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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9)
☞ 순례장소:(춘천3)양양성당➟금광리공소 ➟ 광릉부관아 (원주 3) ➟용소막성당 ➟묘재➟배론
삼월의 봄기운이 감도는 속에서 두 번째 마지막 순례를 떠났다. 회장님의 시작기도와 사순시기에 내 안에 잘못 된 생각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축복을 주시며 이 순례가 시작에서 마침까지 성령 안에 임하시고 서로서로 사랑하고 은총을 주소서 하신다.
첫 번째 간 곳
● 양양성당
양양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신부님께서 ‛청주교구 사도성 야교보 순례단’ 소개하시면서 회장님께 야고보 순례단 소개 하라고 하셔서 멋지게 순례 단을 소개 하셨다. 춘천에는 60개 공소가 있어서 순례자들이 순례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고린토 ‛우리는 그리스도 사절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전하는 사절의 임무이며 사절은 자기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사람 의미 합니다고 하신다.
사순시기 하느님과 화회하며 쉬고 있는 교우 한 달 동안 은총 시기 동안에 하느님의 깊은 은총 받는 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 광재 신부의 순교 혼이 살아 숨 쉬는 영동 지방 믿음의 고향은 6·25 전쟁 때 순교한 이광재 신부의 순교 혼이 살아 숨 쉬는 영동 지방 믿음의 고향인 양양 성당은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함께한 성당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교 길에도 남을 위해 헌신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기념관은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고 있다.
양양 성당에는 6·25 전쟁 때 순교한 이광재(李光在, 1909~1950, 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과 기념비가 있다. “마지막 순교 길에도 목마른 수감자에게 물을 떠다 준 가톨릭 사제의 희생은 한줄기 빛처럼 위대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8일 천주교 박해로 원산 형무소에서 순교한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한중경 목사의 증언이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방 신앙의 모태 같은 믿음의 고향이다. 영동 지방은 백두대간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지형 탓에 타지방에 비해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되었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은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때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 재(속초)’ 등의 교우 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 설립된 성당이 양양 성당이다. 인근 홍천군에 5개, 인제군에 4개 성당이 있지만 양양군에는 아직까지도 양양 성당이 유일하다.
양양은 지금도 모든 면에서 외진 곳이다. 또한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함께한 성당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본군이 성당을 빼앗는 바람에 신부와 몇몇 성당 식구들은 성당에 붙어 있는 쪽방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이 들어와서 성당을 또 짓밟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 두고 미사를 드리다가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 부속 건물로 쫓겨났다. 소련군이 물러가서 성당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또 인민군이 들어와서 성당은 물론 부속 건물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공산 정부를 수립한 북한 공산당의 종교 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을 결심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38선과 가장 가까운 양양 성당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연길, 함흥, 원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목 자들이었다. 삼엄한 감시를 따돌리고 이들을 남으로 내려 보내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신부는 끝까지 남아 성당을 지키다 6·25 전쟁 발발 하루 전날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밤 움푹 패인 방공호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엉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아비규환의 집단 살육 현장에서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을 찾자 시체 더미 속에서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지요……. 내가 가지요…….”라는 신음 섞인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24시간 이상 숨이 붙어 있던 이 신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집단 처형 상황과 이 신부의 최후 순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한 한준명 목사와 권혁기 라파엘 씨가 생생한 증언으로 남겨 놓았다.
■ 순교자
◆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1909.6.9∼1950.10.8)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1909년 6월 9일 아버지 이 가브리엘, 어머니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강원도 이천군 냉골에서 태어나, 1923년 용산신학교에 입학 1936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풍수원 성당 보좌신부로 3년을 보낸 후 1939년 7월 25일 양양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몇 년간은 일제의 탄압시기였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38선이 그어지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는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도 빼앗겨 가정집에서 미사를 드렸고, 소련군이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을 추방하여 북쪽의 성당들이 비어 있어 이광재 신부의 사목 활동 범위는 평강, 원산까지 이르렀다. 이 신부는 함흥교구와 연길에 있던 수녀원의 폐쇄로 피난하는 수녀들과 덕원신학교의 신학생, 신부들과 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도록 도와주었다. 양양 성당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이므로 38선을 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주변에서 피신을 권하였지만 "내가 돌보아야 할 신자가 38선 이북에 하나도 없을 때 가겠다"며 거절하였다.
1950년 5월 초순경 평강 본당 백응만 신부가 피납되자 이 신부는 그곳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성모 몽소승천 축일 전에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북으로 떠난 후 평강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 특별 감방에 3개월간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진군으로 후퇴하던 공산당은 10월 8일 콩비지를 특별 저녁 식사로 제공한 후 밤 11시에 포로들을 한데 묶어서 산 중턱 방공호로 끌고 갔다. 방공호 속에는 촛불과 총을 든 공산당들이 있었고, 그들의 발밑에는 방금 숨진 포로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신부와 포로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업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바로 총탄이 쏟아졌다. 총을 맞은 사람들의 "살려 달라! 물을 달라!" 아우성 속에 "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광재 신부였다. 자신도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이광재 신부의 목소리였다고, 같이 업드렸으나 총을 맞지 않고 살아나온 한준명 목사와 평강고교 학생이었던 권혁기 군이 증언했다. 이광재 신부의 마지막을 본 목사는 "가톨릭 신부는 위대하다."고 증언했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방공호에서 시체를 찾은 미 해병대 월거 신부와 머디 신부가 이광재 신부와 김봉식 신부의 장례 미사를 드린 후 원산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했다. 이광재 신부는 41세의 짧은 생애 동안 시대의 어려움과 가난함과 자신의 열등한 외모와 사제로서 언변이 부족한 어려움을 안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위해 자기를 내놓은 착한 목자의 표상이었다.
두 번째 간 곳
●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 본당으로서 1921년에는 양양 본당과 함께 영동 지역 두 개의 본당 중 하나였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개설된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동 지역의 공소에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00년이었다.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박해 이후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베푼 것이다. 그 당시 금광리 공소와 속초시 상도문리의 싸리 재 공소(도문 공소)는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자 수도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김중철 필립보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모가 교우들과 함께 경주에서 금광리로 박해를 피해 왔다고 하며, 이영녀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씨가 소년 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신부(Bret, 白類斯, 1858~1908, 알로이시오)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두 신부(Tournier, 杜啓昌, 1879~1944, 빅토르 신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표 신부(Poyaud, 表光東, 1877~1960, 베다스토)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본당으로서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이었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 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과의 거리도 멀어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양양 본당 주임 신부에게 보좌 신부인 이철연(李喆淵, 1892~1980, 프란치스코)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최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발전 가능성이 적어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으로 이전하였으며, 금광리 공소는 주문진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1929년 주문진 본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금광리로 본당을 이전했고,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지자 1931년에 강릉 임당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1934년에 본당을 이전하였다.
세 번째 간 곳
● 광릉부 관아
동해안에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 하던 동헌과 객사 강릉 동헌은 영동 지방의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며 칠사당 동헌 마당에서는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강릉은 강원도의 요충지로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가 주재하였다. 이 지방은 복음을 늦게 전해 받아 오랜 박해는 겪지 않았으나, 교우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처형하던 동헌은 박해로 피 흘린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는 《치명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1820~1868) 한 명뿐이다.
《치명일기》(832번)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 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치명사적에는 49세로 기록)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인치명사적》(23권 118~119쪽)에 의하면, 심 스테파노는 이 안토니오와 함께 강릉에서 1867년 4월 경포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치명하였다. 또 같은 책(23권 160~161쪽)에서는, 1868년 5월 5일 강릉 굴아위 지방에서 이 안토니오와 같이 잡혀 포청으로 끌려가 치명하였다고 한다.이 사실은 같이 잡혀가다 나온 최 바오로(풍수원 거주)가 증언한 것이다. 이런 증언 기록으로 볼 때 심 스테파노는 치명 연도(정확히는 체포 연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강릉에서 치명한 것이 아니라 서울 포도청에서 치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부사가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던 곳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 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 건물의 하나이며, 객사문은 객사의 정문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정전(正殿)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 관리나 사신들이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臨瀛館) 이란 현판은 1366년 공민왕이 낙산사로 행차하는 도중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6년부터 시작한 국보 제51호 객사문을 비롯해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낭청방(郎廳旁), 서헌(西軒) 등 복원사업과 관아지(내아 동헌 등) 복원 등 사적지 공원 조성 사업이 완료되었다. 임영관지는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옛 강릉의 고려시대 이후 관아 성격의 건물지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네 번째 간 곳
● 용소막 성당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1904년에 설정된 교회다. 병인박해 이후 수원 지방에서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로 교우촌이 형성된 이곳에는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선종하신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소막 성당은 당시의 성당 건립 방식이었던 로마네스크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성당과 좀 다른 모습은 성당의 앞부분에 종탑이 나와 있다는 것이다. 아마 당시 성당 건축에서 새로운 시도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그 일부가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으로 내려와 거기서 얼마를 살다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오미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최씨와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3년부터 한두 집씩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 오기 시작하였으며, 1898년에는 이곳 신자들의 지도자인 최석완 바르나바와 그와 한 집안인 최 바오로도 용소막으로 이사하였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 해 오미에 살던 백씨네와 행주에 살던 선병로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었다.용소막 성당의 개척자인 최석완은 1848년에 제천 청풍에서 태어나 18세 때 병인박해를 겪고, 1893년 풍수원 본당의 르메르(Le Merre, 李類斯, 1858~1928, 루이) 신부로 부터 전교 회장에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다가 1898년 용소막에 정착 5, 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 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용소막 성당에는 1988년 11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영보수녀회(聖母領報修女會)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1915~1976,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성모영보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설치하였다. 성서학자인 선종완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경과 자료들이 풍성하게 전시되어 있다. 선종완 신부는 성경의 신·구교 공동 번역 주관자로 1955부터 1976년까지 신구약 성경을 번역해 냈다. 유물관에는 한글과 영어는 물론 라틴어 성경과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성경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을 순례할 때 수녀원에 들러 허락을 받고 유물관을 볼 것을 권한다.
▒ 선종완(宣鍾完) 신부 선종완(1915~1976, 라우렌시오) 신부는 성서학자이며, 성모영보수녀회 설립자다. 1915년 8월 8일 용소막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가톨릭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후배 양성과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구약 성경을 나누어 번역하였고, 1960년 3월 5일 3명의 수녀 지원자로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968년부터 8년간 신구약성경 공동 번역의 가톨릭 전문 위원으로 성경 번역 사업에 힘을 쏟아, 선종 전날 병상에서 원고 교정을 모두 마치는 정열을 보였다. 1976년 7월11일 간암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 중 선종,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내에 안장되었다.▒ 성모 영보 수녀회(聖母領報修女會) 1960년 3월 25일 가톨릭대학 교수이면서 성서학자인 선종완 신부에 의해 경기도 소래에 창립된 수녀회다. 선종완 신부의 성경 번역을 돕던 몇 명의 처녀들이 입회함으로써 시작되어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 수녀회이자 반봉쇄 수녀회로서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빈곤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것이 창립 정신이다.1967년 6월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산골짜기에 그 터전을 이전하여 흙벽돌을 찍어 새수도원을 건설하였고 1969년에는 피정의 집을 마련하였다. 수녀회의 입회 자격으로는 다른 수녀회와 달리 국민학교 졸업 이상으로 학력을 한정하고 있다.‘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실천’이라는 수도회 정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며 말씀의 증거자로 살아온 성모영보수녀회가 ‘창설 50주년’ 여정에 나섰다. 50주년을 맞는 2010년 3월 25일까지 고 선종완 신부의 창설 정신에 따라 말씀을 증거하는 수도회 본연의 삶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다섯 번째 간 곳
● 묘재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묘재에는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南鍾三, 자 曾五, 1817~1866, 요한) 성인의 유택이 있다. 성인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南尙敎, 1783~1866, 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성인이 순교한 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은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 1817년 탄교(坦敎)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뒤, 백부인 상교(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항을 주었다. 22세 때인 1838년(헌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 영해 도호부사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러시아는 1860년의 북경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조선과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러시아인들이 자주 조선에 월경을 하거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는 남종삼의 상소문과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회동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주교들과 대원군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이 바뀌어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과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천주교 접근으로 인해 반대파 대신들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아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는 1866년 정월(음)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박해가 내려지기 이전에 대원군으로부터 설을 쇠기 위해 양부가 있는 묘재로 내려갈 것을 권유받고, 낙향하였다가 그 후 조정의 박해 소식에 놀라 변장하고 피신하다가 1866년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반 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洪鳳周, 1814~1866,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한편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대신들은 그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유배 보낼 것을 주청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처 이씨(李召史)와 두 딸, 막내아들을 창녕현 한곳에 같이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후에 남상교는 1866년 4월 17일 공주옥에서 옥사하고, 남명희(南明熙, 1853~1867)는 1867년에 전주에서 교수형으로, 이조이(李召史)는 1875년 3월 2일 창녕현에서 교수형으로 치명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 순교자
◆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현감이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논의 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여섯번째 간 곳
● 배론성당
배론은 박해 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함께 간직한 순교자들의 요람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작성한 곳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고, 1855년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배론[舟論]이란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한 것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이며,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이곳의 옹기 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적은 이른바 《백서(帛書)》를 작성했던 곳이다. 이 백서를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1751~1808,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체포되어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1855년 초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집에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 사후에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매스트르 신부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장주기는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현 가톨릭대학교가 그들의 전신으로 지목한, 격식을 갖춘 최초의 신학교였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약 5개월 간 배티에 가매장했다가 11월 초 이곳 배론으로 그 시신이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의 여파로 장주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두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3월 11일(음 1월 25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장주기는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배론 교우촌은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 배론 신학교(舟論神學校)
1855년 충청북도 제천(提川) 배론[舟論]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를 이르는 말로 초대교장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가 취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되었다. 1855년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다.
현재의 가톨릭대학교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다. ‘성 요셉 신학당’은 1866년 병인박해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 황사영 백서의 발견 입수 경위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 천하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넣어 근 백 년 동안 숨겨오다가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따로 간직해 두었다가 그의 친구인 천주교인 이건영(요셉)에게 넘겨주고 이 씨는 민 주교께 바쳤던 것이었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민 주교는 1924년 이 백서의 실물 대사본 2백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때 교회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 순교자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 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명문가 태생으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 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 푸르티에 (Pourthi, Jean Antoine) 신부 (1830∼1866)
푸르티에(한국명 : 신 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하였다.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신부 (1828∼1866)
프티니콜라(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번 주 순례는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떠났으며, 십자가가 떠오르게 뒵니다. 난 십자가를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힘겨운 나의 삶이 힘들어서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도, 왜 십자가를 짊어져야하며,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의아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을 뻗으시어 내 앞에 놓인 모든 어려움을 없애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끝도 없이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지...... .
나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라고 생각 합니다.
쇠가 불속에서 단련을 받아야 단단해지듯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뜻을 알고, 신앙생활을 더욱 성숙하게 하라고,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셨습니까?
때로는 나의 십자가가 유달리 커 보이는데, 다른 이들의 십자가는 작아 보이기에 서운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는 하루하루 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공동체에서 이웃과 동료를 위해 내가 희생하더라도 나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순례를 통하여 나는 오늘 묵상을 해 봅니다.
2017년 3월 4일
춘천 원주 2차 순례를 마지막 마치면서
김홍숙 헤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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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차순례를 마지막 마치며 이 글을 씁니다.
회원님에게 아름다운 순례의 추억을 다시금 영상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