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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扶桑)과 부상국(扶桑國) / 잃어버린 발해의 영토
19세기 말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일어나던 때 국내 정세는 너무 어지러워 변경을 돌아 볼 여유도없었다. 그런 때에 미국인 학자들은 아무르강을 유유히 탐험하고 다녔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패전하여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와 강제로 북경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내주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조선은 러시아와 청이 북경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몰랐는지, 이듬해 1861년 경흥부사 이석영이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군이 국경비를 세우는 것을 보고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조선의 영토는 간도, 연해주, 그리고 연해주 북쪽에서 해안을 따라가며 아무르주, 예벤키자치주, 춥지반도, 캄차카반도, 베링해협, 알류산열도까지 였는데 조선 정부의 무능한 대책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옛 발해의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주고 말았다. 혹자는 조선의 동북쪽 영토가 간도, 연해주까지는 그럴듯 하나, 아무르주, 예벤키자치주, 춥지반도, 캄차카반도, 베링해협, 알류산열도까지는 좀 심하지않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그곳에는 우리와 똑 같은 동양인이 살고 있으며 그 종족의 이름은 발해족(渤海族)과 고리악족(高麗岳族 : 고려의 언덕)이다.
심지어 알류산열도의 동쪽 끝, 북아메리카의 알래스카 바로 앞에 있는 아막낙 섬에는 3,000년 전에 사용한 고래잡이 선조들의 온돌 흔적과 고래뼈로 만든 탈, 기타 한民族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 여러 가지가 발견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겠다.
러시아는 17세기에 들어 최초로 이 지역에 나타났으며 그것도 학식을 갖추지 못한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배재대학교 손성태 교수는 1647년 러시아의 코사크인 사냥꾼들이 춥지반도에 최초로 나타났으며 그들이 발해족(渤海族)과 고리악족(高麗岳族)의 기록을 남겼다고하면서 그의 강연에서 자료를 소개했다.
1670년대 그리스 출신 러시아 외교관인 스빠파리가 중국을 여행하고 쓴 책인 '시베리아와 중국’이란 책이 1960년 러시아에서 출간하였으며, 시베리아 출신 지도 제작자인 레메조프는 17세기 후반 지도와 기록을 남겼다.
▲ 러시아가 인식한 조선의 영토는 아무르강 (흑룡강)
아래에 링크한 기사는 이 모든 사실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한러공동_발굴조사성과(아무르강유역에서_발해관련_유적확인).hwp (3.217MB, DN:21)
위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17세기까지만 하여도 러시아인들은 연해주 이북 . 극동지역이 자기들의 영토가 아니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통쾌하다고만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우리땅이라고 주장해도 오히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秉華 박사는 러시아 연해주에 한국의 투자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1989년이래 무려 170여회나 극동러시아를 왕래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州의 하바로브스키, 아무르州의 볼라고베챤스키, 캄챠카州의 페트로파블로브스키, 코략자치區의 팔라나 등을 방문하면서 잃어버린 한民族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한다. 그 곳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 등을 꼼꼼히 둘러보고 확신을 얻었으며 그 동안 러시아를 오가며 가까워진 인사들(푸틴의 측근과 극동러시아 권력층)에게 코략자치區는 한민족의 잃어버린 영토라고 했더니 이들은 남북통일도 못하는 주제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핀잔만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연해주만 투자하지 말고 코략자치區에 한국측에서 인구만 늘려주면 자치구역 부활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길은 열려있는 셈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그 땅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위 기사의 몇 구절을 기록해 두고 그 의미를 되새겨두겠다.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秉華 박사의 2012년 1월 16일 새마을 운동 중앙회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인용문]
보하이족(渤海族)은 누구이고, 코략족(高麗岳族)은 누구인가?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 秉 華
(2012. 1. 16.)
필자는 고고학이나 인류학 또는 민속학 전공자가 아닌 농학자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1989년이래 지금까지 극동러시아를 170여 회를 왕래하면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州의 하바로브스키, 아무르州의 볼라고베챤스키, 캄챠카州의 페트로파블로브스키, 코략자치區의 팔라나 등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 등에서 보고, 읽고, 듣고, 느끼고, 또 이 지역들에서 발굴된 발해인과 후손들의 유적과 흔적의 실체를 보면서 언젠가 이것을 글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 중국 중앙cctv에서 발해국을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고 종속화하는 것을 보면서 우선 정리가 미약한 것이지만 이것이라도 발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용기를 내어 쓰게 되었다.
● 渤海國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기민층은 흑ㆍ백수 말갈족과 거란족 및 기타 소수종족이었다.
극동러시아의 박물관 지도를 보면 보하이族 즉, 발해인들이 세운 발해국 국토넓이는 지금의 남북한 면적(약22만㎢)의 2.7배로, 이는 일본과 한반도를 합한 것과 같은 면적이다.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약 300~500만명 정도일 것이라는 기록이 다수의 문헌에서 나온다.
지배층인 고구려 후예들은 같은 자리에 뿌리내리는 정주(定住)권 생활인 유축(有畜)ㆍ경종 겸업 농업을 하였고, 기민층은 몽골族 등과 유사한 반(半)유목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3갈래로 나뉘어 진다. 소, 말, 양 등 가축을 키우면서 이동하는 종족인 거란族과 백수말갈族이 비중 높은 첫째 갈래이고, 두 번째 갈래는 첫 번째의 일부와 기타 소수종족들이 수렵을 하면서 모피를 팔아 생활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 갈래는 흑수말갈族과 나나이族이 흑수(흑룡江과 아무르江을 지칭)江과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물개, 물범, 고래 등을 잡아 생활하였다.
이들의 대략적인 또 다른 구분은 입은 옷으로 구별하는데, 길쌈으로 옷감을 짜서 입으면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소ㆍ양 등의 가축으로 털옷을 입은 백수말갈族과 거란族들이고, 호랑이ㆍ곰ㆍ사슴 등 야생동물들의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종족은 대부분 소수 기타 종족이거나 극히 일부의 말갈族과 거란族이고, 물고기 껍질과 물개ㆍ수달피 등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면 대체로 흑수말갈族과 나나이族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30여년 후인 서기 698년에 건국된 발해국은 926년 요(遼, 거란의 후예)나라에 멸망하기까지 228년 동안 이들이 사용한 문자는 한자였으나 언어는 고구려語ㆍ말갈語ㆍ거란語ㆍ나나이語 등 4종류로 각기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이로 인하여 「5京 16府62州」의 행정조직을 나누어 통치하는데,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중앙정부와 광역단체, 지방 및 기초단체로 나누어 자치권한을 부여했고, 그 지역의 수장은 한자와 고구려語를 사용할 수 있는 관리가 중앙에서 파견되어 업무를 관장했다.
그런데 발해가 몰락하기까지 228년 동안 지배층의 고구려인들은 이종(異種)인 말갈族, 거란族, 기타 소수종족과 나나이族 등과 교잡(혼인)이 빈번하였다는 것도 다수의 문헌에 나온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후에 그들의 후예들이 발해를 건국했듯이 발해가 멸망하고 반백년인 50여년만에 오츠크해(海)와 베링海 사이의 캄챠카 반도에 이들의 후예들이 모여 ‘고려의 언덕(高麗岳)’이라는 코략마을이 만들어졌다.(코략은 러시아식 이름이다.)
필자는 이것을 살피며 다녔고, 그 동안 조사한 것을 오늘 글로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 코략族의 지배층은 고려쪽을 향하여 제사를 모셨다.
대략 고려 성종 제위시기(981~996년). 잎사귀큰풀(풋콩), 보리, 메밀 등의 농사를 짓는 코략族이 캄챠카에 나타났다. 이들은 발해인과 흑수말갈族과의 혼혈종으로 문자는 한자로, 숫자의 계산은 원주민과 달리 십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에스키모와 유사한 원주민은 5진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내용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중 일부가 돈벌이를 위해 캄챠카에 정착한 사람과 이에 앞서 1948년 북한의 신의주ㆍ함흥 등지의 ‘제2 학생사건(친소신탁통치반대운동)’때 체포되어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캄챠카로 추방당한 사람(18세 전후의 학생)들이 구술한 것인데, 이들은 누구의 지시나 부탁 없이 코략족에 대한 연구를 꽤나 오래한 것 같았다.
필자는 1997년 이후 캄챠카 반도를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이들을 만났고, 그 중 국군포로 몇 명은 한국으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dj정부때 국방부가 거부했다.
이들, 즉 캄챠카로 건너간 사람들(국군포로와 학생사건 연루자들)의 구술을 정리하면 발해가 멸망할 때 살았던 일부가 바닷가를 따라 북으로 가다보니 캄챠카 반도에서 가장 따뜻한 팔라나(이 지역은 오츠크海 동쪽으로 위도는 높지만 난류로 인한 기온이 높아 밀과 보리가 잘 된다)로 거꾸로 내려와서 정착한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었다. 또 코략族의 지배층은 발해유민들과 흑수말갈族들의 혼혈인들이고, 기민층인 피지배자들은 원래 캄챠카에 몽골반점이 형성되는 원주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고 했다. 이렇게 사연 많은 코략族의 샤먼들은 지금도 고려가 있던 방향으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舊소련 스탈린 시절(1930~40년) 코략族은 자치區(州보다 한 단계 아래조직인 郡에 해당)로 승인받았고, 당시 자치區내 인구는 사냥꾼인 러시아인들을 포함하여 약58,000여명이었고, 팔라나 행정도시에는 15,0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코략자치區의 면적은 한반도와 유사(22만㎢)하고, 지금도 경종농업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렵과 연어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푸틴 정권은 코략族이 3만명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자치구역을 해체하여 캄챠카州에 예속시켜 버렸다.
● 코략族의 생활형태는 우리와 너무 닮았다.
지금부터는 사실에 입각한 기록들과 필자가 본 것을 정리해본다.
一. 개고기를 神에게 바치고 의식 후에 같이 나눠먹는데 우리의 육개장과 동일함.
一. 순록과 사슴의 창자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 먹음.
一. 샤머니즘이 매우 강하고 명절과 추석 때 무당이 제사를 집행함.
一. 온돌을 사용하는데 바닥은 돌로 만들고, 벽은 나무로 수직온돌을 만들었음.
一. 결혼 전후 2~3년간 처갓집에서 생활하고 손자는 외할머니가 키움.
一. 서당 같은 곳이 있어 어린이들을 무당(샤먼)이 키우고 공부를 가르침(주로 셈본교육)
一. 결혼식 날 처녀도둑이라고 신랑을 매달아 놓고 발바닥과 궁둥이를 몽둥이로 때림.
一. 순록과 사슴의 뿔을 보약으로 달여먹음.
一. 도둑은 최고의 범죄로 간주하고, 어른들 앞에서는 술과 담배를 돌아서서 마시고 피움.
一. 생선국을 아주 잘 끓이고 잘 먹음.
一. 동물의 젖과 보리를 혼합하여 먹걸리 같은 술을 만들어 먹고, 안주는 생선젓갈을 먹음.
一. 병든 자나 고령자를 격리시켜 죽이는 고려장(高麗葬)과 같은 풍습이 있음.
一. 아기를 등뒤에 업는 것은 우리와 같음.
一. 제사 후 술과 음식을 동서남북으로 뿌리며 고수레를 외침.
一. 어린아이와 여인들은 색동옷을 귀한 것으로 여겨 설 명절 때 입음.
一. 노랫소리가 불경과 같으며 아리, 아이고 등 이리랑 발음이 많음.
一. 나무젓가락을 사용함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연구한 러시아 사학자 일부는 보하이族과 코략族을 혼돈한 사례가 있고, 같은 혈통으로 규정한 학자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푸틴의 측근과 극동러시아 권력층들에게 알려주면서 코략자치區는 한민족의 잃어버린 영토라고 했더니 이들은 남북통일도 못하는 주제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핀잔만 맞았다. 그들은 연해주만 투자하지 말고 코략자치區에 한국측에서 인구만 늘려주면 지금도 자치구역 부활은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자치법령도 그렇게 되어 있다.
大洋제국 대한민국을 위해 잃어버린 역사를 찾으러 캄챠카로 가자! (끝)
추가자료 : 러시아_연해주_식량기지에_관한_보고서.hwp (131KB, DN:)
러시아 연해주 식량기지에 관한 보고서
존경하옵는 분들에게
除禮하옵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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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자료에는 한ㆍ소 및 한ㆍ러 수교 18년이 되는 지금까지 극동러시아 연해주에 남ㆍ북한을 아우르는 식량기지 구축에 대한 남ㆍ북 및 러시아 등 이해 당사자들의 공개ㆍ비공개 추진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애당초 러시아측은 한국에 갚아야 할 차관상환금 14억7천만 불과 연해주 토지(달레네골스크 광산지역)의 교환을 원했으나, 보고자의 판단 잘못으로 무산된 후 러시아 측은 중고 헬기와 탱크 등 군사무기로 차관금을 상환하여 왔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ㆍ북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대가로 6억6천만 불(당시 한화 7천8백억 원)을 탕감해주고 지금은 12억 불(이자포함)만 남았습니다.
다가오는 9월 28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한ㆍ러 정상회담 및 수뇌부 회담 때 러시아는 MB정부에 북한을 달래주는 조건으로 또 탕감을 요구하자는 전략을 “상트페테르부르크派”들에 의해 추진되는 반면에, 극동러시아 “하바로프스크派”들은 12억불로 “고ㆍ러 연해주 농업경제자유지구”를 추진하여 러시아와 남ㆍ북한이 공생하는, 즉 남ㆍ북한 정부에 제3의 식량영토를 할애해주어 극동러시아 주민들의 일자리를 찾고, 남ㆍ북한을 이용한 일본과 중국의 간접 침략을 막자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향후 2012년 APEC 정상회담이 블라디보스톡에서, 2014년 동계올림픽이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러시아는 미국, 중국과 더불어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서 지위가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최근 그루지야 침공에서 본 것과 같이 자국과 이권이 상충될 경우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것이 현재 러시아의 국력이며, 미국도 이를 제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2012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되는 APEC 정상회담 이후의 연해주 가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이 뛸 것이 자명합니다. 흙 속의 진주를 캐는 마음으로 연해주를 선점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민족에게는 건국 이후 처음으로 제3국에 식량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평소에 상기 내용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분들께서는 「한ㆍ러 극동수뇌부 회담」에서 이 문제가 도출 되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남ㆍ북한 식량문제 해결로 한민족의 새로운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참여하시는 여러분들께서는 광개토대왕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깊이 이름을 남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08년 8월 15일
국제농업개발원장 이병화 올림
[인용끝]
러시아 극동지역의 종족 구성원은 발해와 말갈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북극에서 캄차카반도 쪽으로 내려오는 냉기류로 인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순록을 키우며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바다로 나가서 물개와 고래를 잡으며 살았다.
몽골 민족은 12세기에 나타나 말을 타고 서쪽으로 정복 사업을 펼치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방대한 영토를 넓히며 위세를 떨친 민족이다. 그들은 원래 유목 생활을 하였으므로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가기가 쉬웠지만 나라를 잃은 발해인들은 몽골과는 다르게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몽골민족 처럼 유목민이 되기는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백두산이 폭발하고 말갈족이 난을 일으키자 속수무책으로 발해는 무너졌다.
발해가 멸망하자 난민들은 어디론가 떠나야했으므로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려에 귀순했으며 일부는 그곳에 남아 말갈족과 동화 되었다.
발해의 정체성을 잃지않으려는 수 천명의 난민들은 이상향의 세계을 찾아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캄차카반도까지 흘러갔다. 수 백년 전 부터 전설로만 전해오던 부상국을 찾아서 떠난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발해의 고래잡이 어선들과 콩을 싣고 일본까지 실어나르던 선원들이 동해 끝에 부상국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수 천 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신세계를 찾아 떠나가는 우두머리가 있었다면 그의 마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bc8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