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3. 23
이제껏 삼성 라이온즈가 배출한 홈런왕은 세 명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스물다섯 번의 시즌에서 그 세 명이 차지한 홈런왕 트로피는 무려 열 개나 된다. 이승엽이 다섯 번, 이만수가 세 번, 그리고 김성래가 두 번이었다. 그들 외에 한국에서 두 번 이상 홈런왕을 차지한 선수는 김봉연, 김성한, 장종훈 그리고 박경완까지 네 명 뿐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곧 한국 홈런타자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름들 중에서 김성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그에 대한 기억은 대개, '노장의 투혼'이라거나 '재기의 몸부림' 같은 기사제목들과 연관되는 것이기 쉽다. 그리고 2할8푼에 못 미치는 통산타율과 한 해 열 개에도 못 미치는 평균 홈런 개수는 그런 기억을 뒷받침한다.
▲ 김성래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그는 골든글러브(4회), 홈런왕(2회), 타점왕(1회) 그리고 정규리그 MVP 등 각종 수상 트로피로 거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특급 선수였다. 그러나 그런 업적들은 그의 길었던 선수생활 열 일곱 해 중에서 불과 네 시즌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앞과 뒤로 길게 늘어선 13년은 그에게 극기와 재기의 피땀을 요구했던 고단한 세월들이었다.
짧은 기간에 세운 각종 수상 기록
1984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온즈 지명을 받은 김성래는 실업야구 한일은행을 선택했다. 당시 장효조와 이만수로 이어지는 타선에 서정환마저 밀어내고 김성래의 대학시절 포지션이었던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한국 프로야구사상 첫 사이클링히트의 주인공 오대석까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 팀에 들어가 봐야 출전기회조차 잡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위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 수술비를 대기 위해 1,2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무대로 돌아선 김성래는, 채 수술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곁을 맴도느라 데뷔 시즌을 망치고 말았다. 그 해 39경기에 나선 그의 타율은 0.186. 혹시나 했던 팀의 기대마저 허물어뜨리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른 김성래는 85년 개막을 앞두고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김영덕 감독은 그 방망이를 활용하기 위해 유격수 대신 2루수로 훈련할 것을 지시했다. 185cm의 대형 2루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해, 그는 0.283의 타율에 13개의 홈런을 때려내 중심 타자감으로 떠올랐다.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은 2루수 기용이었지만, 수비력도 수준급 이상이었다. 그의 큰 키와 긴 팔은 높이 뻗어나가는 안타성 타구를 숱하게 걷어내 감탄을 자아냈고, 단신 선수에 비해 부족한 민첩함은 담백하고 무리 없는 연결동작으로 채워 넣었다.
그렇게 일단 떠오르자 김성래의 상승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해마다 타율이 올랐고 홈런이 늘었다. 83년부터 3년 연속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쓸어갔던 정구선을 밀어내고 김성래는 86년부터 3년간 2루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독차지했다. 특히 87년에는 0.332의 높은 타율에 22개의 홈런을 날려 홈런왕에 올랐고, 88년에는 장효조를 앞지르는 0.350의 타율을 기록해 최강 타선의 정점이 된다. 그 해 0.459였던 출루율은 리그 최고였다.
프로 초기 '거침없이 하이킥'
▲ 80년대 중반의 전설적 클린업트리오. 이만수-장효조-김성래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그러나 1988년 시즌 막바지인 9월 6일 타이거즈 1루수 김성한과 충돌하며 쓰러진 김성래는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충돌 순간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망가진 무릎은 제대로 달릴 수도, 단단히 땅을 딛고 방망이를 휘두를 수도, 그리고 그라운드에서 타구에 빠르게 반응해 몸을 날릴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그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더구나 89년에는 강기웅이 입단했다. 역대 최고의 2루수라는 강기웅은 그 자체로도 강적이었지만, 이미 선배 오대석을 밀어내고 유격수로 안착한 유중일과 가장 완벽한 호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해로부터 3년간, 김성래는 두 경기 건너 한 번쯤 대타로나 불려나왔고, 그나마 1할대 타율의 헛방망이질을 거듭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사이 그의 나이도 서른을 넘겼고, 사람들은 너무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저물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혀를 차곤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미국에서 무사히 무릎 수술을 마친 뒤, 부진했던 몇 년 사이 완전히 2루에 자리를 굳힌 강기웅을 피해, 그리고 이미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든 체력 부담을 피해 1루수로 옮긴 그는 92년, 많은 타석은 아니었지만 0.292의 타율을 기록해 재기의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1993년. 그는 5년 만에 3할 타율에 복귀하며 28개의 홈런으로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른다. 그 뿐 아니라 91개의 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했고, 1루수로서는 처음이자 통산 네 번째로 골든글러브 주인공으로 뽑혔다. 그리고 그 모든 활약을 종합해 그 해 정규리그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빛나는, 그러나 짧았던 그 두 번째 전성기를 보낸 그에게 다시 찾아온 것은 허벅지 근육통이었다. 홈런은 14개로, 3개로 다시 줄어들었고 타율 역시 2할대로, 다시 1할대로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삼성은 그에게 코치 연수를 권했지만 그는 선수로 남기를 고집했다. 결국 삼성은 그를 자유선수 신분으로 방출해버렸고, 그는 마지막 선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향했다.
김성한과 충돌 후 내리막길로
▲ 김성래 / ⓒ 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그러나 세 번째 전성기는 끝내 오지 않았다. 부상의 회복은 더뎠고, 그 사이 체력은 떨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팀은 사상 초유의 비극적인 운명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98년과 99년, IMF 한파 속에서 공중분해의 길로 내몰리던 레이더스는 투타의 핵인 조규제, 김현욱 그리고 김기태와 박경완을 팔아 남긴 돈으로 선수단을 운영했다. 칼은 부러지고 화살도 떨어졌는데, 말은 지쳐 쓰러졌고 적들은 이미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김성래는 그 아득한 때, 암담한 곳에서 기둥이 되어야 했다. 레이더스 마지막 해였던 99년, 그는 5년 만에 100경기 이상 붙박이로 출전해 0.272의 타율에 9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그는 이미 무너진 대열의 맨 앞에서 끝내 무릎 꿇지 않고 저항했던 레이더스의 마지막 용장이었다.
2001년, 레이더스 선수들을 대부분 흡수했던 신생팀 SK는 체질개선을 위해 21명이나 되는 선수들을 방출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 와중에 박정현과 박재용, 김정수와 강병규가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 해 마흔을 넘어서던 김성래 역시 길고 긴 열 일곱 해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17년이라는 긴 선수생활 속에서 불과 4, 5년 동안만 빛나는 활약을 보여준, '꾸준하지 못한' 선수. 그래서 화려한 업적에 비해 오히려 존재감이 크지 않은 선수. 그러나 무심한 눈에는 '기복'이고 '부진'에 불과했던 시간들이 그에게는 '불운'이었고 '질곡'이었으며 '재기의 몸부림'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10년이 넘는 회복과 재기의 투혼이 있었기에 여러 차례 부상과 불운에도 눈부신 두 번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은식 (punctu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