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5.05.01(일)
07:00인월-07:30벽송사-08:15오봉리-09:00임도끝-11주능(새재위 봉우리:1258m)-11:50독바위-12:20쑥밭재-중식-13:40출발-14:40휴식-15:30어름터-15:50광점동-16:20벽송사-16:50방곡리 추모공원
지난주쯤에 악양쪽으로 산행을 다녀올까 생각했는데 산불 예방 기간이 조기 해제되어 지리산의 동부 능선 쪽으로 선회하였다. 오전 7시가 되어 인월에서 친구들을 만나 차량 1대는 벽송사에 두고, 산청군 금서면 오봉마을로 향한다. 지리산은 한 달 전과 달리 어느새 푸른 옷으로 갈아입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일기예보대로 새벽에는 약간의 비가 메마른 대지 위를 촉촉이 적셨으나 지금은 그쳤다. 지리산 날씨는 지리 산신이 정하는 것. 기상대의 예측과 다른 때가 많다. 혹. 비가 내린다고 해도 무엇이 두려우랴. 지리산 품속이라 생각하면 어떤 조건이라도 감미롭다. 어느새 차량은 오도재 길과 문수사 입구를 지나 다리를 건너 방곡리를 향한다.
방곡리. 방곡리 하면 한국전쟁 때인 1951년 2월 8일 설날 아침 국군 11사단(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으로 마을 주민 705명이 몰살된 곳이다. 견벽청야 작전은 일본군이 만주와 중국에 있는 독립군들과 중국군들을 토벌하면서 써먹던 작전인데, 작전구역 내의 주민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즉결처분하고, 적의 근거지가 될 만한 곳을 초토화하는 것이다. 그 당시 한국군의 많은 지휘관이 일본군 출신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작전 자체는 그들에게 있어서 무리하지 않다고 하겠다. 지리산 마을 자락에서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조차 적의 개념으로 간주하는 군은 과연 누구의 군대였다는 말인가. 이 부대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또 하나의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는데(김원일-겨울 골짜기)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아마 지옥도 그것보다 나았으리라.
오른쪽으로는 새로 조성하고 건립한 추모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오후에 들러 참배하기로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방곡리는 지리산 자락의 오지마을로써 산꾼들조차 찾지 않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오봉마을까지 도로포장이 완전히 끝났다. 후대에 산청에서 실력자가 나타나서 억울하게 전몰한 주검들의 눈물과 한을 풀어 주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오봉마을 앞 갓길에 주차해 놓고 3명의 산꾼은 지리산과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된다. 일단은 산판도로를 따라 올라가기로 한다. 이곳 오봉마을에서 등산코스로는 세재와 독바위 그리고 상내봉 방향 등이다. 하지만 모두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으며 등산로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초보자는 피할 길이며 지리산을 잘 파악하는 산꾼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몇 채 안 되는 오봉마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버리고 좌측 정면에 있는 전원주택이 있는 길로 오르다 다시 좌측의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건너편의 오봉마을을 바라보니 의신의 삼정마을과 흡사하다. 일단 이 산판도로를 따라 오르다 계곡을 만나는 적당한 곳에서 치고 오르기로 한다. 입구에는 포에버님의 빨간 표지기. 늘 지리산 사랑이 영원한 지리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포에버님은 어떤 분일까. 지금도 지리산을 꾸준히 다니시는지 표지기의 색은 발하지 않았다.
숲속의 작은 계곡에서는 물이 흐르고 웃자란 조릿대 숲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 얼마 진행하지 못해 금세 몸이 젖는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거의 없는 이 길은 마을 사람들이 고로쇠 채취를 위하여 고무호스만 설치해 놓았을 뿐 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세재 위 새봉에 도착할 때까지 포에버님의 표지기 2개를 보았을 뿐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십여 분을 진행한 후에 휴식에 들어간다. 배낭을 열어 우유와 빵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산행이 시작된다. 정글을 헤쳐나가듯이 진행했던 초입 길은 점차 부드럽게 열린다. 낙엽 쌓인 길은 발자국이 희미하게 이어지다 곧바로 사라졌으며 잡목이 앞을 가로막아 양손으로 헤치며 뚫고 진행하는 것은 보통이다. 이윽고 흐릿한 길을 따라 계곡의 우측사면으로 붙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니 오봉마을과 좌측의 왕등재 쪽에 가스가 벗겨지며 구름 위를 뚫고 봉우리들이 솟아올라 마치 바닷가의 섬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쉽게도 우리는 세재 쪽으로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그냥 계곡을 따라 올라갔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세재로 올랐을 텐데 길을 쫓으며 가다 보니 능선을 타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좌측으로 왕등재와 외고개 세재 쪽이 보이지 않는가. 어느새 우리가 있는 위치는 왕등재가 내려다보이고, 웅석봉과 눈높이를 마주하는 그 위치에 도달한다. 아마도 이 능선은 상내봉 능선과 나란히 진행되며 세재에서 고도를 높혀가며 독바위를 가기 전 1,258m의 봉우리(새봉)를 만나며 그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 주능이 가까워져 옴에 따라 산님들의 외침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이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이기 때문에 조용히 진행한다.
예상대로 새봉이 가까운 주능선에 서니 오전 11시. 3시간 동안 오름길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아직 가스가 차 있어 조망이 확실하지는 않다. 좌측 아래로는 깊은 조갯골이 보여 세재 마을을 찾으려고 시야를 넓혔으나 실패. 그러나 우측 전방에 비둘기봉 능선이 보이므로 독바위는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독바위. 아래에서 쳐다 보면 마치 커다란 장독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개 속에 우뚝 선 독바위에 오르니 산꾼이 한 명 서 있다. 산행 시작 후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오늘 세재에서 천왕봉을 올라 중산리로 하산을 한단다. 천왕봉 쪽으로 방향을 묻기에 답을 해주나 독바위와 쑥밭재 근처에는 길이 헷갈리기 때문에 주의를 준다. 독바위에서의 조망은 그런대로 훌륭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은 전반적으로 흐리고 가스가 차올라 지난 산행기를 인용하여 본다.
12시가 조금 넘어 독바위에 도착하였다. 독바위는 천왕봉과 중봉에서 보면 저 아래로 까마득히 낮게 보이지만. 실제로 만만치 않은 1,000m가 훨씬 넘는 고봉이다. 바위에 걸쳐진 밧줄을 타고 암봉에 올라 보았다. 하봉 쪽은 오늘도 온통 구름바다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과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니, 지리산 중에 홀로 고립된 것 같은 생각에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든다. 두류 능선 쪽을 세심히 들여다본다. 두류 능선 8부쯤에 보이는 향운대의 위치를 읽을 수가 있다. 바로 아래는 어름터 계곡이 길게 이어진다. 국골 사거리가 있는 말봉쪽은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독바위에서 한참을 머문다. 남쪽을 바라보니 비둘기봉과 써리봉에서 뻗어내린 능선도 힘차게 보인다. 조갯골에서 흘러내려 가는 물소리가 시원스레 예까지 들린다. 독바위에서 쑥밭재 쪽을 바라보니 경치가 아름답고 산세가 특이하다. (중략)
독바위에서 쑥밭재까지는 내리막길로 지척이다. 하지만 방심하다가 조개골 쪽으로 내려설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쑥밭재는 윗세재 마을과 광점동 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로써 지금은 과거와 달리 등산객들에 의해 길이 열려 있다.
쑥밭재에서 배낭을 열었다. 각자의 배낭에서는 이것저것 먹을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오가 살짝 넘었으니 시간상으로 여유롭다. 우선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하여 입맛을 돋우고 식사를 마친 후 팔베개를 하고 풀밭에 눕는다. 쑥밭재에서 광점동까지 하산은 시간 반이면 충분하므로 여유가 있다.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래면서. 어느새 포근한 지리산 자락에 안겨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하산. 쑥밭재에서 광점동까지는 유순한 길로 2시간. 부드럽게 내려가는 숲길을 따라 3명의 산꾼은 아쉽게도 다시 속세로 환원된다. 어느덧 물소리가 가까워지고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아기자기한 계곡을 따라 내려가니 어름터. 어름터에서 광점동으로 내려가면서 날씨는 점차 맑아지고 있다. 벽송사에서 차량을 회수한다. 차창을 흔드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봉마을로 향한다. 방곡리 추모공원에 들렀다.
지금 살아있으면 오십 대 중반이었을 1950년 6월생. 1951년 2월 졸. 한 살짜리 아가는 엄마 품에 안겨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노약자, 임산부조차 가리지 않고 무참히 살육한 국군은 과연 어느 나라의 군대였다는 말인가. 이 군대의 후배들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30년이 지난 후에도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을 향하여 무차별 총칼질을 퍼부어 많은 사람을 학살해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을 잊는다. 수많은 묘비를 바라보니 마음이 숙연해지고 답답해진다.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노송은 반세기가 지난 세월이었지만 그때의 비극과 슬픔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