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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초상.
정충신은 노비였지만 임진왜란 때 능력을 인정받아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도 정2품 포도대장에 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서산 진충사 소장
정충신(1576~1636)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과거에 당당히 합격해 벼슬이 정2품 형조판서에 이른 인물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정충신은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가 노비였다. 어미의 신분을 따르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그 역시 노비가 됐다.
그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유년기부터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다. 늙은 기생이 절도영(節度營·병영) 잔치에서 음식을 가져와 건네자, 정충신은 뜻밖에도 "남은 음식을 남에게 먹일지 언정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라며 뿌리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광주목사였던 권율이 의주로 파천한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지만 선뜻 사지로 나갈 지원자가 나서지 않았다. 17세의 정충신이 자원해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1556~1618)이 정충신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자신의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그해 가을 의주에서 치러진 무과시험에서 그는 놀랍게도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한다.
그 직후 정충신은 이항복의 주선으로 선조를 직접 알현하는 영광도 갖는다. 인재를 아꼈던 선조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아직 어리니 좀 자라면 크게 쓰리라"며 인물됨을 치하했다. 정충신은 결코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정충신이 거만해 명사들도 함부로 대했다고 적었다. 병자호란때 주화론을 이끈 최명길(1586~1647)은 "정충신이 교만하고 무례하다고 하지만 그의 장점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두둔했다.
1900년대초 촬영한 상전과 하인.
조선은 엄격한 신분사회이지만 신분상승의 기회가 원천차단됐던 것은 아니다. 정충신, 반석평은 천민이었는데도 신분의 굴레를 벗었다. 사진 캘리포니아디지털도서관.
고전은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뤄낸 입지전적 인물도 다루고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유명한 노비 반석평의 일화도 소개한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이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으며 반 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 입양도 시켜줬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반면, 재상집은 재상이 죽은 뒤 몰락한다.
어느날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나고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스스로 실토 하면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가상하게 여겨 후히 장려하고 국법도 파기했다. 이에 대해 유몽인은 "우리나라의 인재는 중국의 천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데도 이들 가운데 신분이 천한 자는 벼슬을 못하게 견고히 막고 있으니 이는 사대부들이 편협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남이장군을 모함해 처형하고 또한 연산군 시절 대규모 옥사를 만들어 많은 선비들을 죽인 유자광(1439~1512)은 희대의 간신이라는 오명이 늘 따라다닌다. 그는 서얼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중종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됐다.
어떤 계기로 반정에 참여하게 된 걸까. 조선말 사관을 지낸 김택영(1850~1927)의 <한사경>에 따르면, 전 이조판서 성희안이 장군 박원종, 이조판서 류순정과 함께 거사를 꾸미면서 사전에 이런 사실을 유자광에게도 알린다. 모사꾼으로 알려진 유자광이 반정 사실을 폭로했다면 조정에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뻔했다.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보기에도 연산군의 폭정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유자광은 반정에 적극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거사 당일 군대를 이끌고 연희궁에 머물던 연산군을 포위해 거사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사필귀정. 대간들의 집중적 공격을 받아 훈작을 삭탈당한뒤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74세의 나이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유연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김생 글씨 탁본.
김생은 비록 출신은 미천했지만 우리나라 서예가 중 가장 명필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역대 서예가 중 최고의 명필은 누구일까. 고전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단연 신라 사람 김생이었다. 김생 역시 집안이 미천했다. 하지만 글씨로서 중국에서 이름을 드높였다.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중국인들이 서성(書聖)으로 추앙하는 왕희지와 동급에 올렸던 김생이 마땅히 신품의 제1인자로 꼽혀야 한다"고 했으며,
원나라 최고의 서예가 조맹부(1254~1322)가 쓴 <동서당집고첩발>은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창림사비 발문은 자획이 대단히 전형적이어서 어느 당나라 사람의 이름난 비각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생이 711년(신라 성덕왕 10) 태어났고 부모가 한미해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서술돼 있다.
아버지 강희제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부강한 시대를 만들었던 청나라 5대 옹정제(1678~1735)의 스승은 조선인이었다. 바로 김상명이다. 그는 정묘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의 후손이었다.
심노숭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김상명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예부상서(예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김 씨 집안은 중국에서도 명문대가로 성장했다. 그는 스스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조선인이 쓴 병풍을 제사 지낼 때 사용하려고 조선에 병풍 제작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국에서는 아무도 병풍의 글씨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글씨로 이름난 윤순이 거절했고 이어 판서 이만성의 종이었지만 뛰어난 글씨 솜씨를 지닌 이태해마저 거부했다. 이태해는 "차마 붓을 잡고서 오랑캐의 병풍을 쓰지 못하겠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결국 사자관(寫字官·궁중의 문서를 정서하는 하급 관료)에게 쓰도록 했다. 중국에 가서 청황제의 스승까지 됐지만 소중화주의에 빠져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그를 오랑캐라며 천시했던 것이다.
중국인 쌍기는 고려 4대 광종(925~975·재위 949~975) 때 과거제를 처음 시행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쌍기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제현의 <역옹패설>은 쌍기와 고려 학자들 사이의 불화 사실을 언급한다.
고려사 열전 쌍기조
이에 따르면, 쌍기는 중국 후주 사람으로 광종 7년(956)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병을 얻어 머무르다 귀화했다. 광종은 호족 출신의 공신들을 견제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교적 신진관료 집단이 필요했다.
광종은 958(광종 9)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설치했으며 쌍기를 지공거에 임명해 과거를 관장토록 했다. 쌍기는 노비안검법(노비해방법) 등 일련의 개혁정책 추진에도 핵심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쌍기의 중용에 공신들은 노골적 불만을 드러냈으며 쌍기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한다.
특히 시무28조를 통해 고려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승로(927~989) 마저 쌍기를 마뜩지 않게 여겼다.
최승로는 고려의 6대 성종(960~997·재위 981~997)에게 상소를 올려 "우리나라가 중국의 풍속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영전(令典·아름다운 법도)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선비를 쓴다지만 큰 선비는 얻지 못했다"고 중국 학자를 기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역옹패설>은 "최승로의 상소가 쌍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쌍기는 광종의 전폭적인 지지로 한때 고려조정에서 주목 받았지만 그 역시도 소수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끝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12. 황제의 스승이 된 조선인, 고국에선 오랑캐로 차별받다[실록밖의 인물評3]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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