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원적 세상에 살고 있는가, 혹은 이분적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흑백논리를 전근대적 사고로 치부하는 이 시대에서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그래서 맞이하는 양극단이 엄연히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은 현상에서 드러난 실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실재를 이원론적인 관점이 아닌, 이분법적 관점에서 리얼리즘을 묘사한다. 이원론과 이분법은 근원적 대립구도와 현상적 대칭구도를 조망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무엇이 있는가? 그 있음이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이라면, 우리는 그 있음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영화가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지만, 곰곰이 자문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세상에 대한 현상학적 영상이다.
이 영화는 감독 빔 벤더스의 1987년 작품 베를린 천사의 시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또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우선 간략히 살펴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천사 다미엘이 영생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구조이다. 이원론적 세계 즉 신계과 인간계라는 대립구도를 묘사한다. 신체 없는 천사는 완전한 존재인 신을 표상한다. 몸을 정신으로부터 분리하여, 감각을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한 세계에서 옹립한 신을 표상한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특히 태양은 거대한 불덩어리라고 주장한 아낙사고로스와 신이 인간에 무관심하니 자신도 신을 무시한다고 선언한 에피쿠로스 등의 환원적 시도가 있었지만, 유일신이 삼켜버린 암흑세계의 도래를 막지 못했다. 신이 외재하느냐 내재하느냐, 라는 이원론적인 질문에 사로잡힌 인간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태생적 의심을 천 년 넘도록 감히 할 수 없었다. 다행이랄까, 긴 터널의 끝에 휴머니즘이 우담바라처럼 피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서 신계에 의해서 소외된 인간계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변함없이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댈 뿐 나아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현실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힘듦을 외면하고 내세를 꿈꿔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은 죽은 신을 부활시켜야만 살아갈 수 있다.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 처음 맞이하는 감각은 아픔이었지만, 그에겐 고통이 아닌 감각함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 희열이었다. 다미엘의 재림은 예수처럼 인간의 몸으로 구현되고, 불멸을 포기하고 얻은 감각을 통해서 삶을 느끼며, 인식을 초월하는 공감으로, 아들을 죽임으로 보여주는 신의 사랑이 아닌 가련한 여인에 대한 보통의 사랑으로, 그리고 부활 없는 죽음의 필연성을 긍정한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니체의 선언을 현상적으로 풀어낸다. 신이 스스로 신체화를 선택하고 보통 사람이 되어 죽음과 분리되지 않은 삶을 긍정하면서, 신과 인간이라는 전근대적인 대립구도를 해체하고 인간 세계를 환원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1987)와 퍼펙트 데이즈(2024), 두 영화는 각각의 쿠키 영상을 통해서 37년의 시간이 연결된다. 히라야마와 조카 니코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연결된 세계에는 인간 다미엘의 삶이 있다. 연결은 마침표로 종결되지 않는다. ‘To be continued’와 ‘코모레비’는 빔 벤더스가 보여주고 싶은 삶 그 자체이다. 두 영화 모두 죽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전작의 죽음이 이원론적 대립구도를 해체하는 소구였다면, 퍼펙트 데이즈에서 상기하는 죽음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그림자와 같다. 히라야마가 단골 술집 여사장의 전남편과 그림자밟기 놀이를 할 때, 그 그림자와 같다. 빛이 있는 곳에서 드러나는 그림자, 본체의 움직임에 종속된 신체 없는 투영, 그 자체로는 변화할 수 없는 그래서 진리에 가까운 것. 죽음은 삶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삶에 종속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삶 속에서 긍정하면서, 무심코 그림자 바라보듯 대할 수가 있다. 타자의 죽음은 자기 삶을 환기시킬 뿐, 그 자체로 공포가 될 수 없다. 자기 그림자를 따라 행동할 수가 없듯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삶의 의지로 치환되지 않는다. 천사 다미엘은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살아가는 히라야마는 암이 온몸에 전이되어 죽음을 앞둔 자에게 무심코 술을 권한다. 그래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의 죽음 소구에 대한 전근대성을 근대적 관점에서 환원한다.
퍼펙트 데이즈 쿠키 영상은 코모레비에 대한 설명이다. 코모레비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아지랑이이며, 그 순간 단 한 번 존재한다. 코모레비는 이 영화의 주제로 볼 수 있다. 출근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느릿하게 예술적으로 움직이는 노숙자의 대칭구도에서, 문명에 잠식된 삶에서 찾기 힘든 코모레비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코모레비는 문명의 비틀림이고 비켜남이다. 그리고 코모레비는 우리 삶에서 완벽한 하루를 이루게 하는 요소이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통해서 코모레비를 보여준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분법적인 대칭구도이다. 히라야마의 일과와 일상은 규칙과 반복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문명 도시에서 살아가는 틀을 전형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틀이 타자에 의해서 균열이 갈 때, 무심한 듯한 히라야마는 비로소 감정을 표현한다. 인간은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스포츠 선수에게서 루틴과 유사하다.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동작은 불안감을 잠재우고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한다. 빔 벤더스가 관객에게 이러한 일상을 지향하기를 요구하는가? 그렇지 않다. 공원에서 외로이 홀로 점심을 먹는 직장인의 모습에서 엿보이는 불안감과 헌책방 주인이 뜬금없이 내뱉는 ‘공포와 불안은 다르다’라는 말에서, 감독은 관객들에게 멈춤 신호를 준다. 공포와 불안은 여러 양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은 외재 사태에 대한 주체적 내재화라는 관점에서 그 양태는 다양하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다르다’라는 언표에 있다. 빔 벤더스는 어쩌면 공포와 불안, 이 둘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 영화에서 간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그 태생이 신으로부터가 아닌 자연의 연속성에 있다. 그래서 절규로 알려진 뭉크의 ‘자연의 절규’는 곧 인간의 태생적 공포를 환기한다. 인간의 태생이 자연의 연속성에서 비롯되었다면, 태생적 공포는 자연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포의 근원은 자연과의 분리에 있다. 연속성에서의 끊어져 내쳐짐이 근원적 공포이다. 자연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전에 인류는 멸절할 것이다. 지금 인류는 멸절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연과 연결되어 생존한다. 그렇다면 자연과 분리라는 근원적 공포가 있을 수가 있는가? 뭉크는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을 인간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고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근원적 공포는 내재되어 있다. 빔 벤더스는 자연파괴에 대한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는 현대인이 자연을 소외시키면서, 자연을 대상화하였고, 자연의 착취를 기반으로 형성된 도시에서 분주하게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현대인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근원적 공포가 주체에 내재화된다. 문명적 관점에서 히라야마의 직업은 사회적으로 노숙자와 직장인의 사이에 위치한다. 물론 그를 우열적으로 보는 인간들이 있지만, 그는 타자를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즉 부러워하지도 멸시하지도 않는다. 빔 벤더스는 히라야마의 관점에서 이분법적 세계를 보여주며, 두 세계는 대립하지 않고 그저 대칭적이다. 여기서 두 세계는 곧 주체가 타자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대칭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뉜다. 이를 권력적 주체와 조화적 주체로 볼 수도 있다. 대립적 세계관이 내재된 권력적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우열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도시에서 살아가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런 현대인들이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즉 문명의 틀에서 살아가는 일상은 안정감을 준다. 달리 보자면 그 일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 불안이고, 그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문명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절실하게 살아간다. 이때 불안의 근원은 문명사회, 즉 도시와의 분리로 볼 수 있다. 공포의 근원이 자연과의 분리라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는 다르다. 주체적으로 내재화되는 자연과 도시는 양태가 아니라, 속성이다. 각각의 주요한 속성은 조화와 우열이다.
히라야마에게도 일상은 안정감을 준다. 또한 일상의 비틀림에서 나름대로 격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감정이 불안의 양태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가 행여나 자판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히라야마가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했다.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아마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음악을 들으며 출근했을 것이다. 몇 가지 에피소드로 히라야마가 겪는 비틀림, 그리고 그의 감정은 마지막 출근길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그의 표정에 모두 담겨있다. 희노애락으로 표출되는 일상의 비틀림 혹은 비껴남은 히라야마 삶의 긍정 속에서 선별되는 것이 아니라, 흡수되고 소화된다. 히라야마 삶의 동력은 불안이 아니다. 그는 공원에서 코모레비를 사진으로 담는다.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 순간은 변화의 순간이며, 그 변화의 근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스피노자의 신-자연, 노자의 도이다. 변화가 끊임없이 지향하는 바는 조화이고, 조화는 자연의 속성이다. 이것이 히라야마에게는 삶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으로 일상의 비틀림과 비껴남조차 긍정한다. 히라야마의 얼굴에서 죽음의 공포도 삶의 불안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