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홍봉상(洪鳳祥, 1556년~1592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문서(文瑞).
고조부는 우군사정 홍숙(洪俶), 증조부는 사포서별제 증통례원좌통례 홍계종(洪繼宗), 조부는 부사용 증승정원좌승지 홍우전(洪禹甸), 부는 부사직 증의정부좌찬성 홍수(洪脩), 모는 습독관 백승수(白承秀)의 따님이다.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컸으며, 경사(經史)의 서적을 읽다가 옛사람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부분이 있으면 몇 번씩 다시 읽는 강개한 성격이었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벼슬길에 나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 승정원주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던 중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부름을 받아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얼마 뒤 한양이 함락된 뒤 임진강까지 물러나 지키던 중 왜적이 남쪽 언덕에 복병한 채 조선 군사를 유인하였다.
원수 김명원이 적의 계교에 말려 진격하다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때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1666년(현종 7년) 현종이 수안보온천 거동시 외손자 이진(李縝)의 격쟁으로 통정 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藝文館 直提學 尙瑞院正)에 추증되었다.
후손이 없어 외손인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이유양의 자손들에 의해 음력 10월에 묘소에서 시향이 이어지고 있어, 풍산홍씨 모당공문중이나 습지공문중 종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
홍봉상묘지- 우암 송시열 서
이곳 충주(忠州) 개천리(開天里) 자좌(子坐) 언덕은 고(故) 전적(典籍) 홍공(洪公) 휘(諱) 봉상(鳳祥), 자(字) 문서(文瑞)의 배(配) 권씨(權氏)의 무덤인데, 그 외손(外孫) 이진(李縝)이 공이 남긴 의관(衣冠)을 함께 장사지낸 곳이다.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왜란(倭亂) 때 원수(元帥)김명원(金命元)공이 공을 자벽(自辟, 장관이 자기 임의로 천거하여 아래 벼슬에 임명함)하자 스스로 따라갔다. 공은 젊어서 경사(經史)를 배워 탁월하게 뛰어났는데, 매양 독서하면서 살신 성인(殺身成仁)한 옛사람을 보면 문득 세 번 반복해 읽고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나이 24세 되는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0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료에서부터 시작해 천거되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원수를 따라가면서부터 원수가 평소 공에게 대절(大節)이 있는 것을 알았는데, 공이 임기(臨機)하여 계책을 쓰는 것을 보고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군사가 임진(臨津)에 주둔하여 적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고 도망쳐 가자 원수가 군사를 풀어 추격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렸으나 되지 않았고 적이 과연 사면에서 급히 공격해 왔다. 이때에 대가(大駕)가 강을 건넌 지 오래지 않았는데, 공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存亡)이 이번 싸움에 결정된다.” 하고는 자신이 달려가 싸우려 하자, 원수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일이 이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대는 병사(兵事)를 익히지 않은 서생(書生)이라 죽음만 당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어찌 사생(死生)을 따져 왜적의 화를 군부(君父)에게 끼치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분연히 달려나가 덤벼들었는데, 겨우 남쪽 언덕에 이르니 아군이 이미 전멸하고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공은 안색이 태연 자약(泰然自若)하며 발꿈치를 떼지 않고 제자리에서 적을 쏘아댔다. 화살이 떨어져 스스로 강물로 뛰어드니, 그때가 임진년(壬辰年) 5월 18일이었다.공은 부모를 섬기면서 효경(孝敬)을 극진히 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병환에 모시면서 몸소 약을 달이며 10년을 하루처럼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거상(居喪)하면서 매우 슬퍼하였으며, 또 형제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왜변(倭變)을 듣고는 문득 사랑채에 거처하며 항상 궁검(弓劍)을 어루만지다가 아침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하였다. 집안사람이 피난할 계책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죽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보아 취사(取舍)를 매우 명석하게 하였으니, 비록 그 충의(忠義)의 절조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평소 수양(修養)의 바름을 또한 볼 수 있겠다.공이 죽은 지 75년이 되는 올해는 금상 전하(今上殿下) 7년인 병오년(丙午年, 1666년 현종 7년)이다. 일찍이 온천(溫泉)에 거둥하시다가 이진(李縝)이 어가(御駕) 앞에서 울며 호소함으로 인해 임금이 공의 의열(義烈)을 가상히 여기고 그 인멸(湮滅)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 일을 의논하라고 내렸다. 의논한 신하 박장원(朴長遠) 등이 아뢰기를, “홍모(洪某)는 장수 군막[帥幕]의 미관(微官)으로 의분심을 내어 곧장 적에게 달려들다 힘이 다해 죽은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났으나 그 일이 명백한 것은 온조정이 다 아는 바입니다. 마땅히 은전(恩典)을 베풀어 충(忠)을 권장하는 방도를 밝혀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을 추증했으니, 아! 성조(聖朝)의 포미(褒美)하는 은전이 여기에 이르러서 유감이 없게 되었다.공은 풍산인(豐山人)으로, 고려 때 직학(直學) 홍지경(洪之慶)의 후손이다. 대대로 알려진 분이 있었으나 후에 와서 조금 부진(不振)하였다. 아버지 사직(司直) 홍수(洪脩)는 증(贈) 찬성(贊成)이요, 할아버지 별제(別提) 홍우전(洪禹甸)은 증 승지(承旨)인데, (증직은) 모두 공의 백형(伯兄) 모당(慕堂)홍이상(洪履祥)의 귀현함 때문이었으니, 모당은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그 선고(先考) 백승수(白承秀)는 벼슬이 습독(習讀)이다.공의 부인(夫人) 권씨는 정랑(正郞) 권응시(權應時)의 딸인데, 딸 셋을 두어 사용(司勇) 이홍헌(李弘憲), 판관(判官) 정시혁(鄭時赫), 장령(掌令) 이유양(李有養)의 아내가 되었다. 사용의 아들 이형국(李馨國)은 진사요, 딸은 황이장(黃以章)에게 출가하였다. 판관의 아들은 정세현(鄭世鉉)ㆍ정세진(鄭世鎭)ㆍ정세흠(鄭世欽)인데 둘째 아들 정세진과 막내아들 정세흠은 모두 진사이며, 여섯 딸은 김극효(金克孝), 판관 조봉원(趙逢源), 김방(金淓), 이창진(李昌震), 김홍정(金弘炡), 경집(慶)에게 출가했는데, 김극효, 김방, 김홍정과 이창진, 경집은 모두 사인(士人)이다. 장령의 부인은 성품이 지극하여 권 부인의 병환에 두 번이나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자 병이 곧 나았으며, 그 장남 이적(李績)과 다섯째 이서(李緖)도 그렇게 하였는데, 일이 알려지자 모두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진(李縝)과 막내아들 이치(李緻)는 모두 음사(蔭仕)요, 이유(李維)는 업유(業儒)요 이윤(李綸)은 진사인데 차례는 셋째와 넷째이며, 딸은 임후석(任厚錫)에게 출가하였다. 그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어질고 현달한 자는 조 판관(趙判官, 조봉원)의 아들 조근(趙根)으로 지금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이 되었다.권 부인은 현숙하고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일찍이 울먹이며 말하기를, “그 당시 내가 임신(姙娠) 중이었기 때문에 차마 따라서 죽지 못하였고 마침내 아들을 낳았으나 기르지 못했으니, 하늘은 어찌 차마 못할 일을 하는가? 우리 공이 아들이 없어서 그 충절이 지금까지 묻혀버리고 말았으니,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내가 죽고 나면 그 누가 공의 의관을 나와 함께 묻어줄 것인가?”라고 하는데, 듣는 자들이 슬프게 여겼다. 일찍이 예법을 아는 자에게 듣건대, 허장(虛葬)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나쁜 것이라도 없는 것이 어찌 있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진(李縝)이 방금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으면서 조 문학(趙文學, 조근)과 상의하여 표석(表石)을 마련하여 전면에 ‘홍공지묘(洪公之墓)’라 쓰고는 뒷면에 그 사적을 써달라고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