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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상(世)의 맥(脈)에 대한 미혹(惑)을 교정(矯)하는 변별(辨)
(왕석산(汪石山))
대개 맥(脈)이란 영(營)과 위(衛)에 본(本)하니, 영(營)은 맥(脈)의 속(:中)을 행(行)하고 위(衛)는 맥(脈)의 겉(:外)을 행(行)하느니라.
만약 장부(臟腑)가 화평(和平)하고 영위(營衛)가 조창(調暢)하면 맥(脈)에 논의(議)할만한 형상(形狀)은 없느니라. 혹자(或者)가 육음(六淫)에 외습(外襲)되거나 칠정(七情)에 내상(內傷)되면 장부(臟腑)가 불화(不和)하고 영위(營衛)가 괴류(乖謬: 어그러지고 잘못되다)하므로 24맥(脈)의 명(名)과 상(狀)이 겹쳐서(:層疊) 나타나느니라(:出見).
따라서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는 육음(六淫)이니라. 육음(六淫)에 외상(外傷)한 맥(脈)에서, 부(浮)하면 풍(風)이고, 긴(緊)하면 한(寒)이며, 허(虛)하면 서(暑)이고, 세(細)하면 습(濕)이며, 삭(數)하면 조(燥)이고, 홍(洪)하면 화(火)이니라. 이는 모두 맥(脈)으로 외감(外感)된 사기(邪)를 구별(別)할 수 있는 것이니라.
희노우사비공경(喜怒憂思悲恐驚)은 칠정(七情)이니라. 칠정(七情)에 내상(內傷)한 맥(脈)에서, 희(喜)하면 심(心)을 상하여 맥(脈)이 완(緩)하고, 노(怒)하면 간(肝)을 상하여 맥(脈)이 급(急)하며, 공(恐)하면 신(腎)을 상하여 맥(脈)이 침(沈)하고, 비(悲)하면 기(氣)가 소(消)하여 맥(脈)이 단(短)하며, 경(驚)하면 기(氣)가 난(亂)하여 맥(脈)이 동(動)하느니라. 이는 모두 맥(脈)으로 내상(內傷)된 병(病)을 변별(辨)할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는 단지 그 상(常)만 든(:擧) 것으로, 맥(脈)과 병(病)이 상응(相應)하는 경우를 말하느니라.
만약 그 변(變)까지 논(論)한다면, 맥(脈)이 병(病)과 응(應)하지 않거나 병(病)이 맥(脈)과 응(應)하지 않으면 그 변(變)이 백단(百端)으로 나오니, 일일이 맥(脈)에만 의지(:憑)하기에는 어려우니라.
잠시 한두 가지만 들고자(:擧) 하니라.
장중경(張仲景)이 말하기를 "맥(脈)이 부대(浮大)하면 사기(邪)가 표(表)에 있으므로 한(汗)할 수 있다." 고 하였으나, "만약 맥(脈)이 부대(浮大)하면서 심하(心下)가 경(硬)하고 열(熱)이 있어 장(臟)에 속(屬)한다면 이를 공(攻)하여야 하지 발한(發汗)하면 안 된다." 고 하였으니, 이처럼 '부(浮)는 표사(表邪)이므로 한(汗)할 수 있는 맥(脈)이다.'는 것은 아니니라.
또 말하기를 "촉맥(促脈)은 양(陽)의 성(盛)이니 마땅히 갈근황금황연탕(葛根黃芩黃連湯)을 사용(用)하여야 한다." 고 하였으나, "만약 맥(脈)이 촉(促)하고 궐냉(厥冷)하면 허탈(虛脫)이니 구(灸)나 온(溫)이 아니면 안 된다." 고 하였으니, 이처럼 '촉(促)은 양(陽)이 성(盛)한 맥(脈)이다.'는 것은 아니니라.
또 이르기를 "지맥(遲脈)은 한(寒)이고 침맥(沈脈)은 리(裏)이다."고 하였으나, "만약 양명(陽明)의 맥(脈)이 지(遲)하면서 불오한(不惡寒) 신체즙즙한출(身體濈濈汗出)하면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사용한다." 고 하였으니, 이처럼 '모든 지(遲)는 한(寒)의 맥(脈)이다.'는 것은 아니니라.
또 말하기를 "소음병(少陰病)을 처음 얻었을 때 도리어 발열(發熱)하고 맥(脈)이 침(沈)하면 마땅히 마황세신탕(麻黃細辛湯)으로 한(汗)한다." 고 하였으니, 이처럼 '침(沈)은 리(裏)에 있는 맥(脈)이다.'는 것은 아니니라.
대개 이들은 모두 맥(脈)에만 다 의지(:憑)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에 대한 분명(明)한 징험(驗)이니라.
만약 단지 맥(脈)만 의지(:憑)하고 증(證)을 묻지 않는다면 한(寒)을 열(熱)이라고 하고, 표(表)를 리(裏)라고 하며, 음(陰)을 양(陽)이라고 하는 것(:잘못)을 면(免)할 수가 없으니, 전도(顚倒)하고 착란(錯亂)하여 사람의 수(壽)를 요(夭)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라.
따라서 고인(古人)들이 병(病)을 치(治)할 때 그 맥(脈)에만 전념(專)하지 않고 반드시 그 증(證)을 겸하여 살폈으니(:審), 진실로(:良) 그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세인(世人)들은 이에 밝지(:明) 못한가? 왕왕(往往) 병(病)을 숨기고(:諱) 말하지 않으면서 오직 진맥(診脈)으로만 의사(醫)의 능력(能) 여부(否)를 시험(試)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맥(脈)을 보게 하여 말하는 것이 우연(偶)히 맞다면 곧 양의(良醫)로 보고 마음을 기울이고(:傾) 그 치료를 부탁(付托)하느니라. 병(病)의 근원(根源)에 대해서는 하나도 말(:告)하지 않고 약(藥)의 마땅함(:宜) 여부(否)에 대해서도 살피지 않으면서 오직 속수무책(束手)으로 의사(醫)의 명(命)만 들으려고만(:聽) 하니, 이로 인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러도 여전히 깨닫지(:悟)를 못하느니라.
심(深)히 슬픈(:悲) 일이로다!
평범(:庸俗)한 사람들은 평소(素) 배우기(:學)를 즐겨하지(:嗜) 않으므로 진실로 족히 괴이(怪)할 것도 없겠지만, 어째서 요즘(:近世)의 사대부(士大夫) 집에서조차도 이런 관습(習)에 매여(:狃) 이를 면(免)하지 못하는가? 이 또한 정말 가소(可笑)로운 일이로다!
"정정안려(定靜安慮) 격물치지(格物致知)"는 대학([大學])의 첫 장(章)에 나오는 제일(第一)의 정의(義)이니라.
'려(慮)'란 사(事)에 대하여 정밀(精)하고도 상세(詳)하게 사려(慮)하는 것이니라. '격물(格物)'이란 사물(事物)의 이치(理)에 궁극(窮)으로 이르는(:致) 것이니라. '치지(致知)'란 자신이 아는 것을 극(極)으로 추구(推)하는 것이니라.
대개 이와 같은 수많은 일(:事)들을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일찌감치 여기에 그 마음을 궁구(究)하여야 하느니라.
선현(:先正)들이 또 말하기를 "사람(:人子)들을 위하는 자는 의(醫)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병(病)으로 침상(床)에 누운(:臥) 사람들을 돌팔이(:庸醫)들에게 위임(委)한다는 것은 불자(不慈)하거나 불효(不孝)하는 것에 비(比)할 수 있다." 하니라.
대개 망문문절(望聞問切)은 의가(醫家)의 사람들에게 절목(節目: 중요한 조목)이니라. 하물며 병(病)에 임(臨)할 때 오직 절진(切)으로만 병(病)을 아는 것이 능(能)한 것이고 그 나머지 세 가지 일(: 곧 望聞問)에 대해서는 일절(一切) 제쳐두고(:置) 익히지(:講) 않는다면 이를 어찌 의(醫)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사(事)에 처(處)하여 정밀(精)하고도 상세(詳)함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사물(事物)의 이치(理)에서 궁극(窮)에 이르고(:致), 자신이 아는 바를 궁극(極)까지 추구(推)하였다고 하겠는가?
또한 양의(良醫)라도 할지라도 '진단(診)을 잘한다.'는 한 마디(:一節)에만 전념(專)해서도 안 되느니라. 대개 동정(動靜)에 항상(常)이 있고 행동거지(擧止)에 망령(妄)되지 않으며, 심(心)이 충후(忠厚)하고 발언(發言)에 둔독(鈍篤: 돈독)하며, 병(病)을 살필 때 상세(詳)히 살피고(:審), 처방(處方)에 정미(精)하게 전념(專)하여야 하니, 이 몇 가지를 겸(兼)하면 가히 양의(良)라 말할 수 있느니라.
비록 맥(脈)에 근거(據)하여 증(證)을 말할 때 혹 오차(差)가 적다하여도 한 맥(脈)이 주(主)하는 것이 한 병(病)인 것이 아니므로, 말하는 바가 반드시 모두 맞는(:中) 것은 아니니라. 만약 이로 인하여 따라서 (맥을) 버린다면 소위 '계란(卵) 두 개 받은 잘못으로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다)의 장수(將)를 버린다(:棄).'는 것과 같으니, 어찌 지혜로운(智) 자와 더불어 말한다(:道) 할 수 있겠는가?
잠시 부맥(浮脈)으로 말하자면 맥경([脈經])에 이르기를 "부(浮)는 풍(風)이거나 허(虛)이거나 기(氣)이거나 구(嘔)이거나 궐(厥)이거나 비(痞)이거나 창(脹)이거나 만(滿)하여 불식(不食)이거나 열(熱)이거나 내결(內結) 등의 류(類)이다." 하였으니, 주(主)하는 병(病)이 수십(數十) 가지보다 적지는(:下) 않느니라.
만약 진(診)하여 부맥(浮脈)을 얻었다 하더라도 이를 무슨 병(病)으로 단정(斷)할 것인가? 하물며 망(望) 문(聞) 문(問)을 겸(兼)하지 않고도 무슨 병(病)인지 정합(:的)하게 알려 한다면 나도 그것이 헷갈려서(:戛戛 서로 어긋나다) (알기) 어려우니라.
고인(古人)들은 절진(切)을 망진(望) 문진(聞) 문진(問)의 뒤에 두었으니, 망(望) 문(聞) 문(問)을 하는 사이에 이미 그 병정(病情)을 얻고, 다시 그 맥(脈)을 진(診)하여 병(病)에 응(應)하는지 응(應)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에 불과(不過)하였느니라. 만약 맥(脈)과 병(病)이 응(應)한다면 길(吉)하여 의(醫)하기가 쉽겠지만, 맥(脈)과 병(病)이 반(反)한다면 흉(凶)하여 치(治)하기가 어려우니라.
맥(脈)으로 병(病)을 참조(參)하는 의미(意)가 이와 같다면 어찌 진맥(診脈)으로만 병(病)을 아는 것이 귀(貴)하겠는가? 대개 맥경([脈經])이라는 일서(一書)는 사람들에게 진법(診法)에 대해 간절하게(:拳拳) 보여주었으니(:示), 책을 펼쳐(:開卷) 그 첫 머리(:首)에 들어가면 곧 "관형(觀形) 찰색(察色)과 서로(:彼此) 참고(:參伍)하여 사생(死生)을 결(決)하여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이로 망(望) 문(聞) 문(問) 절(切)은 의(醫)에서 하나라도 결(缺)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느니라.
아! 세상에서는 '맥(脈)을 잘 보는 것은 숙화(叔和)보다 나을(:過) 수 없다.'고 칭(稱)하는데, (그도) 피차(彼此)를 서로 참조(:參伍)하기를 기다렸거늘(:待), 하물며 숙화(叔和)보다 그 아래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참고하여야 하느니라.) 따라서 전적(專)으로 절맥(切脈)으로만 병(病)을 말하면 반드시 잘못에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양의(良醫)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抑) 이 뿐만 아니라, 세인(世人)들은 태소맥([太素脈])으로 사람의 귀천(貴賤)이나 궁통(窮通)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심(甚)히 망령(妄)된 것이니라.
내가 예전에(:嘗) 그 의미(:義)를 상고(考)하여 보니, 대개 '태(太)'는 시작(始)이고 처음(:初)이니, 마치 태극(太極)이나 태을(太乙)의 태(太)와 같으니라. '소(素)'는 바탕(:質)이고 근본(本)이니, 마치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한 후에 한다)한다는 소(素)와 같으니라. 이로 (태소맥이란) 시초(始初)의 본질(本質)의 맥(脈)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처럼 과연 무슨 맥(脈)이어야 하는가 하면 곧 반드시 원기(元氣)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라. 동원(東垣)이 이르기를 "원기(元氣)란 위기(胃氣)의 별명(別名)이다." 하니라. 위기(胃氣)의 맥(脈)이란 채서산(蔡西山)이 말한 "장(長)하지도 않고 단(短)하지도 않으며, 소(疏)하지도 않고 삭(數)하지도 않으며, 대(大)하지도 않고 소(小)하지도 않으니, 손에 중화(中和)하게 응(應)하고 마음(:意思)이 기쁜 모양(:欣欣)으로 그 모양(狀)을 무엇이라 이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한 그것이니라.
무병(無病)한 사람들은 모두 이 맥(脈)을 얻느니라.
이 맥(脈)으로 사람의 유병(有病) 무병(無病)을 살피는 것은 가능(可)하지만, 이 맥(脈)으로 사람의 부귀(富貴)나 빈천(貧賤)을 살필 수는 없느니라.
왜 그러한가?
위기(胃氣)의 맥(脈)은 형용(形容)하기가 어려워 그 모양(:狀)을 이름(:名)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귀천(貴賤)과 궁통(窮通)을 진단(診)할 수 있겠는가?
그 서(書)를 언뜻(:竊) 보았는데, 그 명(名)은 비록 태소(太素)라고 하였지만 그 속의 논(論)들은 사람을 미혹(迷)하게 하였고, 태소(太素)의 의미(: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거의 언급(言及)하지 않았으며, 만들어진 그 가괄(歌括: 싯구)들은 대부분 속된(:俚) 말들이 많았고, 전혀 이치(理)에 미치지(:趣) 못한 것이었느니라. 원래 처음의 의도(意)는 이것(: 태소맥)을 빌어서(:托) 그들의 이익(利)을 탈취하려는(:徼) 수단(:媒)에 불과(不過)한 것이었는데, 후세(後世)의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도 않고 결국 관습적(習)으로 서로 전(傳)하므로 인해 (나중에는) 그 잘못됨을 변(辨)할 수가 없게 되었느니라.
또 혹자(或)가 말하기를 "태소(太素)라고 말하는 것은 생(生)의 초(初)에 품부(:稟)한 귀천(貴賤) 궁통(窮通)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맥(脈)으로 살펴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맥(脈)의 이름이 태소(太素)란 것은 아니다." 하니라.
내가 말하느니라.
진실로 그렇다면 태소(太素)를 진(診)한 것은 절대로 24맥(脈)을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대개 24맥(脈)은 모두 병(病)을 주(主)하니, 이는 어떤 맥(脈)이 보이면 어떤 병(病)을 주(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빈천(貧賤) 부귀(富貴)은 무엇으로 살필 수 있다는 것인가?
가령 부맥(浮脈)을 진(診)하여 풍(風)일 경우, 만약 태소가(太素家)가 진(診)하면 그것을 풍(風)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귀천(貴賤)이나 궁통(窮通)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두 가지를 겸(兼)할 수는 없느니라. 만약 이를 풍(風)이라고 말한다면 아는 바가 병(病)에 불과(不過)하지만, 만약 병(病)은 놔두고 이것을 귀천(貴賤) 궁통(窮通)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가까이 있는 신(身)의 병(病)도 알 수 없으면서 어찌 태소(太素)를 말할 수 있겠는가? 멀리 몸(:身)에서 벗어난(:違) 것들은 결코 알 수 없느니라.
대개 귀천(貴賤) 궁통(窮通)은 신(身)의 바깥(:外) 일(:事)이고 신(身)의 혈기(血氣)와 서로 상간(相干)되지 않으니, 어찌 맥(脈)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맥(脈)의 변화(變)은 무상(無常)하게 나타나느니라. 천(天)의 한서(寒暑)가 한결같지 않으므로 사시(四時)에 각각 그 맥(脈)이 달라지니, 반드시 오래도록 변(變)하지 않을 수가 없느니라. 따라서 금일(今日) 진단(診)하여 이 맥(脈)을 얻었다 하여도 명일(明日) 진단(診)하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고, 춘(春)에 진단(診)하여 이 맥(脈)을 얻었다 하여도 하(夏)에 이르러 짚으면(:按) 그것이 혹 아닐 수도 있느니라.
태소(太素)는 맥을 잠시(:片時) 찾아 짚어서(:尋按) 일생(一生)의 길흉(:休咎)을 단정(斷)하는데, 결코 그러한 이치(理)는 없느니라.
한편 멋대로(:縱) 억측(:臆則)하여 누차(屢) 맞을(:中)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바람을 묶어두거나(:捕) 그림자를 붙잡아두려는(:捉) 것과 그 형용(形容)이 비슷(:彷佛)하니, 어찌 일정(一定)한 견해(見)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아! 맥(脈)으로 병(病)을 살펴도 병(病)을 정확히(:的) 모르므로 오히려 망(望) 문(聞) 문(問)을 기다려야(:待) 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또 맥(脈)은 황제(黃)와 기백(岐)에서 시작(:兆)되었고, 편작(:秦越)이 부연(演)하였으며, 숙화(叔和)가 상세(詳)하게 하였느니라. 소문([素問]) 난경([難經]) 맥경([脈經])을 두루 고찰(考)하여도 이에 대한 것은 한 글자(:字)도 언급(言及)되지 않았느니라. 이는 감추려고(:隱) 한 것이 아니라 결코 거짓으로(:誣) 할 수 없는 것들이니라.
소씨(巢氏)가 이르기를 '태소(太素)는 관상(相)을 잘 보는 법(法)인데, 단지 태소(太素)를 빌려 그 기술(術)을 신묘(神)하게 한 것일 뿐이다.' 하였느니라.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천하(天下) 후세(後世)의 미혹(惑)됨을 파괴(破)하기에 족(足)하도다!
또 남을 엿보면서(:伺) 잘 살피는(:察) 자는 말로 사람을 꾀어서(:餂) 몰래(:陰) 그 실재(實)을 얻어내려고 하므로 진맥(:診按)할 때 함부로(:肆) 말을 하면서 기망(欺妄)하려 하느니라. 이러한 하등(下等)한 자와는 족히 논(論)할 것이 없느니라.
비록 그러하지만 사람은 천지(天地)의 기(氣)를 품(稟)하여 생(生)하므로, 청탁(淸濁)과 순박(純駁: 순수하거나 섞임)의 차이(:殊)가 없을 수 없느니라.
품부(稟賦)가 청(淸)하면 혈기(血氣)가 청(淸)하고 맥(脈)이 또한 청(淸)하게 오니, 청(淸)하면 맥(脈)의 형(形)이 원정(圓淨: 원만하고 깨끗)하고 이르는(:至) 수(數)가 분명(分明)하느니라. 내가 이로 진(診)한다면 단지 주(主)로 그 부귀(富貴)만 알 뿐이지, 만약 어느 해(:年)에 과거에 합격(:登料)하고 어느 해(:年)에 승진(:陞授)하며 어느 해(:年)에 재물이 들어오고(:招財) 어느 해(:年)에 자손을 얻는지(:得子)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느니라.
품부(稟賦)가 탁(濁)하면 혈기(血氣)가 탁(濁)하고 맥(脈)이 또한 탁(濁)하게 오니, 탁(濁)하면 맥(脈)의 형(形)이 청(淸)하지 못하고 이르는(:至) 수(數)가 혼란(混亂)하느니라. 내가 이를 진(診)한다면 단지 주(主)로 그 빈천(貧賤)만 알 뿐이지, 만약 어느 때(:時)에 후회(悔)를 초래(招)하고, 어느 때(:時)에 재산이 파하며(:破財), 어느 때(:時)에 처를 잃고(損妻), 어느 때(:時)에 자식을 잃는지(:剋子)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알 수 없느니라.
또 형(形)은 탁(濁)하지만 맥(脈)이 청(淸)한 경우도 있으니, 이를 탁(濁) 중의 청(淸)이라 말하느니라. 질(質)이 청(淸)하지만 맥(脈)이 탁(濁)한 경우도 있으니, 이를 청(淸) 중의 탁(濁)이라 말하느니라.
또 형(形)이 심하게 청(淸)하지 않고 맥(脈)도 심하게 탁(濁)하지 않으며, 단지 부침(浮沈)에서 각각 그 위(位)를 얻고 대소(大小)가 균등(等)함을 잃지 않으면, 이 또한 평온(平穩)을 주(主)하므로 크게 상(喪)하지는 않을 것이니라.
이 외에도 그 말에 미진(未盡)한 경우, 그 의미(:義)에 미비(未備)한 경우들이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이로 유추(類推)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곧 내가 말하는 '사람을 아는 것은 온전히(:十) 하나의 이치(理)에 근본(本)할 뿐이다.' 는 것이니라. 어찌 감히 함부로 말을 하여(:說) 사람을 속일(:欺) 수 있겠는가?
아! 내가 이 논(論)을 지은(:著) 것은, 대개 세상(世)에서 태소맥(太素脈)을 말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같이(:翕然) 이(:태소맥)를 미화(美化)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니, 이는 이치(理)로 분석(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을 이끌어(:延) 이를 예찬(:譽)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함부로 잘못(:謬)이 있다고 말하면 또한 반드시 암암리에(:陰) 위곡(委曲: 잘못)되게 영향(:影射)을 주려 하니, 이는 소위(所謂) '나를 그르치게(:誤) 하고 남도 그르치게(:誤) 한다.'는 것이니, 과연 무슨 유익(益)이 있겠는가?
또 의사(醫)를 맞이하여(:迎) 약(藥)을 복용(服)하는 사람들이 먼저 그 아픈 곳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甚至) 2~3번 물어보아도(:詢叩) 끝내 묵묵(黙黙)히 그 질병(疾)을 숨기고(:隱) 의사(醫)를 곤란(困)하게 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그러면 의사(醫)도 진실로 곤란(困)하겠지만, 환자 자신(身)도 또한 의(醫)하기가 곤란(困)하다는 것을 생각(:思)하지 못하느니라.
이는 모두 세상(世上)에서 같이(:通) 앓으면서(:患) 사람들이 공유(共有)하는 바이므로, 내가 어쩔 수 없이 상세(詳)히 논(論)하여 그 간곡(:丁寧)한 뜻(:意)에 이르게 하였느니라. 이것으로 귀가 멀고(:聾) 눈이 먼 자들(:瞽)을 혹시 일깨울(:開發) 수 있을까 하노라!
맹자(孟子)도 이르기를 "내가 어찌 변별(辨)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나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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