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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란 무엇인가 : 이제 권력에서 권위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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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권위란 무엇인가? - 미하일 바쿠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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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10.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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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란 무엇인가?
What is Authority?
Written: 1871
Online Version: Essays by Bakunin and Bakunin Internet Archive, marxists.org 1999
English Transcribed: Unknown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는 물리적·사회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서로 관계맺고 앞으로도 계속되기 위해 필수적인 자연법인가? 즉 어찌할 수 없는 힘인가? 확실히, 우리가 자연법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기란 금지된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연법을 오해하거나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우리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조건과 기반을, 자연법이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감싸고, 또 관통하고,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한다. 사유와 행동 모두에서, 심지어 '우리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때에도, 우리는 단지 그것의 전능함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맞다. 우리는 완벽히 자연법의 노예다. 하지만 자연법 아래서의 노예생활에는 어떠한 굴욕도 없다. 혹은, 그건 전혀 노예의 생활이 아니다. 노예는 외부의 주인을, 바깥에서 노예를 향해 명령하는 입법자를 상정하는데, 자연법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법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존재 전체를, 물리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구성한다. 우리는 산다, 우리는 숨쉰다, 우리는 행동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바란다, 오직 이 법을 거쳐서만. 이 법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 법에 대항할 힘과 희망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법과의 관계에서 그러나 단 한 가지 자유는 인간에게 가능하다. 그가 추구하는 집단적이면서 개별적인 인간 해방이라는 목적에 들어맞도록 점점 더 큰 규모로 자연법을 인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 법은, 한번 인식되면, 지금껏 인간 집단에 의해 반론된 적 없는 권한을 행사한다. 2 더하기 2는 4가 되는 법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바보이거나, 신학자여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형이상학자거나, 법학자, 부르주아 경제학자라도 되야 한다. 누군가, 물에 젖은 것도 아닌데 불에 타오르지 않는 상상을 믿으려면, 그 상상이 다른 어떤 자연법에 기반한다는 기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연법에 대한 이러한 봉기, 혹은 시도, 즉 불가능한 봉기에 대한 바보 같은 공상은, 분명히 예외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 집단은 그들의 일상에서 상식의 지배를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일반적인 법의 총합에 불과한데- 거의 절대적인 추종 속에 인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불행은, 과학에 의해 이런 식으로 수립된 아주 많은 수의 자연법들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오직 사람들의 안녕(the good)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함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수호자 같은 이 정부가 신중함을 발휘한 덕택이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물리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처럼 필수적이고, 불변하고, 치명적이며, 인간 사회의 발전과 엮여 있는 자연법의 주된 영역은 과학으로서 제대로 정립되고 인식되지 않았다.
감춰져 있는 자연법들이 과학에 의해 인식되면, 이내 과학으로부터, 대중 교양(education)과 교육의 확장된 시스템을 통해, 모두의 의식 속으로 전달되고, 자유에 대한 문제는 온전히 해결될 것이다. 가장 완고한 당국이라도 자연법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여기에는 정치 조직체, 명령, 입법 어느 것도 필요치 않으며, 이 세 가지는 그것이 군주의 의지에서 나오든, 일반 투표에 따라 선출된 의회의 표결에서 나오든, 자연법의 체계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며(그러나 그랬던 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외부적이고 따라서 독재적인 그런 법들의 체계를 강요(impose)한다는 점에서, 이것들은 언제나 대중들의 자유(liberty)에 치명적이고 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유(The Liberty)는 오직 자연법에 있다. 인간은 자연법에 복종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자연법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무엇이건, 즉 성스럽건 세속적이건, 집단적이건 개별적이건, 어떤 외적 의지에 따라 외부에서 자연법이 그에게 부과되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지식있는 학술원을 생각해보자, 그 학술원은 과학계의 가장 저명한 대표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학술원은 사회를 조직하며, 조직을 위한 입법을 담당한다고 가정해보고, 또 오직 진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만 영감을 받으며, 오직 법을 형성(frame)하는데, 근래 과학 분야의 발견들과 절대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만을 만들어 낸다고 가정해보자.
글쎄, 나로서는 그와 같은 입법과 조직은 괴기스러운 것이 되리라 주장하는 바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로, 인간의 과학이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며, 과학이 발견해낸 것과 발견해내야 하는 것을 비교해볼 때, 여전히 과학은 그 요람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가능성은 허용하지 않을 만큼 엄격히, 개별적인 만큼 집단적으로, 인간의 삶을 최신의 과학에 합치시키려면, 우리는 사회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마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올려 놓고 순교자적 고통을 받으라 선고해야 한다. 사람들의 뼈는 탈구되고 숨도 쉬지 못해, 과학보다 무한히 큰 것으로 남아 있을 삶 마저 이내 끝장 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과학원에서 제정된 법에 복종할 사회란, [사람들이] 이러한 법제의 합리적(rational) 성격 자체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렇다면 학술원의 존재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해 없이도 공경의 대상이 되는 과학이란 이름을 이 법이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의 것이 아닌 짐승들의 것이 되리라. 이는 파라과이를 굴복시킨 예수회 정부 선교자들의 둘째 판이 될 것이다. 급속하고 분명하게, 최저 수준의 우매함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부가 가능치 않게 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주권을 행사하게 된 학술원은 그곳에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어김없이 그리고 이내 자체의 도덕적-지적 부패에 의해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학술원들의 역사다. 오늘날의 학술원에는 고작 몇 안되는 특권만이 주어져 있을 따름인데도 그러하다. 과학계의 위대한 천재일지라도, 그가 학술원의 일원이 되는 순간부터,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학자가 되는 순간부터, 피할 수 없이 나태함과 자만에로 미끄러진다. 그는 비틀거리는 낡은 세계를 부수고 신세계의 기초를 놓기 위한 자로 호명되었던 자신의 자발성, 혁명적 강인함, 절륜한 천재들의 특성인 문제적이고 흉포한 에너지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사유의 강력한 힘으로부터 잃었던 것을 이내 공손함 속에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지식 속에서, 그는 다시 얻는다. 한마디로 그는 부패한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죽이는 것이 특권의 성격이자 모든 특권적 지위가 갖는 성격이다. 실용적이든 경제적이든, 특권을 가진 자는 마음과 정신이 타락한 자다. 이것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법칙이며, 계급, 기업, 개인들에게 적용되듯이 전 국가에 적용된다. 이것은 자유와 인류애를 위한 최상의 조건인, 평등이라는 법칙이다. 이 소론(小論)의 본디 목적은 사회 생활의 모든 징후 속에서 이 진리를 정확하게 증명해내는 것이다.
사회의 통치를 위임받은 학문 기구(scientific body)는 더 이상 과학(science)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일에 전념함으로써 이내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다른 일이란, 모든 기성 권력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사회가 그 볼일(care)을 자신에게 위탁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정부를 필요로 하고 방향 설정을 필요로 하게 만듦으로써 학문 기구 자신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학술원의 경우에서 참인 것은 모든 조직의 경우, 심지어 보편적 참정권에 의해 선택받은 의회의 경우에도 참이다. 의회가 그 구성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몇년 안에 법적 특권은 아니라지만 특권을 지닌 정치인들의 모임(body)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국가의 공사(公事)를 자신이 감독하려 헌신할 것이고, 결국 일종의 과두정이나 귀족정이 만들어진다. 미국과 스위스가 그 증인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외적 입법도 외적 권한도 없어야 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와 분리되지 않고, 둘 모두 사회를 노예화 상태로 입법자들을 타락으로 기울인다.
이로부터 내가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올까?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신발에 문제가 있을 때, 나는 신발 제작자의 권위를 참조한다. 집, 운하, 철도에 관한 문제에서, 나는 건축가나 기술자의 의견을 구한다. 이런 저런 특수한 지식을 다룰 때 이런 저런 학자들[의 말]을 적용해본다. 하지만 나는 신발 제작자나 건축가나 학자가 내게 그들의 권위를 강요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지성, 그들의 성격, 그들의 지식에 정당한 모든 존경을 표하며, 비판과 비난할 수 있는 나의 자명한 권리를 잠시 유보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자유롭게 듣는다. 어느 분야에서건 하나의 권위가 말하는 것에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 권위의 말을 들어본다. 그들의 의견을 비교해보고, 가장 건전하게(soundest) 보이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결코 틀리지 않을 권위 같은 건 없음을 안다. 아주 특수한 문제를 다룰 때라도, 그리고 내가 정직하고 신실한 존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나는 어떤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나의 이성에, 나의 자유에, 나의 일을 완수하는 데 치명적이 될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나를 바보같은 노예로, 타인의 이익과 의지에 이용되는 도구로 전락시킬 것이다.
만일 내가 전문가의 권위 앞에 고개 숙이고, 내게 필요해 보이는 만큼, 전문가의 지시나 심지어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스스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문가의 권위가 누군가로부터, 혹은 인류나 신의 이름으로 내게 강요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전문가들을 겁줘 쫒아내고, 악마로 하여금 그들의 권고, 그들의 지시, 그들의 도움, 무엇이든 그들이 내게 값을 지불하게 만든, 나의 자유와 자존(self-respect)을 댓가로 던져준 겹겹의 거짓 속에 둘러싸인 한 조각 진실의 찌꺼기들을 다시 가져가게 명령할 것이다.
나는 전문가의 권위를 따르는데, 바로 나 자신의 이성이 그러하라 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 지식의 세부사항, 긍정적인 발전, 어느 큰 부분도 파악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불능을 의식하고 있다. 가장 위대한 지성이 곧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기에 산업과 마찬가지로 학문도 노동의 분업과 연대의 필요성이 따른다. 나는 받고 또 준다.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다. 각자가 지휘하고 또 지휘받는다. 그리하여 고정되고 지속적인 권위란 없으며, 상호적인, 일시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자발적인, 권위와 복종의 잇따른 교환만이 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고착되고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보편적인 사람 같은 건 없다. 어떤 사람도 모든 세부 사항을 다 알 수 없으며(이러한 세부사항 없이는 과학을 인간의 삶에 적용할 수 없다) 모든 학문,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를 다 알 수는 없다. 만일 그러한 보편성이 한 개인에게서 실현되고, 우리에게 자신의 권위를 강제하여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회 밖으로 내쫓길 것이다. 그의 권위는 다른 모든 사람을 노예와 무능력자로 만들테니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 사회가 천재들을 혹사시켜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천재들을 지나치게 멋대로 두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으며, 천재들에게 어떠한 배타적 권리와 특혜도 주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첫째, 사기꾼을 천재로 착각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둘째, 특혜에 기반한 체제에서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일지라도 사기꾼으로 변할 수 있으며, 오히려 천재의 기세를 꺾고 그를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배타적 권리와 특혜 자체가 우리의 지배자가 되어 버릴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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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상에 번역이 하나 떠돌아 다니는데, 읽을 수 없는 문단이 많아 새로 옮겼습니다.
가능하면 금주내로 바쿠닌의 간략한 전기와 아나키즘 실전압축요약 포스팅도 하나 올려보겠습니다.
권위란 무엇인가
입력 : 2023.08.11 20:13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의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최고점을 경신하고 금메달을 딴 후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극기 훈련, 그걸 ‘그냥 했다’는 말에 모두 감동받았다. 반면 나는 ‘그냥 하는’ 사람의 정반대에 있다. 매번 생각을 하고, 그냥 하라고 하면 열받아 한다.
생활스포츠 지도사 자격증 연수를 받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왜 몸을 움직이면 놀림받고, 시험 성적이 잘 나오면 부러움을 샀지? 태어나 보니 몸을 잘 움직이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고, 글을 읽는 것은 한 번도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는 체육시간을 ‘헐어’ 자습을 했고, 운동을 원래 잘해서 운동부가 된 애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30대가 다 되어서야 여성학을 공부하며 몸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를 이해했고, 사교육 기관·헬스장에서 운동을 배웠다. 일반인, 특히 소수자에게 생활체육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문하며 몸의 감각이 달라지며 보이는 것을 탐구했다. 이거 엄청 재밌잖아?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운동할 수 있길 바랐다.
최근 한 웹툰 작가가 학부모로서 특수교사를 고소한 사건을 둘러싼 여론은 작가의 아이, 다른 급우들, 교사 각각의 권리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지형 위에 있다. 교사가 말과 행동으로 아이에게 피해를, 아이는 문제 행동으로 교실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줬고, 이것이 각각 권리 침해라는 것이다. 교사에겐 교권, ‘교사의 권리’가 없는 게 문제라고도 한다. 그런데 교권이 학생들을 ‘그냥’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이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요즘 듣는 연수에서 한 선생님은 이랬다. “옛날 선수들은 통제적인 훈련을 참고 견뎠지만, 요즘은 안 돼요. 자율성을 발휘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다음엔 이랬다. “요새 다 평등하려고 하잖아요? 근데 가르치려면 확실한 서열이 있어야 됩니다.” 강의실엔 혼돈의 기류가 흘렀다. 강의 끝에 선생님이 질문을 시키니까, 누군가 겨우 손을 들고 말했다. “지금 두 가지 다른 얘기를 같이하셔서 헷갈리는데요?”
지금 문제는 권리가 아닌 권위다. 권위는 정당성이 있는 권력이고, 정당성은 가치에 대한 사회의 합의에서 나온다. 시키는 대로 하면 성공 엔딩을 보는 공략법이 있을 때, 시키는 사람은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전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잘 안됐다. 그러면 요즘은 이런다. “진작 알아서 했어야지.”
교육이 ‘화이트칼라’가 되는 지름길, 학교가 상위 명문 학교를 보내는 통로였을 땐 교사가 학생을 때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체육 못하는 학생을 버리고 가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던 학교 밖에서, 체육 내신까지 필요한 입시 학생에겐 줄넘기 과외를 붙이면 된다. 인생은 한 번뿐인 게임인데, 부모가 ‘알아서’ 뚫는 공략 루트엔 학교의 역할이 없다.
얼마 전 수영장 할머니들을 만났다. 우리는 초급반에서 반년간 수영을 같이하다 헤어져 반년을 따로 수영했다. 접영 배우셨어요? 아니, 아직. 접영은 나도 아직이었다. 별 성과 없이도 수영을 계속하는 우리에게 이 사회는 관심이 있나? 권위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뭔가에 권위를 줬다가도 뺏는 우리의 욕망은 어떤 가치를 향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