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디모데후서 3장 1~5절
박병식 목사(송파 제일교회 원로 목사)
고후7: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대로 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죄를 보면 그 마음에 근심이 일어납니다. 그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게 합니다. 회개가 구원의 어떤 조건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그대로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 마음에 근심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슬픔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죄를 보시는 대로 목회자도 자신의 죄를 봅니다. 깨어 있으면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보시는 것과 동일하게 자신도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에 근심과 슬픔이 일어납니다. 그 근심과 슬픔은 목회자로 반드시 회개하게 합니다. 목회자가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동안 이런 회개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라는 말씀에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불신자들인가 혹은 신자들인가? 본문에는 불신자들에게 맞지 않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2절에서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말씀입니다. 불신자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없습니다.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경건의 모양도 없고, 물론 경건의 능력도 없습니다. 말세에만 아니라 어느 때든지 불신자들의 모습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사람들을 신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어 타락해가는 모습을 말세의 징조라고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의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이후에 다시 동일한 죄를 범했을 때 다시 반복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히10:17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시103:12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합니다. 롬8:1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사43:25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사44:22은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를 심지어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하신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죄를 반복 계속 범했다고 해도 반복 회개하고 반복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할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중대한 죄를 범했음을 안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6:6).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아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시38:4-8). 다윗은 분명 반복 회개하였으며 반복 사죄를 간구하였습니다.
말세란, 교회 시대를 의미합니다. 교회 시대의 끝에 주님이 오십니다. 교회 시대에는 죄악이 극성하기 때문에 이를 고통하는 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에 죄악이 극에 다르고 있습니다.
20종의 죄목은 스스로 가진 죄(계1장~2장), 다른 사람에게 대한 죄(계3장~17장), 및 하나님께 대한 죄(계18장-19장)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➀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사랑에는 세 가지가 항상 함께합니다. 먼저는 자기감정을 우선합니다. 다음에는 자기주장을 고집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이권을 챙깁니다. 노회 시에나 총회 시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고 자기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수없이 발언을 일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를 깨닫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회장, 부장, 구역장의 감정이 전체 분위기를 장악합니다. 이들의 고집은 다툼을 일으키고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권이 개입되면 문제는 훨씬 복잡하여 마침내 분열로까지 이어집니다.
➁ 우리는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딤전6:10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을 놓습니다. 믿음으로 간절히 구했는데 해결되는 것이 없잖아요? 돈을 쓰니 정확히 완전하게 다 해결되던데요. 그러므로 기도도 다릅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에는 10억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10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을 놓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구하며 매달렸는데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돈을 쓰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황금만능 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근심하고 슬퍼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연으로 돌아가 돈을 구하지 말고 믿음으로 믿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해결하실 줄 알고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사39:7)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주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종의 소망을 자신의 소망으로 삼고 해결해 주십니다.
➂ 우리는 자랑하였습니다.
자랑하며 라는 말의 헬라어 본문은 ‘아라조네스’입니다. ‘아라존’이라는 말은 돌팔이 의사를 의미합니다. 의료에 필요한 도구와 여러 가지 약재 등을 갖고 도시 변두리나 시골로 다니면서 의료행위를 합니다. 그럴듯한 말로 자신이 자격 있는 의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갖 건강 상식을 그럴듯하게 말해 전문적 의사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가짜 약을 비싼 가격으로 판매합니다.
우리는 돌팔이 같은 목회자는 아닌지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강의에서 대화에서 돌팔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세 가지 고백을 해야 합니다. I know nothing. I have nothing. I am nothing. 그런데 우리는 이런 고백을 철저히 감춥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체 말합니다. 영적 능력을 다 갖지도 못하면서 성령 충만함이나 사랑을 갖지도 못하면서 이를 다가진체 말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본받지 않고 제자의 모습을 갖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이미 주님을 다 받은 체, 주님의 제자가 다 된 체 말합니다. 설교 시간에 성경을 다 아는 체, 성령의 충만을 다 가진 체, 주님을 다 본받는 체하고 말합니다. 강의를 그렇게 합니다. 대화를 그렇게 합니다. 이는 돌팔이가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일상의 거짓말이 아니라 강단에서 주의 종으로 하는 거짓말입니다. 그 죄는 심각하고 중대한 죄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슬퍼하시고 걱정하시는 죄입니다.
이 죄가 얼마나 큰지 제가 질 수가 없고, 얼마나 많은지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면서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신자일수 밖에 없어 지옥에 던져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주님의 심판 날을 기다려야 할 자임이 분명합니다(벧후2:4). 주님 앞에서 무익한 말 한 마디까지라도 다 심판받아야 합니다(마12:36). 우리는 하나님이 이를 보고 계시는 그대로 우리도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➃ 우리는 교만하였습니다.
코람데오(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 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말합니다. 교만이란 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을 의식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매사를 처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말합니다. 어떻게 교인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습니까? 목사님이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지요. 저는 설교를 이렇게 합니다. 나름대로 설교의 대가가 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에서 음성이매우 중요하고 제스추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는 코람데오를 믿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사람을 모욕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가를 그들이 받은 상처로 의문을 품게 합니다. 그의 교만은 그가 말하는 코람데오를 피상적인 말로 만들어 버립니다.
➄ 우리는 비방하였습니다.
자신을 언제나 중심에 두고 표준(standard)으로 삼았습니다.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DNA)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표준으로 삼은 사람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르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배든, 스승이든, 동료든 자신과 다르면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방합니다. 마지막에는 정죄합니다. 그와 마주했던 모든 사람들을, 그와 만난 모든 사람들을 그는 틀렸다고 말하고 비방하고 정죄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할까요? 회개해야 합니다.
➅ 우리는 부모를 거역했습니다.
일정한 위치에 오른 사람들, 특히 목회자가 된 사람들은 부모를 거역합니다. 거역이란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깊이 듣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드려 부모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의견을 거의 묻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잔소리라고 일갈하고, 조용히 계시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 분이지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작은 방에 가만히 계셔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근심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➆ 우리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교회당이 크고 교인이 많이 모이면 재정적으로 힘이 있고 주목받을만한 일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담임 목사를 주목하게 됩니다. 존경을 받으며 사랑을 받습니다. 화려하게 꾸민 당회장실이 있고, 명품 승용차를 한두 대씩 갖습니다. 비서가 있고, 교단의 책임자가 되기도 하고 전국적 규모의 대표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로 그는 오늘이 있기까지의 노력과 자신의 능력을 수많은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신을 부각시키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은 오늘 현재를 기점으로 언제나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해 성품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경외를 깊이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소망하지 않았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➇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딛3:5-7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우리가 천국의 유업을 얻을 때까지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빼놓고 그 자리에우리가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 우리가 그 은혜를 갚아드릴 수 있는 보은의 삶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곧 성화입니다.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성화의 삶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화의 삶이 늘 부족합니다.
본문 3절은 부자간의 문제, 혹은 형제간의 문제, 혹은 목회자간의 문제, 나아가서 우리 이웃 간의 문제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문제를 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부부 간의문제를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가장 합리적이고 바르게 본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➈ 우리는 아내에게 무정하였습니다.
무정했다는 말은 사랑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들이라도 수십 년을 부부가 같이 살다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고갈되고 서로가 무정하게 대합니다. 여기 ‘무정하며’를 원문은 ‘스토르게’가 없으며 라고 말합니다. ‘스토르게’란 가족 간의 사랑입니다. 자녀가부모를 사랑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재혼한 경우에 가족 간의 사랑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 친족에 대한 사랑이 클 때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이기적일 때 이런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자기주장이 강해 서로를 받아주지 못하고 대립각을 세울 때 가족 간의 사랑에 큰 결핍이 올 수 있습니다.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➉ 우리는 아내의 원통함을 풀지 않았습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아내의 마음에는 원통함이 쌓일 수 있습니다. 원통함을 원문은 ‘아스폰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받은 상처로 한없이 차가워지고 모질어지고 슬퍼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용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풀어줄 사람은 남편 밖에 없습니다. 이 원통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이 오늘 날자로(as of today)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내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날짜로, 지난날의 상처도 모두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⑪ 우리는 모함했습니다.
일부 목회자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하여, 매우 선하고 명망있는 사람으로 존경받기 위하여 아내를 모함합니다. 가족들에게 모함합니다. 문제가 많은 어머니요, 자부요, 형수라는 식으로 모함합니다. 매우 작은 실수나 말이나 행동의 작은 단점을 크게 확대해서 말함이 모함입니다. 더 나아가 친지나 동역자들에게도 아내를 모함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지나가는 말을 하듯 쉽게 모함할 수 있습니다. 결과 자신은 일등 목사인데 아내는 악처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을 시킵니다. 마치 더 잘 목회할 수 있는데 이런 아내 때문에 목회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인식되도록 합니다. 우리가 크게 회개할 일입니다.
⑫ 우리는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한 남편에게 아내는 누구인가? 거의 모든 남성에게 아내는 자신의 정욕의 대상입니다. 정욕이 일어나면 아내의 감정이나 의사와 관계없이 절제하지 않고 아내를 대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성욕이라는 본능이 특수화되고 개체화된 것뿐입니다. 억제하지 못하는 정욕은 신앙적인 삶에 혼란을 주고 모든 것을 간단하게 휩쓸어 버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찢어 버리고 파멸시켜 버립니다. 아내에게서 만족하지 못하면 아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바른 답을 하지 못합니다.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누구나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음란물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⑬ 우리는 사나웠습니다.
사납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아네메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보다는 맹수에게 더 적합합니다. 맹수처럼 아내에게 사납게 구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구타합니다. 옷을 찢습니다. 밥상을 뒤집습니다. 물건을 집어 던집니다. 죽일 듯이 노려봅니다. 쌍욕을 합니다. 부부로서는 마지막 가는 말을 합니다. 이상하게도 목회자의 부인은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앙적입니다.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목회자의 대답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말이 막히면 신학교를 다녀본 적이 있느냐, 신학서적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있느냐, 뭘 안다고 큰 소리 치느냐고 욱 박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하나님을 나는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불신앙적인 말도 내뱉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⑭ 우리는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선한 것을 좋아하는 모습으로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마음과 말과 행동에 항상 선한 것이 내재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흔히 남편은 아내에게 선한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항상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는 일입니다.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는 일은 한 마디로 선하지 않은 남편의 모습입니다. 아내를 대할 때마다 마음에서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납니다. 아내에게 말할 때마다 역시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납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잔뜩 신경질이 나고 화난 모습입니다. 이를 대하는 아내에게 공통적으로 생기는 병이 우울증입니다. 함께 살고 싶지 않고, 남편이 하는 일에 무관심해집니다. 삶에 아무런 의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감정이나 대답이나 태도에서 언제나 신경질이 잔뜩 나 있고, 화가 나있는 남편의 모습은 아내는 큰 좌절과 실망감을 갖습니다. 남편은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4절과 5절은 하나님께 대한 죄들입니다.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⑮ 우리는 배신합니다.
배신을 원어로는 ‘프로도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나오던 교인이 다른 교인을 로마 정부에 신고하여 핍박을 받게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믿을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여 다른 사람으로 그의 말이나 행동을 의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⑯ 우리는 조급합니다.
목회자는 먼저 생각하고 말이나 행동해야 합니다. 죄고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목회자의 삶은 언제나 기도로 일관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식사하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운전하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려고 하면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최소한 짧게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기도를 생략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⑰ 우리는 자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 마음이 온유하고 한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만입니다. 학력을 자랑하고, 지나온 삶의 경력을 자랑하고, 현재의 직분을 자랑하고 이루어 놓은 업적을 자랑합니다. 이게 자만입니다. 자만은 결코 꺾어지지 않은 자긍심입니다. 자만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닮은 제자답게 낮은 모습 겸손한 모습을 갖습니다. 흙탕물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하대에도 결코 기분나빠하지 않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겸손은 그의 자만에 든 중요한 품목입니다. 흙탕물에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아무리 무시를 당하고 하대를 당해도 이를 받아드리는 그의 모습은 매우 고상해 보이고 존경스럽게 보입니다. 그가 어떤 멸시에도 변하지 않고 이를 받아드리는 것은 그 옆에 서있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회개해야 합니다.
⑱ 우리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했습니다.
쾌락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감각을 삶의 중심에 놓는 행위입니다. 어떤 삶보다도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비용,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쾌락을 사랑함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숭배합니다.
연속 방송이나 영화를 시청하는 시간이 하루 종일 일수도 있습니다. 고가의 경비를 지불하고 며칠 동안 클럽에 가서 골프를 치기도 합니다. 몇 시간동안 운동장에 앉아 축구나 야구를 참관하기도 합니다. 밤새기 하며 음란공연을 참관하기도 합니다. 며칠 동안 바둑을 두기도 하고 온갖 전자오락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비를 들여 원정 낚시를 즐기기도 합니다. 쾌락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파괴합니다. 이를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⑲ 경건의 모양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보다 교리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경건한 인물들을 존경하고 경건한 신앙고백서들을 열심히 인용합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모든 경건한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보다는 율례나 규례를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모양만 내는 경건은 바리새적인 경건입니다. 위선이요 외식입니다. 회개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⑳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주목하여 보았던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스데반의 모습 우리에게는 없습니다(행6:15).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믿는 사람들이 되게 했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행2:41). 바울 사도의 로마서 8장을 꽤 뚫는 복음의 깊은 진리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손수건과 앞치마를 환자들에게 놓았을 때 병자들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는 바울 사도의 신유의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행19:12). 이를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존경하는 선배, 배우고 싶은 동역자들 중 누구라도 위의 20가지를 보이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부패했으며 타락해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시에 인간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이해합니다. 누구나 20가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선배, 닮고 싶은 동역자들이 20가지 중 어떤 부패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눈에 어떤 부패한 모습이 보이면 확실하게 그 모습을 거부하고 그 모습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용납하거나 따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