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보여주십시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는 젊은 관리원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9월 25일 오후 3시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씨와 기자는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신분증 제시 요구를 받았다. 기자의 한국 여권을 꺼내 보인 뒤 장부에 여권번호를 적어 넣은 뒤에 기념관엘 들어 설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 젊은 관리는 우리를 바라다보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복도처럼 생긴 좁은 전시장 안을 들어서니 이미 들어 와 있는 관람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사실 여권은 한국인인 내 여권만 보여주었다. 관리의 눈에는 "아줌마 두 명이 국적이 같을 것"이라고 여겨졌는지 일본인 작가의 여권 제시는 요구하지 않았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야 도다 이쿠코 씨는 "전에 기념관 개관식 때 일본인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가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일부러 자신의 여권을 꺼내지 않고 내 뒤에 서 있었노라"고 했다. 알고 보니 "사진촬영금지" 지역도 아닌데 젊은 관리인은 우리에게 까다롭게 굴었다. 기념관은 미니 이층으로 되어 있었고 전시공간은 그다지 크지 않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시물은 한국어와 중국어로 적혀 있었는데 입구에서 들어서서 안중근 의사의 흉상이 있는 오른쪽 전시실로 들어서면 왼쪽 벽면 가득히 안 의사의 붓글씨 작품이 전시 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안 의사의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 되어 있다. 이곳을 다 보고 위층으로 오르는 서너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정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유리창 너머가 바로 안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플랫폼이 보이도록 꾸며져 있다. 유리창 너머로 눈을 돌리니 정차해 있는 열차가 보이는 앞 쪽 플랫폼 바닥에 삼각형 표시가 되어 있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삼엄한 러시아 군인들의 사열 속에서 조국을 삼키려는 마수를 처단하려고 이곳에서 기회를 엿보던 안 의사의 초조한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전시장은 유리창 너머의 정경을 말해 주듯 이토히로부미 일행이 플랫폼에서 내리는 흑백 사진이 벽면 가득히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그날의 거사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머문 시간은 단 열하루로 벽면에는 안 의사의 열하루 간 활동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떠난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2일 밤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26일 오전 9시30분 역사 1번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후 뤼순 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하얼빈에서 11일간 머물게 되는 것이다. 거사가 이뤄진 플랫폼과 벽면 가득한 안 의사의 사진을 뒤로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마지막 전시 공간이 복도로 이뤄져 있는데 이곳은 안 의사의 어린 시절과 성장시기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전시물의 시간상으로 보면 안 의사 흉상이 놓인 복도부터 보고 거사현장을 유리창 너머로 본 뒤 마지막 전시장을 보는 것이 순서인데 우리는 거꾸로 본 셈이었다. 하얼빈역 건물과 나란히 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플랫폼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이 인상적인 기념관을 둘러본 도다 이쿠코 작가와 기자는 전시장을 빠져나오면서 사건 당시의 안 의사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안 의사 유적을 찾아 두 번째로 발길을 옮긴 곳은 하얼빈역에서 택시로 10분이 태 안되는 거리인 구 일본총영사관 자리였다. 거사 현장인 하얼빈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구일본총영사관은 현재 화유엔소학교(花園小學校)로 바뀌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후 러시아공사관으로 잡혀 갔다가 이내 이곳 영사관 지하 감방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안 의사를 비롯한 숱한 항일독립투사들이 갇혀서 고문당하던 악명 높은 곳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그날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한 건물의 화유엔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기자가 찾은 날은 무심한 가을 하늘만 높고 청명했다. 이어서 우리가 발길을 옮긴 곳은 조린공원(구 하얼빈거리)이었다. 이곳은 안 의사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고 유언했던 곳으로 현재 안 의사가 쓴 "청초당(靑草塘"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하얼빈공원으로 불리던 시절 안 의사가 거닐었던 이곳 쟈오린공원(兆麟公園)은 중국의 항일투사인 이조린(李兆麟) 장군의 무덤을 이곳에 옮기면서 이름이 바뀐 곳으로 하얼빈역세서 택시로 15분 쯤 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수분하역.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이곳은 중국 쪽 마지막 역으로 이곳을 지나야 러시아 연해주로 갈 수 있다. 숱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다니던 곳이며 안중근 의사도 이 철도로 하얼빈으로 갔다 이곳을 찾은 시각은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시각이었는데 산책 나온 시민들이 괘나 많이 눈에 띄었다. "청초당(靑草塘"이란 글씨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글씨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사령운(謝靈運)이 “연못가에 봄풀이 돋으니, 뜨락 버드나무에서 새들이 우짖는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라고 읊은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안 의사가 기울어가는 국운을 의식하여 봄에 파릇한 풀이 돋듯 조국에도 그런 기운이 돌기를 염원 했던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얼빈에서의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더듬은 도다 이쿠코 작가와 기자는 열차로 5시간 거리에 있는 흑룡강성 목단강(牡丹江, 무단장)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묵은 뒤 이번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수분하(綏芬河, 쑤이펀)로 향했다. 수분하(綏芬河)는 러시아 연해주로 가는 길목으로 중국 쪽의 마지막 열차역이다. 이곳은 안중근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하얼빈 등을 오가기 위해 드나들던 유서 깊은 곳으로 목단강에서 이곳을 지나는 열차 편수가 적어 우리는 버스를 이용해 이곳을 다녀왔다. 흑룡강성 목단강시(牡丹江市)는 흑룡강성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서있고 특히 고층아파트 건설이 눈에 많이 띄었다.도다 이쿠코 작가 뒤로 수분하역 플랫폼이 보인다. 도다 작가 뒤쪽 먼곳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방향이며 반대쪽이 하얼빈으로 가는 방향이다. 수분하역이 내려다 보이는 고가도로 위에서 찍어 수분하역이 아래쪽에 보인다 목단강역 앞의 숙소에서 목단강 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 건물은 이제 막 준공을 마친 듯 꽤 멋진 건물이었으나 이곳을 이용하는 버스의 상당수는 낡은 20인승 승합차였다. 이 승합차로 2시간 여 달려야 국경지대인 수분하(綏芬河)에 도착한다. 수분하로 달리는 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잘 닦여 있었으며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라 그런지 가도가 도 끝없는 도로 옆 숲속 나무들은 어느새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중국 땅에서 러시아 연해주를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했던 동포들이 신발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이곳을 지나는 기자의 마음은 중국의 그 어느 지역에서 보다 마음이 뭉클했다. 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그나마도 나은 사정이었을 것이다. 도로사정이 지금처럼 좋지 않던 그 시절에 타고 갈만한 차편 역시 열악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었을 텐데 유난히 추운 동북지방의 추위와 배고픔을 어찌 견뎠을까 싶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역인 수분하역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항일독립투사들도 이 역을 숱하게 드나들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덜컥 거리는 낡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 두어 시간을 달린 끝에 수분하(綏芬河)에 도착한 우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리는 중국 쪽 마지막 역인 수분하역으로 걸어갔다. 버스터미널과 역이 바로 붙어 있었다. 마침 역 구내로 러시아 쪽에서 달려오던 열차가 수분하 역에서 기적소리를 멈추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다 이쿠코 작가와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목단강을 거쳐 하얼빈으로 달리는 열차의 뒷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힘찬 기적소리를 내고 달리는 열차 속에는 굳은 의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던 수많은 무명의 독립투사 모습이 그려졌고 그 한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담담한 모습도 그려졌다.저녁노을이 완전히 러시아 쪽으로 다 기울도록 일본인 도다 이쿠코 작가와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