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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믿음의 사람도 실수를 합니다.
성경 본문 : 창세기 16장 1절~6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3년 10월 29일 주일 오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다 알면서 용서하시고
인간은 다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할 수 있으며 반복되는 죄를 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성자라는
성호를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실수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전서>10장 12절 말씀에서
12절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1절 말씀에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아브람>이 자식이 없어 두려워 떨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세기> 15장 1절 말씀에
1절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고
말씀해 주시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합니다.
자신이 두려워 떨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다시 믿음과 용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하늘의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처럼 네 자손이
많아지리라 하고 약속 하셨습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5절)
<아브람>은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배신과 불신이었는데
이렇게 끝까지 믿어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서 증거를 구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영적 증거를 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짐승을 쪼개어
서로 마주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9절-10절)
<아브람>은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쪼갠 짐승을 보면서 기다렸습니다.
해가 질 때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횃불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17절)
이것은 실로 깊은 영적 경험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다시 회복되었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6절)
우리가 마음이 답답하고 캄캄할 때 산에 가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말씀도 주시고 환상도 보여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고 용기도 주십니다.
우리는 영적 체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짜증나고 화나게 하는 일, 나로 하여금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그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타는 횃불로 나타나신 하나님도 경험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먼 미래에 대한 환상도 보았고 자녀에 대한 확증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활하는 현실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아브람>의 아내가 말합니다.
본문 <창세기> 16장 1절 말씀에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그녀가 생산치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늙어가고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있었지만 아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속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고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급기야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그분은 신실하신가?
그분의 음성과 약속대로 과연 이 약속이 지켜질 것인가?
만약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나에게는 아기가 없다는 말일까? 이렇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래>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좌절감은 그녀에게 부정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성도라 할지라도 잠시 방심하면
죄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이성과 형편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서와 감정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 보시라고!”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속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고 습관에 의해 그동안 해 오던 전통의
방법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육체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내 몸종인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더 현명한 일일 것이야.’ <사래>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생각이거나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단지 답답하기 때문에 들었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래>의 생각은 그녀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람>도 자녀가 없어서 <다메섹>의 사람
<엘레에셀>을 상속자로 삼아서 살겠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습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3절)
하나님은 이 말에 대해서 정면으로 양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태어날 씨가 약속의 자녀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참고 성경 <창세기>15장 4절)
<아브람>처럼 <사래>도 자신이 임신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기를 낳겠다고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의 씨받이처럼 말입니다.
<창세기> 16장 2절 말씀에
2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래>의 실수는 자신이 임신하지 못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이었습니다.
<사래>는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정했습니다.
‘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 같아’ 하고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십니다.
지금은 아기가 없으나 곧 아기가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는 ‘아기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 약속은 없다. 고
자기 마음대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렵고 힘들 때 여러분 마음대로 단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셨다.’ 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과 <사래>를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까지 데리고 가신 후에
아기를 주셨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가 정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먼 훗날 동정녀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아시고 먼저 아브람에게 이렇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구속사적인 가르침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가능해 보이고 이해되지 않을 때
단정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쉼표’ 이지 마침표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불가능해지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찾아오십시오.
구속사적으로 그것을 해석해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생애에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2절 말씀에서 나타나는
<사래>의 또 다른 실수는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준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씨받이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급하면 쉽게 원리와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씁니다.
편법은 쉽고 첩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고 비참한 법입니다.
<사래>는 <애굽>에서 얻은 몸종 <하갈>을 통해 임신하게 함으로
자기의 모든 문제와 불만과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사래>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사고가 생기고 후회하게 됩니다.
지금의 <사래>는 극도로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실수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녀는 판단력을 잃었습니다.
<사래>의 실수에 <아브람>의 실수까지 겹칩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극도의 불안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내뱉은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동의했습니다.
그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사래>의 제안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의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종을 통해 아기를 낳으십시오. 라는 말이
<사래>의 진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투정이요
갈등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 했어야 했습니다.
“여보 우리 포기하지 맙시다. 절대 그러면 안 되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립시다.”
임신하지 못한 <사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래>의 인간적인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맙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16장 3절 말씀에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 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믿음의 여행을 시작한 때가 75세였고 지금이 85세였습니다.
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믿음은 성숙하지 않았고 완성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은
사람이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사는 요령과 기술만 발달될 뿐입니다.
성도는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인내로서 하나님의 성취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성경 <시편>37편 7절)
<창세기> 16장 4절 말씀에
4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였고 쉽게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래>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임신이 <하갈>에는 너무 쉽게 이루어집니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하갈>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래>의 몸종이었으나 <사래>의 주인의 위치로 군림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의 속성입니다.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여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단순히 임신의 도구,
즉 씨받이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래>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대로 처음에는 어렵다가
시간이 갈수록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종이 주인행사를 하려 할 때
<사래>의 감정은 분하고 원통하였습니다.
기복이 심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5절 말씀에
5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을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실수는 누가 저지른 것입니까? <사래>였습니다.
그런데 화를 누가 냅니까? <사래>입니다.
실수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죄 지은 사람이 큰소리칩니다. 실수는 <사래> 자신이 하고서
그 책임을 <아브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죄는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이 그런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누가 너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담>이 “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하고 말하지 않고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준 그 여자가 나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은 <하와>에게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책임전가와 변명이 죄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사래>는 적극적으로 <아브람>에게 항의합니다.
그녀는 모든 실수는 다 당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으로 하여금 첩을 취하게 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조금도 없이 모든 잘못을 <아브람>에게 미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에게 당한 인간적인 모멸감을 분풀이하기 위해
<아브람>을 다그치며 하나님의 이름까지 오용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분노를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쏟아 놓으면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창세기> 16장 6절 말씀에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 하였더라”
<아브람>은 거친 <사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당신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자에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행했던 두 번째 실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사래>가 몸종을 첩으로 줄 때 거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벌어진 상태에서는 <하갈>을 학대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사래>와 <하갈>이 싸울 때 <사래>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갈>을 무참하게 버렸던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계속 잘못 끼게 되니까
<아브람>뿐 만 아니라 <사래>도 계속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녀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줄 때와 다른 태도입니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것은 바로 <사래> 자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하갈>을 학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래>는 복수하듯이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그녀는 <사래>를 떠납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과를 낳고 잘못된 결과는
무책임과 학대를 낳고 결국 학대는 그의 곁을 떠나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도망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도피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으로부터 도망가고, 자식은 일만하고 성공만 하되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부터 도망갑니다.
학생은 실력 없는 선생으로부터 도망가며.
노동자는 착취하는 주인으로부터 도망가며.
백성은 독재하는 정치가로부터 도망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이고 도망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16장 1절-6절 까지 말씀의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서>3장 10절 이하에서
의인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죄의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실수하지 않았고
완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수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믿음이 있어서 그의 행동이 의로워서 이거나
그가 실수하지 않아서 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고 결정적인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실수를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계속 이끌어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을 수 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고 성경 <고린도 전서>15장 10절 새 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인도하심과
붙잡힘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마치 항상 죄를 짓지 않은
삶을 만나듯이 우리를 대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두 번째로 이 사건에서 배우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 지라도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방법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보다 세상적인 방법을 택해서 양자를
삼으려 했고 <사래>는 몸종을 시켜서 아기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마십시오.
손쉬운 인간적인 생각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냥 고난을 견디십시오. 고통을 당하십시오.
신앙의 위기는 한 번만 오지 않고 계속 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쉽게 갈 것인가라는
두 가지 싸움은 우리 생애에 계속됩니다.
그럴 때마다
어려운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을 택하십시오.
고통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택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아브람>이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택함으로 저지른 실수는
보통 실수가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었고
그가 바로 <아랍>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아브람>이 회복할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죄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수보다 큰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선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으로 계속 가십시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