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니’ 이 말씀을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맑은 종소리가 들리는 듯 상쾌한 기분이 들고 진리를 깨달은 듯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이 차오르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 뜻을 헤아리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오히려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실상은 무엇이고 증거는 또 어떤 의미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공동번역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라고 번역을 하였고 메시지 성경은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주니 믿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은데 여전히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오래전에 이재철 목사님께서 믿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화로 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점심으로 자장면을 시켰는데 배달원이 평소에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목사님은 예수님을 본적도 만난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며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어머니가 계시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자 그 어머니가 당신 어머니인 줄 어떻게 아냐 되물었다고 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니 실제로 자신의 친 어머니인 줄 알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비디오로 찍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기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 어머니가 친 어머니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이렇게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며 어머니의 사랑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이 내가 바라는 것들을 보여주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 사랑으로 키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 이전에 만남이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라기 보다 유명하신 목사님의 하나님, 간증 집회의 주인공이신 어느 장로님이나 권사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이 사랑할 이유가 있으니 저렇게 사랑하시겠구나 그저 부러움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나같이 죄많고 하찮은 인간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인의 세 명 중 한 명이 겪는다는 중병을 앓으며 그제야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를 지켜보시고 지켜주시며 나를 사랑하는 줄 뒤늦게 깨닫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서울 왕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아말렉과 전쟁을 치른 후 사무엘 선지자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울왕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바라는 것의 첫째는 하나님을 뵈올 때 부끄럽지 않도록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이 대를 이어 내려갈 수 있도록 자녀들과 손자를 위해 기도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권면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내 주변사람들과 이웃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
주님! 하나님의 말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놀랍고 신묘막측합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기도 하고 혼과 영이 쪼개지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판에 새겨져 어려움을 만날 때 생각나게 하여주셔서 딴 길로 가지 않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