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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앰 댓 하권 1. 의식이 솟아나면서 세계가 솟아오른다.
문: 보통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M: 그 사람 믿음에 따라 되지. 죽기 이전의 삶이 상상에 불과하듯이 죽음 이후의 삶도 역시 그러하다네. 꿈이 계속되는 것이지.
문: 그러면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M: 깨달은 사람은 죽지 않아. 왜냐하면 그는 태어난 적도 없으니까.
문: 타인들에게는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M: 그 사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아. 그는 내면적으로, 물질적으로, 물질적인 사물들로부터 자유로와.
문: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죽은 사람의 상태를 아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선생님 자신의 전생을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M: 내가 스승을 만날 때까지는 아는 게 무척 많았는데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 왜냐하면 지식이라는 것은 오직 꿈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야. 난 나 자신을 알고, 나의 내면에서는 삶과 죽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존재만 본다네.
그러나 마음이 기억의 창고에서 이끌어 내어 상상을 시작하는 순간, 공간은 대상으로 가득해지고 시간에는 사건들로 가득해진다네. 난 지금 이 생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과거 생에 대해서 어찌 알겠나? 그 자신이 움직이면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을 창조하여 과거와 미래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야.
전 우주가 의식 속에 잠겨 있는데 이 우주 의식은 완전한 질서와 조화가 있는 곳에서 생겨난다네. 그러니 자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내용물이 중요한 게 아닐세. 자네 자신의 자각을 깊이 하고 넓히면 모든 축복이 거기서 흘러나올 걸세. 자넨 스스로 뭔가를 구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노력 없이도 자네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지.
다섯 개의 감각과 기억, 사고, 이해, 개성의 네 가지 마음 작용 그리고 지수화풍(地水火風) 및 에테르라는 다섯 가지 요소, 그리고 물질과 영혼이라는 창조의 두 측면, 이 모두가 자각 속에 들어 있는 거야.
문: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전생을 믿으시겠지요?
M: 경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는데 난 그에 대해선 전혀 몰라. 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알 뿐이야. 그 이전도 그 이후도 나타날 모습도 나의 체험 속엔 없어. 기억 못 하는 게 아니야. 사실상 기억할 게 아무것도 없어. 환생이라는 것은 가아(假我)가 환생한다는 뜻이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게 없어. "나"라고 불리는 기억과 희망의 다발이 자신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상상을 하면서 자신의 허위의 영원성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만들어 낸 거야.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필요하지 않아.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 상상에서 생겨난 거야. 난 상상을 하지 않으니까 출생도 사망도 내겐 생겨나지 않아. 자기들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다시 태어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자넨 내가 이전에 태어났었다고 나를 몰아세우고 있는데 난 죄가 없다고 항변하고 싶네. 모든 것은 자각 속에 존재하고 자각은 죽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않아. 그것은 변화 없는 진실 그 자체니까.
그러나 체험되는 우주는 몸과 더불어 태어났다가 몸과 더불어 죽는 것이야. 그것은 자각 속에 시작과 끝을 담고 있지만, 자각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몰라. 만약 자네가 그 점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해 보면 자각의 빛을 아주 또렷이 볼 수 있을 것이고 세계가 자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것일세.
초와 연기를 먼저 보는데, 불의 초점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더미 같은 양초를 다 태우고 온 우주를 연기로 가득 채울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우리들의 본성도 시간과는 관계없이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그 무한한 가능성은 소진되지 않아. 양초에 비유하자면 초는 몸이고 연기는 마음인 셈이야. 마음이 스스로 번잡스러움으로 바쁠 적에는 자신의 출처를 알지 못해. 그러다가 스승이 와서 관심을 내면의 불꽃으로 돌린단 말이야. 마음이란 놈은 원래가 바깥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것이야.
그것은 언제나 사물들의 근원을 바깥의 사물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내면의 근원을 찾으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새 인생의 시작이야. 그렇게 해서 자각이 의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데 의식 속에서는 의식하고 있는 "나"가 있지만, 자각은 나누어지질 않으며 자기 자신을 알고 있어.
또 내가 있음은 하나의 생각인 반면 자각은 생각이 아니야. 자각 속에서는 "난 알고 있다."가 없어. 의식은 하나의 속성이지만 자각은 그렇지 않아. 의식하고 있음을 자각할 순 있지만 자각을 의식할 순 없어. 하나님은 의식 전체인데 반해 자각은 모든 것을 넘어서 있으므로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 있는 것이지.
문: 저는 사람의 사후 상태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육신이 스러지고 나면 그의 의식은 어떻게 됩니까? 오감을 가지고 갑니까? 아니면 뒤에 두고 갑니까? 그리고 만약 그가 오감을 잃어버리면 의식은 어떻게 됩니까?
M: 감각이라는 것은 지각의 여러 방식일 뿐이야. 지각의 거친 상태들이 없어지면 더 섬세한 의식 상태가 나타나게 되지.
문: 죽고 나면 지각에는 변화가 없습니까?
M: 의식에서 자각으로의 변형은 있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자각이라는 것은 의식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야. 의식은 더 섬세하고 정교해질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바로 죽음 뒤에 생기는 일이야. 사람들의 여러 가지 소통 수단이 없어지면 그에 의해 생겨난 의식의 양식들도 역시 없어지게 돼.
문: 오직 무의식만이 남을 때 말입니까?
M: 자넨 지금 마치 무의식이 뭔가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무의식을 의식할 자가 어디에 있나? 창문이 열려 있기만 하면 방에는 햇빛이 비쳐들게 마련이야. 또 창문이 닫히더라도 태양은 여전하지. 그런데 그 태양이 방 속에 어둠을 볼 수가 있나? 태양에게 어둠 같은 것이 있나? 무의식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무의식이라는 것은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우리가 무의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기억이나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을 때의 일이야.
내가 반응을 멈추면 아마 그때 자네가 날 더러 무의식이라고 그러겠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의식이 또렷했을 거야. 다만 기억을 되살려 말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문: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40억 정도(1970년대)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 모두가 죽을 것입니다. 그들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의식은 계속됩니까? 그리고 또 만약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계속됩니까? 제 질문이 틀렸다거나, 답을 모르신다거나, 또 선생님의 세계에서는 제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말씀 마십시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세계와 제 세계가 다르고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그 순간 벽이 생기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의 체험은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M: 물론 우리는 하나의 세계 속에 살고 있어. 단지 난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자네는 그러지 않을 뿐이야. 자넨 자신이 세계 속에 있다고 보지만 내 보기엔 세계가 내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 자넨 자신이 나고 죽겠지만 내게는 세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네. 우리들의 세계는 실재하지만 세계에 대한 자네의 견해는 그렇지 않은 것이야. 우리들 사이의 벽은 자네가 만들지 않으면 없어.
감각에는 죄가 없어. 감각이 인간을 오도한다는 것은 자네의 생각일 뿐이야. 그 생각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가리고 있는 거야. 다시 말하면 세계가 자네 자신과 독립해 있으면서 자네의 선천적 후천적 행동양식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가린단 말이지. 지금 자네의 태도 속에는 깊은 모순이 있는데 그걸 자네가 보지 못하고 있어. 그게 바로 슬픔의 원인이야. 자넨 자신이 고통과 슬픔의 세계에 태어났다는 생각에 묶여 있어. 내가 알기로는 세계는 사랑의 창조물이야. 세계의 시작도 성장도 완성도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러나 난 사랑조차도 넘어서 있어.
문: 만약 선생님께서 사랑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왜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합니까?
M: 옳은 말이야. 하지만 그건 육신의 관점에서 본 것이지. 그러나 자넨 육신이 아니라구. 자넨 광대무변한 의식이야. 사실이 아닌 가정을 하지 말게. 그리해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 아닌가. 괴로움과 즐거움,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의 모두가 상대적인 용어일 뿐이야. 그걸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그 용어들은 제한되고 일시적인 것들이야.
문: 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깨달은 사람은 전 우주에 관한 자유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을 지배하며 거기에 개입하면서 인과의 사슬을 바꾸어서 일의 순서를 바꿀 수도 있고 심지어는 과거조차 없던 일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는 여전히 그와 함께 돌아가지만 그 속에는 자유롭다고 합니다.
M: 지금 자네가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야. 물론 우주가 있으려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없으면 안 돼. 그러나 난 그 둘 모두를 넘어서 있다구. 왕을 찾고 있는 어떤 나라가 있었네. 마침 적합한 사람이 있어서 왕을 시켰지. 하지만 실제의 그는 전혀 변하지를 않았어. 단지 왕이라는 타이틀과 권리 및 의무만을 부여받았을 뿐이지. 그의 기질은 아무 변화가 없었고 오직 그의 행동만이 변했어.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해. 의식의 내용은 급격한 변화를 겪지만 존재는 오도되지 않아. 왜냐하면 그는 변함없는 뭔가를 아니까.
문: 불변의 뭔가가 의식될 수는 없습니다. 의식은 언제나 변화하니까요. 불변의 그것은 의식 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M: 맞기도 하고 그르기도 해. 종이는 글이 아니지만 글을 실어준다네. 잉크도 글의 내용이 아니고 읽는 이의 마음도 글 내용이 아니지만 그 둘이 합쳐지면 하나의 메시지가 가능해지지 않나?
문: 의식은 실재에서 내려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물질적 속성입니까?
M: 의식 그 자체는 물질의 미묘한 상대물이야. 불활성(타마스)과 에너지(라자스)가 물질의 속성들인 것처럼 조화(사트바)는 의식으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네. 매우 미묘한 에너지의 한 형태로 여겨도 좋겠지. 물질이 하나의 안정된 유기체로 조직화 되는 곳에는 의식이 저절로 나타나게 되지. 그 유기체가 파괴되면 의식은 사라지고.
문: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M: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물질과 의식이 오직 그것의 한 측면일 뿐인 바로 그러한 것이 남는다네.
문: 만약 그것이 물질과 의식을 넘어선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체험될 수 있습니까?
M: 아름다움과 축복 속에서 알 수 있다네. 그러나 육신과 의식 모두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일세.
문: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는 의식이 있으십니까, 무의식이십니까?
M: 깨달은 이는 그 어느 쪽도 아니야. 그러나 그의 깨달음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네. 자각은 모든 체험을 담고 있지. 그러나 알고 있는 그는 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어. 그는 자각 그 너머에 있으니 말이야.
문: 물질이라는 경험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체험하는 자를 일러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둘 사이의 가교는 무엇입니까?
M: 그 사이의 간격이 바로 가교가 되지. 한편에서는 물질로 보이고 한편에서는 마음으로 보이는 그것 자체가 바로 연결점이 되는 것일세. 실재를 마음과 몸으로 나누질 말라구. 그리하면 연결점 자체가 없어. 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야. 세계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일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그 모두의 근원이 되는 것이지. 즉 자네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것을 알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문: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M: 오직 봄(seeing)만이 있는 것이며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일세. 차이가 없는 곳에 차이를 만들지 말게.
문: 저는 원래 죽은 사람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죽은 이의 기대와 믿음에 따라서 그의 체험이 형성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M: 자넨 인간이기 전에 스스로 하나의 계획을 세워서 그에 따라 살기로 했지. 그 의지가 바로 자네의 운명의 골간이라네.
문: 필시 업이라는 놈이 개입했겠지요.
M: 카르마를 만드는 것은 환경이고 태도는 자네 자신의 것일세. 궁극적으로 보면 자네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자네의 성격이며 그 성격을 만드는 것은 오직 자네 자신일 뿐이야.
문: 바람직한 성격은 어떻게 형성합니까?
M: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현재의 성격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느끼면 되지. 그렇게 전체적으로 보고 전체적으로 느끼는 것이 기적을 낳는다네. 이것은 동상을 만드는 것과 비슷해서 쇠만으로도 불만으로도 되지 않고 주형(鑄型)만으로 되지 않아.
쇠를 불로 녹여서 주형 속에 넣어야만 되는 게 아니겠나?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