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단속사터
이 절터는 우리나라 선종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찰인데, 그 이유가 우리나라 선종 역사의 초조인 법랑은 중국에 유학을 가 중국 선종 4조인 도신의 법맥을 이은 선사로 우리나라에 북종선을 소개한 스님인데 그의 제자가 신행이며, 이 신행선사가 머문 사찰이 바로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법랑은 중국 선종 6조혜능에 앞선 5조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법랑선사에 대한 연구나 예우는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한국 선종불교에서도 사대주의의 병폐가 있어 아쉽기 그지 없다.
우리나라 선종의 역사는 9산선문을 중심으로 남종선의 역사를 내세우는데 이는 이들 산문의 개창조들이 대다수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가 6조혜능의 제자 남악회양의 제자인 마조도일의 문하에 있었던 운수신감(쌍계사 혜소), 서당지장(가지산문 도의, 실상산문 홍척, 동리산문 혜철), 남전보원(사자산문 도윤)의 법맥을 주로 이었고, 청원행사의 문하에 석두희천의 3대손제자 조동종의 동산양개의 제자인 운거도응(수미산문 이엄), 석두희천의 제자 단하천연의 제자인 투자대동(봉림산문 심희) 등의 법맥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종선 계열의 이들에 비하면 북종선 계열의 법랑과 신행은 한참 전의 일이다.
따라서 단속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선종사찰이고 그것도 북종선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찰 또한 1568년(선조 1)에 산청지역 유생들의 손에 의해 대규모 파괴가 이루어졌는데 이 때 불상과 경판 그리고 고려시대 대감국사 탄연의 승탑비 또한 파괴가 되었던 것이다. 단속사 파괴에 참여한 이 지역 유생들 중 나의 성씨인 여흥민씨를 가진 유생이 있었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산청 단속사터 동서3층석탑(보물 72. 73호)- 빼어난 균형미의 멋진 통일신라 석탑이며 앞 당간지주 쪽이 사찰 입구이고 뒷 마을이 훼손된 금당 터이다. (아랫마을을 건너서 당간지주가 있음)
단속사터 당간지주- 크고 멋진 당간지주로 이곳이 사찰 입구이고 뒤에 보이는 앞 마을이 일주문과 천황문 터이며 마을 뒤에 동서3층석탑이 있고 석탑 뒷 마을이 전각들 터인데 지금은 모두 훼손되고 당간지주와 석탑만이 남아 통일신라시대 넓은 이 절터의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종파 중 하나인 선종의 역사에서 남종선만이 존재하게 되는 사유는 이렇다.
9산선문 중 다른 산문과 달리 국내파인 희양산문의 개산조인 도헌은 법맥을 중국선종 4조도신의 법을 받은 5조법랑- 신행- 준범- 혜은에 두었고, 그의 제자 양부까지는 북종선의 법맥을 이었으나 긍양에 이르러 중국선종의 흐름과 국내 선종의 흐름에 결국 남종으로 돌아서게 됨으로써 북종선은 우리나라 9산선문에서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우리나라 선종의 소의경전도 능가경(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은 배제되게 되고 금강경(공사상과 반야사상)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불교 고승들 대다수가 능가경을 배제한 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설법은 유식사상에 기반을 두고, 예불은 밀교사상의거 행하면서 본인들은 선종인 조계종의 승려계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완전 비빔밥종이 한국 조계종이라 평할 수 있다.
그리고 조계종이라고 하면서 변두리에 있는 9산선문 선종사찰에는 중점을 두지 않고, 돈이 되는 밀종이나 화엄종.법화종사찰을 중심으로 종파를 운영하면서 달마와 혜능 그리고 임제에 뿌리를 둔 선종이라 하니 참으로 희안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