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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은숙이 석진을 만난 것은 대학 4학년 때 수유리 어디엔가 있는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가서였다. 친구들 여섯 명이서 함께 가자고 할 때,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으나, 그래도 한 번 가보는 것도 경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따라나섰다.
4호선 지하철로 가다가 버스로 한 번 갈아타고 내리자 00 보육원 앞이었다. 보육원에 도착하자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젊은이가 은숙이 일행을 맞이했다. 은숙은 그 젊은이를 보자 어찔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 본 남자들 중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저는 윤석진이라고 합니다.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석진은 원장실로 봉사대원 여섯 명을 인도했다.
원장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60대의 남자였다. 원장이 자리를 내주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커피를 내왔다. 석진은 마시라고 하면서, 이 보육원에 대한 이야기와 봉사 활동을 할 일들을 설명했다.
"이 보육원은 몇 개월 안 된 유아와, 18세까지 여기서 생활을 합니다. 이 보육원은 원아가 35명인데, 봉사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있다고는 하나 그분들이 다 하기에는 손이 부족합니다.”
석진은 부드러우면서도 똑똑한 말씨로 설명을 했다.
“그럼, 저희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은숙이 일행 중의 누군가가 묻자,
“예, 네 살 이하의 아이들 목욕을 시키는 일과, 점심 식사 돕는 일, 또 오후에는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초등학교 이상 되는 원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
“그것뿐입니까?”
“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기 와서 살기 때문에 정을 몹시 그리워합니다. 절대로 필요 없는 말은 물어서도 안 되고, ‘내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재미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특히 어린아이들 목욕시킬 때는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큰 원아는 누가 목욕시킵니까?”
“정해진 시간에 자가들 스스로 합니다.”
석진은 목욕시키는 팀과 놀아주는 팀, 그리고 가르치는 팀. 이렇게 세 팀으로 나누어 주었다. 은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팀으로 배정되었다.
석진이 은숙을 또 한 친구와 같이 교실로 인도했다. 20여 명 들어갈 작은 교실이었다. 초등학교 팀과 중학교 과정 둘로 나누어 공부하고 있었다.
은숙은 중학교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학생이 열 명이나 되었다. 은숙이 교실에 들어가자 아이들이 모두 은숙에게 집중을 했다. 아이들이 예쁜 언니가 왔다고 수군거렸다. 석진이 여기까지 와서 은숙을 보고 웃으며 목례를 하고 갔다. 은숙은 석진의 그 웃는 모습을 보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많은 남학생들을 만났지만 이렇게 두근거리기는 처음이었다.
점심을 끝내고 시간이 조금 남아 보육원 건물 한 바퀴를 돌아보고 있는데 석진이 건물 뒤에서 작업을 하다가 은숙을 보고
“할 만합니까?”
하고 물었다.
“네. 재미있는데요.”
“다행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오고 그다음부터는 안 와요”
“네. 그럼, 자주와도 돼요?”
“그럼요. 우리는 일손이 부족해서 한상 쩔쩔맵니다. 왜요? 자주 오시려구요?”
“시간이 있으면 와 보려구요.”
“그러면 좋죠”
은숙이 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자꾸 석진이의 얼굴이 떠올라 괴롭혔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 수업이 수요일 날 비어서 혼자서 갔다. 이번에는 수업 말고도 아이들 식사하는 것을 도왔다. 일을 다 끝내고 가려고 하자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불러야 될까요?”
“김 은숙입니다.”
“예. 좋은 이름이네요”
“고맙습니다. 석진 씨는 집이 어디세요?”
“저 여기가 집이에요”
“네?‘
“전 고아예요. 여기서 계속 자랐습니다. 원생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만 18살이 되면 밖으로 나가 제 스스로 살아야 하는데, 저는 원장님이 나가지 말고 이 보육원에서 일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러기를 7년이 흘렀네요, 제 스물다섯이에요”
“네. 대단하시네요”
“아녀요. 전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은숙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 회사에서 경리 일을 보았다. 하루는
“너 어디 다니니? 항상 바쁜 것 같더라”
은숙은 봉사활동 다닌다는 말을 하자
“좋은 일을 하는구나!. 그런데 회사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그러면요”
은숙이 봉사 활동을 다닌 지도 1년이 넘었다. 이제 석진과는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하루는 은숙이 석진에게 말했다
“석진 씨는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겠네요”
“아니요. 토요일 일요일 빼면 시간이 있어요.”
“그럼 우리 극장가요”
“극장요?”
“네 석진 씨와 한 번 영화 보러 가고 싶어요.”
“혹시 나 좋아하는 것 아니죠?”
“왜요 좋아하면 안 돼요?”
“나는 고아로 학교도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고, 가진 것도 없어요.”
“알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게 좋아하는 데 걸림돌이 되나요?‘
수요일 10시 표를 끊었다. 닥터지바고였다.
극장은 오전 중이라 거의 텅 비었다. 어둑어둑한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넘어질 뻔한 것을 식진이 팔을 잡아 주었다.
“너무 한적하네요.”
은숙이 말하자
“우리가 통째로 대관한 것 같네요.”
“영화관에 자주 오세요?”
“가끔 와요.”
“남자 친구 하고요?”
“난 남자 친구가 없어요. 친구들 아니면 엄마하고 와요”
“좋겠네요. 난 여자 친구도 없고 엄마는 물론 없어요.”
“이젠 내가 석진 씨의 여자 친구가 될 게요”
그러면서 은숙은 오른손으로 석진의 왼손을 잡았다. 석진은 은숙의 손을 살그머니 쥐었다. 은숙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긴 영화라 영화가 끝난 것이 2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점심 먹으러 가요”
“그럽시다”
영화관 앞에 한정식 집이 있었다.
“한정식도 괜찮죠?”
“저는 못 먹는 음식이 없어요.”
“그럼 됐어요.”
음식이 나오자. 은숙은 석진 앞으로 반찬을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
“몇 년 만에 이런 집에 와 보는지 모르겠네요.”
은숙은 석진의 환히 웃는 얼굴이 더 멋있어 보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 커피숍에 들어가 은숙은 작심하고 말을 꺼냈다.
“맨 처음 우리가 보육원에 온 날 기억하세요?”
“그럼요.”
“나는 그때 죽는 줄 알았어요?”
“왜요?”
“석진 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어서요.”
“그랬어요?”
“네,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난 앞으로 석진 씨와 결혼하자고 할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가당치나 한 이야기예요”
“뭐가요?”
“모든 것이…. 설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고 몇 년 후에는 후회하고 말 걸요. 나도 은숙 씨가 좋아요. 그런데 은숙 씨는 곱게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몰라요. 결혼은 비슷한 집안끼리 하는 거예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서로 사랑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부모님이 먼저 안 된다고 할 걸요”
“그럼 우리 도망가서 우리끼리 살면 돼요”
“은숙 씨, 그게 말이 됩니까?”
은숙이 생일날이었다. 은숙은 부모님에게 석진을 초대한다는 말을 했다.
“누구길래 그래”
“내가 봉사활동하러 다니는 보육원의 부원장이에요”
석진은 꽃바구니와 과일을 사들고 왔다.
은숙이 아버지가. 어서 오라고 하며 악수를 했다. 부엌에서는 은숙 어머니가 석진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은숙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다 말고
“인물이 훤칠하네요.”
“고맙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은숙이 아버지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석진이 간 다음에 은숙이 아버지가 물었다.
“너하고 어떤 사이냐?”
“아버지기 허락만 해주시면 결혼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 그 사람 인물도 좋고, 인품도 있어 보이더라. 그러나 고아하고는 안 된다. 네가 결혼해야 할 짝은 진구다”
“네 진구 오빠하고요?”
“벌써 그 집 부모와는 이야기가 됐다. 너도 ‘오빠’ 하면서 따르고 있지 않니? 진구도 네가 좋은 모양이더라. 그렇게 알고 너 이제 봉사활동하러 가지 마라. 상견례 날도 잡아 놓았다. 너는 지금까지 부모 말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이 번에도 내 말을 따르도록 해라”
은숙은 다음 날 석진을 찾았다.
“왜 울고 있어요?”
“혁진 씨, 나 좋아해요?”
“그럼”
“그러면 우리 도망가자”
“이게 무슨 소리야. 도망이라니?”
“나 내일 상견례 해. 그전부터 서로 왕래하면서 지내던 집이야. 아버지가 벌써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 놓았어.”
“축하해. 울지 말고 아버지 말씀을 따라. 도망가면서 산다는 뜻이 뭔지나 알아? 인생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돼”
“난 그 사람이 남자로 안 느껴져. 너무 자주 보고 지내서 그런지 그저 오빠로만 느껴져”
“살다 보면 자연 정이 들게 마련이야”
석진은 흐느껴 우는 은숙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석진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슴은 아파왔다.
상견례 하는 날 미리 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은숙이 양가 부모님들보다도 20여 분 늦게 도착했다. 모든 것에 정확한 은숙이 아버님이 심기가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은숙이 어머니가 말했다.
“차가 막히는 모양이네요”
“미안합니다. 사돈"
"아닙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여섯 시라고는 하지만. 이직도 환합니다.
바로 그때 은숙이 급한 걸음으로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요.”
“그래도 주인공들이 미리 와 있어야지”
“너 무슨 일이 있었니?”
은숙이 어머니가 말했다.
“아니요”
“꼭 울고 온 사람 같구나.”
“달려오느라고 그런가 봐요. 죄송합니다.”
은숙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사실은 은숙은 여기에 오기 전에 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석진은 은숙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걸고 또 걸어 봐도 받지 않자, 원장실로 걸어 석진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석진이 어제 어디 간다고 떠났는데.”
“어디로요?”
“몰라. 부산 어디 친구 집에 간다나.”
오늘이 은숙이 상견례 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이렇게 늦어졌다. 아마 석진이 전화를 받았으면 상견례 장소에 나오지 않고, 석진과 도망가지고 했을지 모른다. 그럴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진수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오늘 상견례로 모였지만, 두 집안이 모르는 것도 아니니 번거롭게 또 모이지 말고 오늘 상견례가 약혼식 하는 날로 하는 것이 어때요?”
진구 아버지가 말하자
“약혼식은 결혼식 다음으로 중요한 한 것인데 아무리 잘 아는 집안이라도 예물이라도 주고받아야 얘들이 서운하지 않을까요?”
진구 어머니가 말하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은숙이 어머니가 말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너희들이 결혼 당사자니까”
“저는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은숙이 말하자
“은숙이는 벌써 진구에게 잡혔구나. 그럼 진구 너는?”
“저희들에게는 뜻깊은 날인데, 약혼식은 하면 좋겠어요.”
“그럽시다. 그럼 오늘은 만나 식사만 하는 것으로 하고, 애들이 좋다고 하니 약혼식을 따로 가집시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 모두 자리를 뜨고 진구와 은숙이만 남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진구가 묻자
“아뇨”
“늦게 오길래.”
진구와 은숙이네 집은 아버지가 꽤 큰 중소기업을 하는 집으로 서로 잘 아는 시이었다. 진구와 은숙이는 말을 놓을 정도로 전부터 가까이 지내는 사이었다. 은숙은 석진이 생각에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 뒤로도 전화를 받지 않아 서너 번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울고만 돌아왔다.
약혼식은 일주일 후로 잡았다. 이모와 형제들도 모두 초청을 했다. 십여 명이 모였다. 은숙이 남자 동생이 사회를 보았다. 두 사람 나오라 해서 서로 맞절을 시켰다. 다음에 예물로 반지를 교환해서 끼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 축하의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은숙이 아버지가 일어나 말했다.
“반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끼었다는 것은 장차 결혼하겠다는 의미인데, 이 약혼식이 결혼식처럼 생각하고. 각별히 행동거지를 잘하여 결혼 전 예비부부로서의 예를 잘 갖춰라”
진구 아버지도 말했다.
“진구 너도 ‘은숙아’ 하고 동생 부르듯이 하지 말고, 또 은숙이 어머님 아버님 하지 말고, 장인 장모님이라고 말해라”
“알겠습니다.”
결혼식은 한 달 후로 잡았다.
이때 은숙이 말했다.
“그런데 결혼식은 좀 늦추는 것이 어때요?”
“그건 왜? 우리들은 너희들 서로 모르는 것도 아니고 빨리 맺어줬으면 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아니요. 지금까지 오빠 오빠하고 친오빠로 여기다가 부부가 된다는 것이 이상해서요. 그리고. 준비할 것도 있고 해서요”
“은숙이가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된 모양이네”
“그렇지 결혼이라는 것은 남남끼리 함께 사는 건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지. 그런데 오래 끌면 좋지 않다.”
진구 아버지가 말했다.
결혼식은 호텔에서 했다. 은숙이 신부석에 앉아 있는데, 이 결혼식이 석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수가 와서
“야, 예쁘다. 그런데 얼굴을 펴고 웃어라. 꼭 무슨 근심이 있는 사람 같구나!”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들을 찍고 신혼여행을 하려고 식장 밖으로 나오는데 어떤 어린 여학생이 꽃다발을 주면서
“어떤 남자가 갖다 주라는 데요”
은숙은 누가 보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받고 보니 거기에 “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씨 쓰인 작은 쪽지가 끼워 있었었다. 석진이의 글씨였다. 은숙은 드레스를 입은 채
“석진 씨”
모두들 보는 앞에서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 두리번거리며 찾아봤지만 석진은 없었다.
은숙이 엄마가
“쟤 미쳤나. 박서방 쟤 얼른 붙잡아 차에 태워”
“은숙아, 왜 그래, 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날이야”
진수가 은숙을 붙들어 앉고 차에 태우고
“인천 공항으로 갑시다.”
차가 떠나가자 건물 구석에서 숨어 바라보고 있던 석진이 눈물을 흘리면서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202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