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기사]
石像을 구한 마을… 마을을 구한 石像… 제사는 축제였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8]
해평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다 ‘장렬공 김훤술’
해평김씨 시조 김훤술을 배향하고 그의 석상을 모신 시중사 전경. 사당인 시중사와 재실인 숭모재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석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재실인 숭모재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8] 해평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다 ‘장렬공 김훤술’
시중사 입구에는 하마비를 재현해 놓았다. 원래 오상리 영남대로변에 있었던 김훤술의 석상 앞에는 하마비가 있었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8] 해평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다 ‘장렬공 김훤술’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낙동강 가에는 김훤술(金萱述)을 모신 시중사(侍中祠)라는 사당이 있다. 영응사(靈應祠) 혹은 해평 성황당(城隍堂), 성황사(城隍祠)라고도 한다. 김훤술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시호는 장렬(壯烈)이고 해평김씨의 시조이다. 그는 해평의 수호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해평 큰마와 해평들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의 오상리에는 가망못이 있는데, 못둑에 김훤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세워둔 석상이 있었다. 이 석상은 훗날 지금의 해평면 해평리 뒷개 들머리 쪽으로 옮겨졌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석상을 모신 것이다. 1618년 최현이 편찬한 선산의 옛 읍지인 ‘일선지(一善誌)’에 ‘해평 성황사는 일명 시중사이다. 장렬공 김훤술이 공덕이 있다고 하여 현인(縣人)이 석상을 만들어 제사 지냈다. 뒤에 음사(淫祀)가 되어 폐하고, 제사 지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김훤술의 석상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구미 옛길따라 이야기따라 영남대로 .8] 해평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다 ‘장렬공 김훤술’
김훤술을 배향하는 사당 시중사.
#1. 영남대로 변에 있었던 김훤술의 석상과 하마비
김훤술의 석상이 원래 있던 오상리는 영남대로변이었다. 그래서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이들의 왕래가 잦았다. 자연히 이 석상은 많은 전설과 기복적인 신앙의 대상이 됐다.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가기 마련이었다.
특히 석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어서 아무리 벼슬이 높더라도 말이나 가마를 타고 지나갈 수 없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하마비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지나가야 했다.
어느 날 임금의 명을 받아 부산으로 급히 내려가던 병마절도사 급의 고위 관리가 이 석상 앞을 지나게 됐다. 마부가 문득 석상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왜 갑자기 말을 세우느냐? 급하다. 서둘러라”라고 관리는 말했다.
“나으리, 이 석상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서 지나가셔야 합니다.” 하인은 석상 앞의 하마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그렇게 하시지요. 후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빨리 가자.”
관리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말은 발이 붙어버렸는지 꼼짝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관리가 채찍으로 더욱 세게 때려도 꿈쩍도 않았다. 모두 석상의 영험 때문이라 수군댔다. 관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참으로 요망한 일이로다. 내 저 석상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관리는 말에서 내려 석상의 머리를 칼로 베어버리고는 때마침 그를 배웅하러 나온 해평의 관리에게 말했다.
“이 석상을 저 강(낙동강)에 갖다버리게.”
관리는 떠나갔다. 해평의 관리 지시로 사람들이 목이 떨어진 석상을 옮기려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강가 숲 근처에 던져놓고 가버렸다. 석상이 버려진 숲에는 무서워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로 마을에서는 계속해서 흉흉한 일이 발생했다. 괴질이 돌고 무단히 젊은이들이 죽어나갔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우환을 당할 뿐이었다.
어느 날 마을의 한 노인이 꿈을 꾸었다. 꿈에 훤칠한 대장부가 나타나 말했다.
“나는 김훤술이다. 지금 강가 가시덤불에 누워 있다. 구출해다오. 그러면 동네의 우환을 없애주겠다.”
그 노인이 꿈에서 일러준 곳에 가보니 정말로 꿈에서 본 모습의 석상이 덤불 속에 누워 있었다. 노인은 마을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전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섰다. 석상이 누워 있는 자리에 성황당을 짓고 석상을 모셨다. 동네 수호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주산의 신을 위한 제사와 함께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마을의 축제처럼 치러졌다. 특히 이 석상은 아이를 못 낳는 이들에게 큰 영험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에서 으레 제관을 맡아 정성을 다하기 일쑤였다.
“제관은 몸을 정하게 하고, 금기를 잘 지켜야 하네.”
마을에서는 특히 제관의 정결을 강조했다. 올해 제관이 된 이는 그 말을 명심했다. 매년 해오듯 낙동강에서 정갈하게 몸을 씻었다. 몸을 씻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의 남자를 만나자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옳지. 아들을 낳을 조짐이로다.”
목욕 후 처음 만나는 이가 남자면 아들을 낳고, 여자면 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제사상을 차렸다.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분담해서 모은 것이라 제상이 푸짐했다. 누가 준비한 것인지 석상에 옷을 입혀놓았다. 석상에 옷을 해 입히면 재수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옷은 제사를 지낸 후에도 계속 입혀져 있기 일쑤였다. 제사에 참석한 이들을 보니, 성황당 제사를 마치고 아무개를 만나서 아들을 낳은 이들도 보이고, 딸을 낳은 이들도 보였다.
#2. 최근까지 민간 신앙으로 존속
성황사는 고려 초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종교적인 장소로 존속해왔다. 중앙정부의 주도로 세우기도 했고, 지방의 토호가 자의적으로 세우기도 했다. 주로 지방토호가 자신들의 시조를 모시기 위해 건립했다.
구미시 해평 성황사는 해평김씨의 시조인 김훤술을 모시면서 토호세력이 주도하고, 민간인이 참여한 사례에 속한다. 대부분의 성황사에는 토지신·성황신·여역신 3신을 모셨는데, 이는 군현 단위에서 행해지던 사직신·성황신·여역신에 대한 제사가 마을 단위로 축소되면서 합쳐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해평 성황사가 세워진 것은 고려 중엽이며, 그것이 시중사로 불리게 된 것은 여말선초 때이다. 그리고 그것이 음사(淫祠)로 규정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석상은 어떻게 조성됐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사당 형식의 기와집에 안치되어 있는 석상의 높이는 110㎝로 무릎을 모으고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부분이 몸체와 떨어져 있던 것을 회를 발라 붙여 놓았다. 해평 지역에는 석상 발견에 관한 또 다른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태종 때 김훤술의 후손인 김극유가 이곳을 지나다가 말굽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그 밑을 파보니 이 석상이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석상에 대한 전설은 이 지역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변하면서 전해온다.
석상과 성황당에 대한 민간 신앙은 1970년대까지 제사를 지내면서 존속했다. 현재 김훤술 석상은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마을 뒷산 모퉁이 시중사(侍中祠)에 모셔져 있으며 군위군 군위읍 정리 일대에 세거하던 종파(宗派)들에 의해 1973년 8월26일 고유식과 더불어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중사우로 환원된 것이다. 중수한 사당 건물 옆에는 재실인 숭모재가 있다. 1년에 한 차례씩 본손들이 참례를 비롯한 제향행사를 갖는다.
‘일선지’에서는 김훤술 석상에 올리는 제사를 음사라 하여 국가에서는 제도적으로 폐하였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상에 대한 영험성은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석상에 제사를 정성껏 모시면 효험이 크다는 등의 영험이 여전히 주민들 간에 전해지고 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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