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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Canon DIGITAL IXUS 75 (1/13)s iso200 F2.8 한승원님의 소설은 추사의 예술을 이 오탁악세의 수렁에서 피어난 해탈과 자유의 꽃으로 그려낸다. <세한도>와 <판전>이 보여주는 정신의 우뚝함이 얼마나 큰 좌절과 외로움을 뚫고 나온 것인지, 그 신필의 바탕에 얼마나 두터운 시대의 암흑이 깔려 있는 것인지를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추사는 미신이 없는 미래로의 전환을 꿈꾸었고 그의 시대는 전환을 거부했지만, 추사가 시대와의 싸움에서 도달한 자유와 자존이 다시 이 오탁악세를 쓰다듬는 보시로 베풀어지기를 이 소설은 염원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추사는 기세(棄世) 후에 <세한도>에 나오는 초가집 바람벽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추사는 지금도 헐겁고 희미한 그 초가집 안에 계시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봉은사 <판전>의 낙관 위에 겨우 이어가는 작은 글씨로 ‘病中作’이라고 씌어진 세 글자의 뜻도 겨우 알 것 같다. 아파서 겨우 움직인 붓이, 자유는 고난의 소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훈(소설가) 한승원이 쓴 소설 <추사>의 뒷표지에 씌어진 김훈의 추천글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김훈을 생각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라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나이 일흔을 한 해 앞두고, 일흔한 살에 태허 속으로 날아간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신산한 삶과 예술을 소설로 썼다”고 한 한승원의 말을 깊이 믿었을까요? 그의 추천이 소설에 대한 신뢰를 올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오히려 나는 김훈에 대한 신뢰를 낮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추사의 첩(妾)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은 평가를 할 만합니다. 서자 상우의 어머니인 초생은 소설 <추사>를 살갑게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추사를 사모하여 패랭이갓을 쓰고 남장을 한 채 추사의 집에 들어와 살았고 마침내 추사는 그녀를 첩실로 들여 상우를 낳았다는 대목은, 워낙 역사적인 기록과 증언이 드물어 감히 누구도 잇지 못했던 맥락들을 소설적으로 찾아낸 개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둘째 부인 예안 이씨가 초생에 대해 투기를 하고 그로 인해 초생이 가출을 해버리는 스토리는 너무 나간 게 아닐까 합니다. 추사를 한때 첩실에만 들락인 사람으로, 부인에게 소홀했던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예안 이씨를 분별없는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은, 재미를 넘어서서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기존의 상식적 관점들을 근거없이 뒤집는 것일 수 있다 싶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걸렸던 대목은 추사에 관한 이해와 묘사였습니다. 우선 경서(經書)에 대한 방대한 독서와 치밀하고 엄격한 고증을 통해 얻어낸 지적 성취들, 그리고 청나라 학자들과의 학예 교류를 통해 높아진 그의 학문적 안목들에 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고 일컬어지는 천재 지식인의 경탄할 만한 지적 편력은 증발되고, 대개 시를 쓰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심취한 사람으로만 보여지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추사는 그저 누가 글씨를 써달라고 하면 내키는 대로 써주는 기예가로 느껴집니다. 추사의 성격과 행동에 인간적인 체취를 불어넣으려는 욕심이 지나쳐서, 그를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경박한 사람으로 만든 것도 불편했습니다. 백파선사나 이광사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지적이 아니라 혈기나 추단(推斷)의 결과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백파와 추사, 그리고 초의의 선(禪)과 화두에 관한 논쟁은, 추사의 과격함으로만 읽힐 거리가 아니라, 당시 불교의 참구(參究) 방식에 관한 일대 논쟁들에서 진실을 찾아내려는 지식인의 열정과 사유로 읽혀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이광사에 대한 추사의 관점들이 격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조선의 서예의 핵심성취로 받아들여졌던 동국진체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방편으로 이광사의 글씨를 문제 삼은 것이지, 냉정을 잃은 증오나 매도가 아니었다는 점도 간과한 듯 합니다. 그리고 추사가 초의를 만난 뒤 그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자신의 첩 초생을 같이 나눠 안고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대목은, 정말 어리둥절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또 해배(解配)가 되어 올라오는 길에, 추사 행세를 하고 다니는 어떤 사기꾼을 직접 찾아가 그를 망신주고 자신의 글씨를 과시하는 대목도 재미는 있지만, 추사의 품격이나 거취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양아들 상무와 서자 상우가 제주도에 찾아와 서로를 의심하고 헐뜯는 대목 또한 인간적이고 소설답기는 하지만 추사 집안의 분위기를 와전하는 것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추사의 교류도 약간 어색하고 ‘이하응이 왕이 되어야 내가 모든 것을 신원(伸寃)할 수 있다’고 말년의 추사가 속으로 비는 대목 또한 어이가 없습니다. 안동김씨의 대부였던 김조순이 추사에게 인삼 상납을 부탁하고 추사가 그것을 주는 대신 편지를 써서 김조순을 훈계하는 일도, 가당찮은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시간이 되는대로 소설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림선생님...11월도 건강하셔요...
올리자 마자 지향님의 감상기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한승원의 <추사>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옛날 오성찬의 <세한도>는 읽다가 던져 버렸습니다. ㅎㅎㅎ 소설도 어느정도 사실에 바탕을 둔 픽션이라야 수긍도 가고 재미있겠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충분히 동감합니다 다만 한가지는 추사말대로 天人合一時에 문자향과 서권기에서 우러나오는 예술이 꼭 지필묵연이 필요한지요..허공에 쓰든 흐르는 물위에쓰든 본인의 감흥표출이고...남한테 보여주자는건 아니라고보는데..禪에 심취한 추사로선 충분히 그럴수도있지않을까싶은데 저의 생각이 엉뚱한지요
소설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지 못해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지필묵이란 재료에서 벗어나 하늘에 호기를 부린다고 표현했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픽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널리 알려진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소설로 형상화 한다는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 할것 같습니다.
추사를 빌은 지극히 상업주의에만 필끝이 가고 ~~비록 허구라 하지만 너무 맹낭한 필자가 자연속에서 터득함이 시류에 허기를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포퓰리즘의소설을 쓴게 아닌가 합니다.소개하신 무림선생님 잘 읽었읍니다.바뻐 오랜만에 들어와 공부합니다. 고맙고 감사드려요.
저도 아직 한승원 작가의 추사를 읽지 못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읽을 수 있을런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