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시대는 중국 역사상 사상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공자, 맹자, 노자 등 제자백가들이 등장해 자신의 학파를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중국 전역을 주유했다. 이때 태동한 여러 사상들은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에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를 일컫는 춘추전국 시대는 사회 전반에 큰 변혁이 일어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종법적 봉건제가 붕괴되고, 사회적으로는 씨족 질서가 해체됨에 따라 혼란과 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는 문화, 특히 사상적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였다. 이것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으로 가능했으며, 이들에 의해 중국의 전통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기존 질서가 붕괴하면서 각 제후국들은 독자적으로 주 왕조를 제치고 천하를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를 품기 시작했다. 이에 각국 군주들은 급변하는 정세에 맞춰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재를 등용했다. 엄격한 신분 질서에 금이 가자 귀족들은 더 이상 혈연을 신분 보장제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신분 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개인의 능력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게다가 자신들의 사상으로 변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길 원했던 제자백가가 자신의 학파를 전파하는 데 애쓰면서 학문의 기회가 평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이로써 제자백가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제자백가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들을 펼치고자 제후국들을 떠돌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제자들은 서책을 편찬하고, 자신의 사상을 민간에 전파하기도 했다. 당시 제자백가는 과거 상주 시대의 신비주의, 주술과 마력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인 사상을 펼쳤다. 즉 인간 삶에서 신을 분리하고, 인간의 의지가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불완전하기는 했으나 자연의 원리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최소한 하늘을 신과 동일시하거나 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인식했다. 제자백가의 인간 중심 사상은 어떻게 해야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제자백가가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자백가는 자신들의 사상으로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자백가의 제자와 백가는 수많은 학자와 학파를 의미하지만, 기록에는 약 14개 정도가 남아 있다. 제자백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史記)》에 나타나며,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는 《사기》의 기록에 더하여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를 포함하고 소설가(小說家)를 더했다. 또한 병서가(兵書家), 수술가(數術家), 방기가(方技家), 병가(兵家), 의가(醫家) 등도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제자백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들 제자백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사회와 인간의 삶에 대한 사상과 학문을 제기했고, 같은 학파조차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들을 보였다.
유가 학파를 성립한 공자 춘추 시대 공자가 창시한 유가는 인의와 예악을 중심으로 하며, 전국 시대 맹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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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시작은 유가의 창시와 맞물린다. 유가는 춘추 시대에 공자(孔子)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을 중심으로 한 교화를 주장했다. 여기서 인의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예악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공자는 주로 인간의 삶을 이끄는 데 치중했다. 유가는 춘추 시대의 증자와 자사, 자하를 거쳐 전국 시대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맹자가 공자의 인(仁) 사상을 계승하여 정치를 이끄는 데 치중했던 반면, 순자는 예(禮) 사상을 계승하여 후에 법가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법가는 한비자(韓非子)가 신불해(申不害)와 신도(愼到), 상앙(商鞅)의 학설들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유가가 제창한 인의와 예악의 교화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법가는 오로지 법률을 치국의 기준으로 삼았다. 여기서 법은 만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문법의 일종으로, 모든 사람들은 이 법을 존중해야 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상벌을 동시에 진행하여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는 군주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는데, 그것이 술(術)과 세(勢)이다. 술은 군주가 신하에게 임무를 주고 그것을 감독하는 것으로, 상벌이 존재했다. 또한 세는 군주가 권위와 세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군주는 반드시 도덕적으로 완벽할 필요가 없으며 군주의 권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협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법가는 강력한 통치력을 원하는 군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유가에 이어 묵적(墨翟, 묵자)에 의해 묵가가 일어났다. 묵자는 유가에서 학문을 시작했지만, 유가에 대한 실망으로 독자적인 일파를 일구었다. 묵가는 겸애(兼愛), 상동(尙同), 상현(尙賢), 비공(非攻), 비유(非儒), 비악(非樂) 등으로 요약된다. 묵자는 세상이 모순되고, 혼란스럽고,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서로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해결책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겸애를 주장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남을 공격하지 말라는 비공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신분을 세습할 것이 아니라 능력이 뛰어나고 어진 이가 사회적 지위를 누려야 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상현과 상동이다. 또한 수공업자 출신이었던 묵자는 당시 귀족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치가 심했던 예악을 반대했다. 특히 그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장례 비용을 줄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묵가는 당시 정세에 비추어 개혁적이고 극단적인 면이 있어 위정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유교, 도교, 불교가 하나임을 의미하는 송나라 시대 그림 유가, 도가 사상은 후대에 이르러 일부가 종교화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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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는 묵가가 어휘에 대한 엄격한 개념 규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에서 비롯된 일종의 논리학이다. 명가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에 의해 발전했는데, 혜시는 장자와 여러 차례 변론을 펴기도 했다.
도가는 노자가 창시했으며, 장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도가는 유가, 법가와 달리 모든 형식적인 것들에 반대하여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의 존재와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무위(無爲)를 통해 통치하는 자를 현명한 통치자로 여겼으며, 이상적인 국가를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원시적 공동체로 삼았다.
한편 종횡가는 외교술을, 잡가는 제자백가를 집대성했고, 농가는 농업 기술을, 소설가는 문학 창작을, 병가는 군사 사상을, 음양가는 현학 사상을 주로 연구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학파를 선전했다. 유가 사상의 공자와 맹자는 노나라를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했으며, 도가 사상은 초나라에서 유행했고, 묵가 역시 각지로 흩어졌다. 또한 각 학파는 자신의 학설을 전파하기 위해 저서 편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의 저서 대부분은 본인이 쓴 것이 아니며 제자들에 의해 저술, 편찬된 것이 많았다. 활발한 제자백가의 저술 활동은 후에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맹자》, 《장자》, 《한비자》, 《좌전》의 문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ㆍ 기원전 551년 : 유가를 창시한 공자가 탄생하다.
ㆍ 기원전 320년경 : 공자의 사상을 접하고 감화된 맹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다.
ㆍ 기원전 233년 :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가 생을 마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