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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John_donne
* 던은 존 밀턴(John Milton)이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신과 세상과 그 자신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던의 종교시들은 진지함과 깊이에 있어서 다른 어떤 영국시인들과도 다른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많은 영국시 가운데 자신의 영적인 건강에 대해 던과 같이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시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소 놀라게 된다. 던의 모든 종교시가 1615년에 그가 성공회 신부로 서품된 후 씌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종교시 가운데 가장 길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1613년 성 금요일, 서쪽으로 말을 달리며」(“Goodfriday, 1613. Riding Westward”)는 『거룩한 소네트』와 달리 시를 쓴 정확한 날짜와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던은 1613년 이른 봄에 워윅셔(Warwickshire)의 폴스워쓰(Polesworth)에서 친구인 헨리 구디어 경(Sir Henry Goodyer)과 함께 지내다가 그곳으로부터 서쪽으로 70마일가량 떨어진 몽고메리(Montgomery)로 또 다른 친구인 에드워드 허버트 경(Sir Edward Herbert)을 방문하러 간다. 그가 4월 7일 몽고메리에서 쓴 편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전에 그곳에 도착한 것 같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과 부제를 고려하여 판단해 볼 때, 던은 이 시를 몽고메리에 도착하기 전인 4월 3일 성 금요일에 써서 구디어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제목에 이례적으로 연도를 넣은 것은 로스톤이 말한 바와 같이 시의 주제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이 기념일에 기독교인으로서 시인 자신이 한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Roston 205).
시는 천체의 움직임에 관한 당시의 생각을 반영하는 점성학에 대해 언급하며, 8행까지 계속되는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영혼이 천계가 되게 하라, 그러면 그 안에서
신앙심이 천계를 움직이는 천사가 되리니.
그리고 다른 천체들처럼 성장함으로써
다른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그들 자신의 운행을 상실하고,
또한 다른 천체들로 인하여 매일 허둥거리게 되니,
일 년이 지나도록 그들 본래의 형태를 따르지 못한다.
그처럼 쾌락이나 사업을 우리 영혼이 자신의 원동력으로
인정하여 그 때문에 방황한다.
Let man's soul be a sphere, and then, in this,
The intelligence that moves, devotion is,
And as the other spheres, by being grown
Subject to foreign motions, lose their own,
And being by others hurried every day,
Scarce in a year their natural form obey:
Pleasure or business, so, our souls admit
For their first mover, and are whirled by it. (1-8)
던은 시작부터 자신의 영혼을 천계로 만드는 기발한 생각을 도입하고 있다. 각각의 천계는 그것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천사가 있듯이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고 조절하는 천사는 신앙심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체가 다른 천체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원래의 궤도대로 운행하지 못하고 이탈하듯이, 그의 영혼도 “쾌락이나 사업”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요인들로 인해 원래의 목표점인 동쪽으로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자는 우주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천문학적 체계로부터 점차 시인을 서쪽으로 가게 만드는 마음속 갈등의 요인을 읽게 된다. 이를 두고 로스톤은 물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가 갑자기 종교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역설에 의해 약화되면서, 서쪽으로 상징되는 단조롭고 기계적인 세계는 풍요롭고 상상력으로 가득 찬 영적인 세계인 동쪽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합리적인 과학적 진리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다가 전혀 다른 세계인 시인 자신의 정신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던 특유의 논법이 여기서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Roston 205-6).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화자는 불행하게도 너무 자신의 세속적인 일과 즐거움에 빠져서 마땅히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세속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날, 내 영혼의 형태는 동쪽으로 향해 있는 때에
난 서쪽을 향해 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태양이 떠오름으로써 지고,
해가 짐으로써 끝없는 낮이 생기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죄가 영원히 온 세상을 밤이 되게 하였으리라.
허나 내게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그 광경을
보지 않는 것이 난 오히려 기쁘다.
생명 그 자체인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죽어야만 하는데
하나님이 죽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죽음이었을까?
그건 그분의 부관인 자연을 움츠러지게 했고,
그분의 발등상이 갈라지게 하고, 태양이 눈을 깜빡이게 했다.
Hence is't, that I am carried towards the west
This day, when my soul's form bends toward the east.
There I should see a sun, by rising set,
And by that setting endless day beget;
But that Christ on this Cross, did rise and fall,
Sin had eternally benighted all.
Yet dare I' almost be glad, I do not see
That spectacle of too much weight for me.
Who sees God's face, that is self life, must die;
What a death were it then to see God die?
It made his own lieutenant Nature shrink,
It made his footstool crack, and the sun wink. (9-20)
여기서 “이날”은 물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을 뜻한다. 시인이 살았던 17세기 영국인들에게는 부활절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이날 신부 서품식을 2년 정도 앞둔 당시 41세였던 던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동쪽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쪽으로 말을 달려가고 있었다. 즉 이날 마땅히 해야 할 신앙 행위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즐거움을 찾아 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이다.
11행에서 시인은 “태양”(sun)을 하나님의 아들(son) 예수에 대한 펀으로 사용함으로써 “떠오름으로써 지고”(by rising set)라는 재치 있는 모순어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 던은 태양이 지는 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의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한 것이다(Nutt 145).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의 자리에 있는 것 같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 명상을 통해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예수회(Jesuit)의 창설자인 로욜라(Ignatius Loyola)로부터 비롯된 전형적인 명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바로 이 명상 행위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Roston 207). 던은 자신의 삶과 죄와 그리스도의 고난에 자신의 생각을 집중하는 로욜라의 명상법인 영적인 훈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인류에게 “끝없는 낮”인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고,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죄가 영원히 온 세상을 밤”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어 그 장면을 외면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특유의 기발한 생각을 동원하여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므로 그 현장을 목격한 자연은 움츠러들고, 그리스도의 발등상인 땅도 갈라지고, 태양도 일식으로 컴컴하게 되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다음 구절에서는 우주적 규모의 사건과 그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미미함이 대비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내가 양극을 한 뼘으로 재는 두 손을 볼 수 있을까,
구멍들로 뚫린 채 모든 천체를 한꺼번에 돌리는 손들을?
내가 우리에게도 우리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천정인
저 무한한 높이를 볼 수 있을까,
겸손히 우리 밑으로 낮아지신 그 분을? 혹은 그분 영혼의 자리는 아니더라도
우리 모든 영혼이 거하는 자리인 흙의 먼지로 된 그 보혈을,
혹은 하나님에 의해 옷 입혀진 저 육신을,
그분의 옷이 누더기로 찢긴 것을?
만약 이런 것들을 내가 보지 않는다면, 감히 어찌 내가
그의 비참한 어머니에게 내 시선을 던질 수 있을까,
이곳에서 하느님의 동반자였으며 이렇게
우리 몸값을 치른 그 희생의 절반을 제공하신 그분을?
Could I behold those hands which span the poles,
And turn all spheres at once, pierced with those holes?
Could I behold that endless height which is
Zenith to us, and to'our antipodes,
Humbled below us? or that blood which is
The seat of all our souls, if not of his,
Made dirt of dust, or that flesh which was worn,
By God, for his apparel, ragged, and torn?
If on these things I durst not look, durst I
Upon his miserable mother cast mine eye,
Who was God's partner here, and furnished thus
Half of that sacrifice, which ransomed us? (21-32)
양극을 한 뼘에 재고 동시에 모든 천체를 움직일 수 있는 신의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혀 구멍이 뚫려 있다. 우리나 지구 정반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무한한 높이의 정점에 존재하는 신은 인간의 몸으로 비천하게 태어나 우리 밑으로 낮아졌다. 우리의 모든 영혼이 거하는 자리인 예수의 피는 갈보리 땅에 흘러 흙먼지가 된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으로 올 때 입은 옷과 같은 예수의 몸은 그를 고문하는 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에서 던은 “우리 몸값을 치른 그 희생의 절반을 제공하신 그분”이라며 당시 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에 격렬한 논쟁거리를 제공한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수를 잉태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위해 아들을 희생하는 데 하나님과 반씩 몫을 담당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십자가 고통을 바라보는 슬픔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통을 가만히 바라봐야만 하는 비탄에 잠긴 마리아의 인간적인 고뇌를 제시함으로써 시에 비극성을 깊이를 더하고 있다.
“비록 이런 일들이 내가 말을 타고 가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만”이라고 시작되는 시의 결말은조용한 두운의 리듬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기억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생생하게 되살리도록 이끈다.
비록 이런 일들이 말을 타고 가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만
아직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네,
기억이 그들을 향해 바라보고 있기에. 또한 당신이 저를 바라보십니다,
오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는 당신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만, 징계를
받아들입니다, 당신의 은총이 당신에게 멈추라고 명할 때까지.
오 분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저를 벌하소서,
저의 녹과 결함을 불태워버리소서,
당신이 저를 알아보실 수 있을 만큼 당신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소서
당신의 은총으로, 그러면 저도 제 얼굴을 돌리겠습니다.
Though these things, as I ride, be from mine eye,
They are present yet unto my memory,
For that looks towards them; and thou look'st towards me,
O Saviour, as thou hang'st upon the tree;
I turn my back to thee, but to receive
Corrections, till thy mercies bid thee leave.
O think me worth thine anger, punish me,
Burn off my rusts, and my deformity,
Restore thine image, so much, by thy grace,
That thou mayst know me, and I'll turn my face. (33-42)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에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를 기억하며 죄책감이 든 화자는 자신을 돌이키기 위해 신이 내리는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그는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강한 열망을 토로하면서, 죄와 허물로 인해 녹이 슬고 형태가 일그러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회복시켜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처럼 던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자신이 직접 목격하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Winny 119). 그러면서 특유의 뛰어난 구조와 기발한 착상을 사용하여 서쪽으로 말을 달릴 때 냉담했던 자신이 처한 시 전반부의 극적 딜레마를 해결하고 신의 은총으로 올바른 운명을 향해 동쪽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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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앞둔 인간이나 장례에 대한 생각에서, 이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이는 갓 태어난 아기의 세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한 인간의 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묵상은 갑자기 보편적 교회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가고 있다.
교회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이어서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 교회가 한 아이에게 세례를 주면 그 행위는 나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그 아이는 내 머리이기도 한 머리와 연결되고, 내가 그 신체의 일부인 몸에 접붙여진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장례하면 그 행위는 나와 관련된 것이다.
The church is Catholic, universal, so are all her actions; all that she does belongs to all. When she baptizes a child, that action concerns me; for that child is thereby connected to that body which is my head too, and ingrafted into that body whereof I am a member. And when she buries a man, that action concerns me. (Devotions 107-8)
던은 여러 인간이 하나의 같은 머리에 접붙여져(ingrafted) 있으며 이들 모두는 한 몸의 지체(member)라는 특이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머리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몸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는 ‘보편적’ 교회라는 개념에 의해서 모든 인간들은 몸의 지체와 같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며, 다양한 삶과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개된다. 즉 모든 인류는 어린아이가 세례로 보편적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순간부터 어른이 되어 죽게 되기까지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온 인류는 한 교회를 이루어 같은 머리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는 생각에 이어서 모든 인류는 한 저자가 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이 도입된다.
모든 인류는 한 분의 저자가 쓴 한 권의 책이다.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장이 그냥 책에서 찢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언어로 번역되며 결국 모든 장마다 그렇게 번역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번역자를 동원하시고, 어떤 부분은 늙음으로, 어떤 것은 질병으로, 어떤 것은 전쟁으로, 또 어떤 것은 법의 심판에 의해 번역된다. 그러나 모든 번역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드리워져 있고, 모든 책들이 서로서로에게 펼쳐져 놓이게 될 도서관에 두기 위해 이 모든 흩어져 있는 책의 한 장 한 장을 그분의 손이 다시 한 권으로 제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위해 울리는 종은 설교자만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회중이 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듯이, 이 조종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all mankind is of one author, and is one volume; when one man dies, one chapter is not torn out of the book, but translated into a better language; and every chapter must be so translated; God employs several translators; some pieces are translated by age, some by sickness, some by war, some by justice; but God's hand is in every translation, and his hand shall bind up all our scattered leaves again for that library where every book shall lie open to one another. As therefore the bell that rings to a sermon calls not upon the preacher only, but upon the congregation to come, so this bell calls us all. (Devotions 108)
17세기에는 ‘저자’(author)라는 말이 주로 창조주(Creator)나 조물주(First Cause)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던은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작가’(writer)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Roston 201). 저자나 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던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말하던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번역되며”(translated)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 단어의 축자적 의미가 ‘옮기다’(carried across)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 세상에서 내세로 옮겨간다”는 뜻으로 사용된 펀(pun)을 둘러싼 던의 뛰어난 수사법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번역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머지않아 잠시 살던 이 세상에서 내세로 옮겨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단어가 지닌 근본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인해 보다 근원적이고 영속적인 진리를 위해 이 땅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버리라는 던의 핵심적인 의도가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 기도문에서 사용된 ‘지체’(member)나 ‘번역하다’(translate)와 같은 단어가 처음에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평범한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포함한 근본적이고 성경적인 뜻이 드러나면서 일상적인 의미에서 성스럽고 종교적인 의미로 옮겨감을 알 수 있다. 던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고통의 예로서 늙음과 병, 전쟁, 교수형 등을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이 흩어져 있는 책장들을 한 권의 책으로 제본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 여기서 ‘제본’(bind up)한다는 말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편 147: 3)라는 시편의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책의 흩어진 “한 장 한 장”은 로스톤의 말처럼 가을날의 흩어져 날리는 나뭇잎 같은 인생의 무상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Roston 201-2). 던은 이렇게 제본된 우리 모두의 책이 최후의 심판 날 서로에게 숨김없이 펼쳐지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느리게 진행되던 묵상은 곧 다가올 죽음을 상기시키며 긴박하게 전개된다. 던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잘 알지 못하는 교우의 죽음에 대한 이기적인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면서, “누가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한 부분을 떠나보내는 그 종소리로부터 귀를 돌릴 수 있겠는가?”(who can remove it from that bell which is passing a piece of himself out of this world?; Devotions 108)라고 직접적인 어조로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즉 조종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 부분”이 세상을 떠남을 알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묵상은 다음의 유명한 구절로 극적인 결말을 맺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없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한 부분일 뿐이다. 흙 한 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나가면 유럽은 그 만큼 작아진 것이다. 마치 그 튀어나온 갑(岬)이 씻겨 나가거나, 그대 친구의 영지나 당신 땅의 일부분이 씻겨 내려간 것처럼.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줄어들게 하는데, 이는 내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울리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니까.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s tolls; it tolls for thee. (Devotions 108-9)
바닷물에 씻겨 나간 흙은 비록 보잘 것 없이 미미한 양이라 하더라도 그 흙이 내 친구나 나와 같은 인간의 영혼이 거하던 집과 몸을 뜻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던은 대륙이나 본토와 같이 측정하거나 만져볼 수 있고 대단하게 보이는 이세상의 그 어떤 것도 기껏해야 잠시 있다가 없어질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던의 묵상은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경험한 육체적․영적 고난으로부터 깨달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뛰어난 예술로 승화시켜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