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낙산사, 낙산해수욕장>
밤10시. 청량리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한 해를 시작할 때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면 으레 해돋이나 일출을 찾는다. 거인이 되려 떠나는 나의 여행도 첫출발은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정동진에서의 일출. 수평선 위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의 나약했던 나를 버리고 이미 생존이 되어버린 이 여행에서 살아 남기위해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하는 일종의 서약을 정동진에서 하고 싶었다. 하지만 2시, 3시...깊은 밤의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그만 역을 지나쳐 강릉역까지 오고 말았다. 벌써 이번이 두 번째였다. 다시 되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땐 이미 해가 뜬 뒤라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와 낙산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곧장 낙산사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 낯선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5년 전의 그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 낙산사를 찾아갔다. 낙산관광호텔과 낙산사로 가는 진입로에 이르자 탁 트인 동해바다가 한 눈에 펼쳐졌다. 낙산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을 따라 길게 늘어진 수많은 가게와 음식점, 민박집, 팬션. 분명 5년 전의 그 쓸쓸했던 민박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뒤로 하고 우선 낙산사로 올라갔다. 의상대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想念)에 젖었다가 낙산사의 모태이기도 한 홍련암을 지나 해수관음상에서 짧게 기도를 한 뒤 주위의 경관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낙산해수욕장도 많이 변했지만 이곳 낙산사도 2005년 4월의 산불로 인해 소실되거나 새롭게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나는 오랜 기억을 더듬어 친숙했던 그 길을 되밟아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낯설게 변해 버린 모습에 씁쓸하기만 했다. 사천왕문에서 범종각, 7층 석탑을 돌아 원통보전에 이르기까지 그 길은 짧았던 하루 동안의 기억이었지만 그 온전했던 과거의 길은 나에게 결코 짧은 순간이 아니었다.
2001년 1월. 나는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8시간이 넘는 오랜 기차여행에 나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고 정동진역이 불과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오늘처럼 강릉역에서 내려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강원도에 어디가 유명한지,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뜩 낙산사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낙산사로 향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 입구에 도착한 나는 민박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다음날 절을 찾아갔다. 종무소를 들러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저녁공양과 함께 일반이들이 머무를 수 있는 방에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처음으로 깊은 밤을 절에서 보내게 된 나는 사찰만의 향취(香臭)와 정적만이 감도는 낯선 기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세고 있었다.
똑! 똑! 똑똑똑...
세상은 깨어있지도 않을 1월의 깊은 새벽, 칠흑 같은 어둠을 가로지르는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산사(山寺)의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에 나는 매서운 바람도 잊은 채 멀리서 스님의 도량석(사찰에서 새벽 예불을 하기 전에 도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목탁을 두드리며 7층 석탑을 돌아 조계문을 나서고 범종각을 지나 사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스님을 따라나서는 내 시선은 사뭇 진지하고 경건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범종각에 이르러 동종을 치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덩!~~~
덩!~~~
덩!~~~
속이 비어있는 동종과 바닥의 울림(공명)으로 전해져 오는 소리. 요란한 듯 하면서도 고요하고 가득 찬 듯 하면서도 비어있는 소리. 나는 동종이 우는 순간 내 마음 어딘가에 비어있는 곳, 비어있는 소리를 발견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 적이 없지만 나에게 이미 깨달음이 있는 것. 나는 낙산사 동종을 통해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과연 거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기이한 여행의 화두가 되어버린 의문을 이곳 낙산사와 동종을 통해 다시 한번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영원할 것 같았던 과거의 그 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영원히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과거가...
낙산사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마을로 내려와 백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낙산사의 입구에서부터 백사장이 끝나는 저 아득한 곳까지 우거져있는 송림(松林)과 밀려드는 동해바다의 높은 바도 그리고 철이 지난 가을의 호젓한 오후는 그리움이 밀려드는 시간이었다. 추억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리움에 대한 그리움까지.
동해바다, 겨울바다...바다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기에 그리워질 때면 우리는 바다를 찾는다. 자신만의 바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