사기 삼아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나, 예수님의 제자인 나”라는 현상입니다. 삼위일체가 나를 구성해 주십니다. 이 “나”라는 현상 전체를 한 마디로 특징지으면 “평안(peace)”입니다. 어디에도 균열이 없고 동요가 없으며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평안을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공회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범법자처럼 체포를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벌거벗겨지고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런 분이 주시는 평안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일반적으로 평안은 임금님처럼 권세 잡은 자가 보장해 준다든지, 이 세상 각 분야에서 1등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게 잘 보일 때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적어도 1등을 행해가는 길에서 무언가를 얻고, 눈곱만큼이라도 1등에게 가까워졌을 때 평안에 다가섰다고 느끼게 됩니다.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에도 1등은 있을 것입니다. 얼마를 벌었든지 1등과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좀 벌었다면 조금이라도 1등과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생은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1등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1등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평안은 절대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자리는 임금의 영향력이 제로인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임금을 젖혀버릴 수 있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1등을 젖혀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며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업이라는 분야에서 1등인 재벌들의 영향력을 마음에서 젖혀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벌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자리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목표로 삼고 바라보던 재벌들이 이제는 발밑에 있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때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렇다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에서 재벌을 젖혀버릴 수 있을까요? 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에서 임금을 젖혀버릴 수 있을까요? 재벌이나 임금을 발아래에 둘 수 있기 전까지는 평안은 없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의사 선생님들을 발아래에 둘 수 있어야 몸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마음에 평안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보다 높아져야 합니다. 이 세상 어떤 분야의 1등보다 높아져야 하는데 이 세상 안에서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설날에 윷놀이할 때 보면 백도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에 백도가 나오면 말을 윷판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백도가 연달아 두 번이 나오면 한 바퀴 돈 것으로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 안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한 임금님을 젖힐 수가 없고 재벌을 젖혀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향력을 젖혀버릴 수 없으면 진정한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산헤드린공회에 속수무책으로 범법자 취급을 당하시며 체포당하신 예수님은 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또한 백도입니다. 세상에서 올라가기는커녕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갑니다. 최고로 밑으로 내려가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각 분야의 1등들을 다 젖혀버리시고 가장 높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우리의 의식과 마음을 데리고 가십니다. 이때 평안이 주어집니다.
세상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평안의 상태에서는 임금님 앞에서도 자유롭습니다. 내가 놓인 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임금님도 모르고 나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이것을 고스란히 받아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 속에 집어넣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임금님 앞에서조차 임금님의 말을 받아들이고 임금님의 권세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을 은막으로 삼아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우리가 살아야 될 쉬운 삶의 모습입니다. 내 멋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면서 이 세상 안에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러한 삶보다 성령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은 백 배, 천 배 쉽습니다. 알지 못하고 안 해보았기에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라는 현상은 사위가 일체된 상태에서 한 몸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게 관여하시고 개입하시는 상태입니다.
나의 부분 부분을 뜯어본다고 생각해봅니다. “내가 누구냐?”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보면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의 본질적인 자아의식을 형성해주셨습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라는 부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가지십니다. 의식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고 마음은 아버지의 좋음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몸이 남아있는 이 세상의 삶은 성령님께서 취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아시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고 발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부분 부분을 분해해서 점령하심으로써 온전한 내가 형성될 때 “평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평안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젖혀버리는 자유 속에서 아버지의 주권을 따라 질서 있게 창조적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표현됩니다.
“나”라는 현상이 평안이 되는 상황은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만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내가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며 말하고 행동하며 이 세상 안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소원하며 얻으려 하는 삶보다 백 배, 천 배 쉽고 백 배, 천 배 행복합니다. 임금님 위에 있어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나를 분할점령 하시는 “나”라는 현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이 세상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표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