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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수원화성(水原華城)
2016년 9월 11일(일) 오전 10시 01분에 1호선 수원 성균관대역에서 위짜추 패노우 조단스 씨모우 마리바 까토나 여섯명이 만났습니다. 오늘의 행선지는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 캠퍼스를 거쳐서 수원팔달산 화성을 한바퀴 돌아볼 에정입니다. 2,002년도에 이곳 성대 임상약학 대학원 다니느라고 성균관대역을 찾은 이후로는 처음으로 감회가 남 다릅니다. 그때와 지금의 역사(驛舍)는 같은 건물이지만 오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타지역의 전철역사는 말 그대로 깨끗하기도 하지만 으리으리하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새로 개축하려고 한창 공사중 입니다. 정문에 불여있는 성균관대학교라는 여섯 글자는 노객인 나에게는 아직도 설레임으로 가슴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50여년이 흐른 오늘도 지난날의 캠퍼스에서의 꿈과 낭만이 파노라마가 되어 몰려오고 있습니다. 명륜동 캠퍼스에 있는 약대 실험실에서의 동기들이 생각이 납니다. 예리한 눈빛으로 정성분석을 하고 있던 그 모습 그 얼굴들이 새삼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몇몇은 별써 저 세상인 하늘나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모두 약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끗끗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하라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를 맵돌고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되니 어떻게든 마련해 줍시다 " 하시던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오늘도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평생을 공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50대 후반의 젊지 않은 늙으막에 말입니다. 어쩌면 영양가 없는 그날 그날의 시간이 너무나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나 봅니디. 성대 캠퍼스로 진입하면서 지난 날의 공부하던 임상약학 대학원을 더듬어 봅니다. 하지만 몇년 전에 약대는 신축한 새로운 약학관으로 이전했습니다. 동문회에서도 일정 부분 모금한 성금을 희사했습니다. 이 노객도 자그마한 성금 금일봉의 손길을 보탰습니다. 약학관에서 기념으로 한 컷 스마트폰에 담고 옆에 있는 일월저수지로 들어섭니다. 저수지 주변에는 갈대를 비롯하여 누렇게 고개를 숙인 벼이삭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 위에는 몇마리의 물오리가 여유롭게 노닐며 먹이를 찾고 있습니다. 인기척에 하얀 백로 한마리가 화들짝 놀라서 나무 위로 솟구쳐 오릅니다. 거니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 한적하고 평화스럽게까지 보이는 저수지의 풍경입니다. 전망대로 들어서니 예상과는 사뭇 다르게 저수지의 물빛은 녹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합니다. 사대강의 녹조가 심화되어 물고기 한마리 살 수 없는 죽음의 물길로 변했다는 보도가 떠오릅니다. 이런 물로서는 물 위를 떠다니고 있는 오리들과 백로의 모습이 생뚱 맞게 보일 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방치를 하고 속수 무책으로 방관하고 있는 해당 당국자들의 무능함에 혈압이 오릅니다. 생각 같아서는 녹조로 잔뜩 썩어 가는 물 한 바가지를 그들의 위장 속으로 가득 채워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관리를 하면서도 국민들의 혈세를 축내가면서 생활하고 있는 그 고귀(?)하신 관리들의 얼굴 표정이 어떨런지 궁금합니다. 윗물부터 아랫 것들까지 저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는 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잰 걸음으로 구운공원을 통과하여 여기산 공원으로 향합니다. 얕으막한 여기산 주위에 잔디를 잘 가꾸어 깔았으며 실내 체육관도 갗추어 놓았습니다. 야외 탁자에 잠시 앉아서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잠시 축입니다. 시원한 파아란 물결이 일렁이는 서호로 접어드니 짓눌렸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건너편에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습니다. 그리고 호수와 아파트를 사이에 두고 기차와 전철이 쉬임 없이 오가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동네 노인들이 노인이래야 우리 백년지기와 비스무레한 나이로 게이트볼과 비슷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오를 넘기는 시각으로 나무그늘을 찾아서 잔디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모시떡 치즈빵 가래떡 배 콩음료수 요구르트 초코파이 각자 가져온 간식으로 혈당을 올리고 갈증을 달랩니다. 10,000보를 초과하여 알콜에 젖으면 다음날 힘들다는 패노우는 화성에 있는 행궁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니다. 치빠흐도 수원역으로 14시에 와서 행궁에서 접선하기로 합니다. 도중에 팔달산 방향을 물으며 서둘러 화성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암문으로 들어서서 가장 높은 화성장대(華城將臺) 앞에 오르니 수원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보아도 철옹성(鐵壅城) 같은 느낌으로 세심한 배려로 이루어진 성곽임에 틀림없습니다.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후기인 정조 때 1790년대에 걸쳐서 건축한 돌로 쌓은 성곽으로 높이는 4∼6 m 높이입니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서 조성한 성곽으로 길이는 5.4KM 정도 됩니다. 한국 성(城)의 구성 요소인 옹성(壅城) 성문(城門) 암문(暗門) 산대(山臺) 체성 치성(雉城) 적대(敵臺) 포대(砲臺) 봉수대(烽燧臺) 모두를 골고루 갖추어진 한국 성곽의 건축 기술을 집대성한 곳입니다. 한국의 문화재뿐이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그리워 하여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도성부 뒷편인 화산(花山)으로 옮긴다. 주위에는 광교산 팔달산등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현륭원(顯隆園)으로 개명하게 합니다. 지금은 사도세자와 부인인 혜경궁 홍씨묘인 융릉(隆陵)과 아들인 정조와 왕후인 효의왕후(孝懿王后)능의 건릉(健陵)을 합하여 융건릉(隆建陵)이라 부릅니다. 길양사를 개축하여 용주사를 지어서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을 모시는 능사(陵寺)로 합니다. 용주사 재실(在室)에는 정조 자신의 초상화를 함께 하여 아버지를 항상 곁에서 추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봄 가을 두번은 서울 창덕궁에서 현륭원까지 행차하려면 1,700여명이 한강을 건너서 50KM 이상을 이동해야 합니다. 한강을 건느려면은 배가 동원되야 하며 엄천난 비용과 백성들의 불편이 따라야 합니다. 이런 백성들의 고초와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합니다. 자그마한 배를 연달아 띄우고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서 주교(舟橋) 즉 배다리를 만듭니다. 이것을 주교지남(舟橋指南)이라는 남쪽으로 향하는 배다리라는 책도 정조가 서술하게 됩니다. 이같은 큰 무리가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어림도 없는 큰 행차임에 틀림이 없습니다.그리하여 수원 도성부에 살고 있는 많은 백성들을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이사를 시킵니다. 이름도 수원부에서 화성으로 개명을 시키며 화성(華城)을 건축하면서 현륭원까지 능행(陵行)을 위하여 임금이 거동할 때 거처하는 행궁(行宮)을 중앙에 설립합니다. 팔달문(남문), 장안문(북문), 청룡문(동문), 화서문(서문)으로 4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성곽 바같으로 통하는 암문 5개가 있으며 비상시에 식량등의 군수품을 반입하기도 하는 비밀 통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서(東西) 사이에 북(北)에서 남(南)으로 흐르는 곳에 수문 2개, 적대 4개, 노대 2개, 치성 8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장대2개, 포루 2개, 각루 4개, 포루 2개, 포사 3개,등의 시설을 골고루 설립한 성곽입니다. 정조의 개혁적인 정치 노선과 자유시장 경제를 실학에 바탕으로한 성곽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정조 때의 성곽과 건축물들이 한국 근대 건축사의 시작이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정조의 공과물의 이면에는 말 못할 자신만의 고통과 애환(哀患)을 표출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서술한 한중록(閑中錄)을 들여다 보노라면 그림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9세 때 혼인하여 궁내로 입궁하여 15세가 되어서야 합방을 합니다. 이 때에 태여난 아들이 후대에 정조 임금입니다. 사도세자는 아주 어려서부터 문무에 월등한 재능을 겸비함으로 아버지인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습니다. 삼대(효종 현종 숙종)에 걸쳐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영조에게는 더 함이 없는 왕실의 경사입니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사도세자는 커갈수록 무술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무예에 대한 책도 서술합니다. 학문 보다 무예(武藝)에 더욱 관심 가지는 세자 아들에게 학문을 강권합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세 때에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함으로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압박을 받게합니다. 본심을 숨기고 양위 선언을 수시로 하면서 종국에는 자식에게 정신질환을 앓게 됩니다. 천재가 울화병이나 조울증이 있으면 순간적으로 광적(狂的)인 행동으로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환관들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시도 합니다. 그 당시의 의약 수준으로는 지금과 같은 치료약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빠알갛게 녹이 쓸은 철물을 물에 담구어서 녹물이 뜨게끔 한 산화철ex., 목향(木香), 자산조인(炙酸棗仁), 황련(黃蓮), 치자(梔子),대추(大棗),작약(芍藥), 감초(甘草),다시마등을 설악의 오색약수를 8.5ℓ정도를 넣고 반(半)으로 줄어들 때까지 약한불에서 끓인다. 오색약수에는 산화철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음으로 입니다. 식혀서 소주2잔 100㎖를 아침 저녁으로 두번 복용시킨다. 21일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이런 약제를 기본으로 증상을 보아가면서 투약하면 어떻했을까 하는 허잡스런 처방을 생각케 합니다. 어의(御醫)는 영조의 눈치를 보느라고 감히 투약을 권하지도 못했을 터입니다. 효험은 차치하고라도 말입니다. 세자의 난폭성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노론 소론 남인등의 애증이 뒤엉킵니다. 신하들들 뿐 아니라 빈(嬪)과 후궁들의 질시와 모략으로 어린 왕세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습니다. 갖은 모략과 모함으로 상소를 거듭함으로 아버지인 영조의 마음도 분노와 배신으로 치닫습니다. 세자 책봉을 취하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며 끝내는 칼을 내주면서 자결할 것을 명(命)합니다. 부모 앞에서 자결을 하는 것은 효(孝)에 어긋난다면서 무릎을 끓고 땅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아무리 사실을 고하고 빌어도 아버지인 영조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드디어 뒤주 속에 가두게 됩니다. 미움과 물을 몰래 뒤주에 넣어준다는 귓뜸으로 유약까지 발라서 숨통을 조입니다. 구일만에 아들 세자는 한 많고 고통뿐인 세상을 쓸쓸히 등지게 됩니다. 그래도 애비인지라 슬픔을 생각한다는 뜻의 사도세자(思悼世子)라 불리우게 됩니다. 애비가 자식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충격과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과 슬픔은 짐작키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 5백년사(史)에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도 4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권을 유지한 자가 바로 영조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하여서는 천륜도 저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공과(功過)를 떠나서 이런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박탈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킴은 물론이고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시행하는 것이 후세들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핍박하고 말살시키는 행위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도 받아서도 안되는 죄악이며 범죄입니다. 이런 범죄자에게는 옛날 대역죄를 지었던 능지처첨(陵遲處斬)의 형벌로 다스리어 경각심을 불어 넣어주는 것도 좋을듯 하옵니다. 이런 족속들에게는 인권이라는 단어도 사치스러운 미사여구일뿐입니다. 더구나 11살의 어린 자식이 지애비가 지할아벼지의 손으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참담함은 오죽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정조로 하여금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피맺힌 사부가(思父歌)의 시작이며 단초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 깊히 품었던 절절한 아버지의 복위를 위한 절규입니다.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뛰어난 문장력과 표현의 기술은 상당한 수필가이며 문학가라 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지만 남편의 장인인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한 기록도 기술해야 할 불편한 단면도 있습니다. 영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장인이면서도 사위의 몰락을 옆에서 부추긴 죄를 피하기는 어려웠을테니까 말입니다. 고종 때 와서야 복위되어 장헌세자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선왕조 500년사(史)에 끊임 없이 벌어지는 당파 싸움과 외세의 침략으로 핏물로 얼룩진 굴욕(屈辱)과 오욕(汚辱)의 역사의 장(場)이기도 합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높은 곳에 올라선 장수의 왼쪽 허리춤에는 6척(尺) 장대의 번뜩이는 칼을 찼습니다. 투구 밑으로 부릅 뜬 두 눈동자에는 성곽을 지키며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서슬퍼런 광기가 엿보입니다. 사면 팔방을 향하여 군졸들에게 작전의 령(令)을 내리는 호령소리는 성곽을 진동시킵니다. 성곽 안팍을 오르내리는 군졸들의 양손에는 창과 방패를 움켜쥐고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포대(砲臺)에서는 불벼락을 쏟아 붓는 대포와 총구에서는 화승포로 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봉돈(봉수대)에서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연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앞치마와 광주리와 지게로 머리통만한 돌덩이들을 부지런히 포대 위로 나르느라 찐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평온하던 성곽 안팍이 터지는 화약 냄새와 비명소리로 순식간에 아비귀환으로 돌변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쪽바리 왜놈 아니면 오랑캐 뙤놈들의 노략질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 뛰고 저리 쫒기며 넘어지고 엎어지는 백성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성곽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울려대는 벨소리에 엉거주춤 주저 앉습니다. 그제야 등에 메고 있는 배낭 주머니에서 울리고 있는 스마트폰 전화벨 소리가 현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 야 카토나 ! 왜 아직 안오고 있는거야, 어디냐,엉 " 볼멘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행궁에서 오후 14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한 패노우와 치빠흐가 생각납니다. 가이드 깃발을 따라 줄줄이 걸어가고 있는 일본,중국인의 관광객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잠깐 중국 관광객을 오랑캐로 일본인들을 쪽바리로 원한(怨恨)의 착시 현상을 보였나 봅니다. 서둘러서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팔달문으로 내려갑니다. 지금 시각은 2016년 9월 11일 14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원화성 이곳만은 조선 정조 시대 18세기 말에 시간이 멈추어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성곽을 지은지도 이제 220여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임금의 효심(孝心)이 꽃으로 활짝 피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백성들의 가슴 가슴마다에는 그윽한 향기가 무궁하리라 믿습니다.
2016년 9월 14일 추석 전날에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