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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바리새인, 사두개인)의 이해
유대교 이해
1. 바리새파(The Pharisees, 초자연주의자)
신약 시대뿐 아니라 중간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파는 주전 135년경 마키비 5형제 중 마지막인 시몬(Simon)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주전 134-104) 1세 때 생겨난 유대교 종파이다.
바리새파는 하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 혹은
앗시디안(Assidian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이 ‘분리된 자들’(the separated one)란 말답게
대다수의 정치 종교적인 태도에서 분리되었다.
바리새(Pharisee)라는 용어는 분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파라스(Paras)와 아람어 프라스(Pras)에서 온 말이다.
하시딤 사상의 근원은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신약 시대의 사두개파는 헬레니즘과 타협하였고,
바리새파와 엣센파는 하시딤의 기본 교의를 보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구별된 자” 즉 “이스라엘의 참된 공동체요 성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식상 부정을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엄격하게 피했다.
제사의 정결 문제나 음식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하였다.
다니엘은 하시딤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항상 소집단이었으며, 헤롯왕 시대에는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된 이후, 유대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존한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희소했지만, 그들의 명성은 대단히 높아서
누구든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는 그들의 노선에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식적인 청결 규정과 십일조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자신과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
바리새파에는 제사장, 수공업자, 농부, 상인이 속했는데,
그들은 도시와 시골에 퍼져 살았다.
그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도 존중하였다.
또 죽은 자의 부활문제는 구전을 존중하여 공식적인 교리로 발전시켰다.
바리새파 공동체의 가입 규정은 엣센파 공동체의 가입 규정과 같이 대단히 엄격하다.
지망자들은 이 공동체에 가입하기 전에 한 달 내지
일 년 동안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이 시험 기간 동안
정결 규정을 엄수할 수 있다는 신뢰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이 시험 기간이 끝나면 지원자들은
공동체의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한 율법학자 앞에서 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신입회원은 바리새파적
정결 규정들과 십일조 규정들을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했다.
그 이후에야 회원이 된다.
이 단체는 독립적인 내부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이 단체의 회원이 제명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용감한 수호자로서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248개는 긍정적이며 365개는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에 다른 많은 보조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이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Shammai) 학파로서 율법의 모든 주제를 엄격하며 좁은 의미로 해석하며 가르쳤다.
샴마이는 헤롯 대왕 시절에 살았던 인물로 이교도들과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의 학파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다른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샴마이 학파는 율법 해석을 보다 엄격히 하였고 결과적으로 로마인들과 대립하였다.
또 다른 학파는 힐렐(Hillel) 학파인데 힐렐은 바벨론 태생으로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뒤늦게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의 정신에는
다소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기도 했으며,
일반 율법사들에 비해 다소 온건한 입장을 지녔다.
그는 이방인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짓기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풍습을 따른 것뿐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메시아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교도들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려면 유대교로 귀화해야 하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힐렐에 따르면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12달 동안만 고통을 받다가 그 후에는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허락된 여러 이유들로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힐렐은 사도행전 시대의 유명한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Gamaliel)의 할아버지였다.
힐렐은 좀 더 온건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로마의 관례를 정통 유대교와 양립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실제로 샴마이 학파에서는 여자에게서 부정이 발견되지 않는 한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고 가르친데 반하여,
힐렐 학파에서는 여자가 접시를 깨는 경우에까지도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그 당시에는 아내가 음식을 태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가운데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눅 11:46) 율법사들은 샴마이 추종자로 보인다.
이들은 종교적 형식주의와 위선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질책을 당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의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모든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고,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그러므로 유대주의(Judaism)의 사상적 배경에는 바리새주의(Phariseeism)가 존재했으며,
그것이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존하게 했던 것이다.
물러(Kaufmann Kohler)는 극단주의자인 바리새인의 7가지 형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 “어깨”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어깨에 훈장을 단 것 같이 사람들 앞에서 그의 선행을 과시하고 다니는 자들이다.
(2) “잠시 기다려”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선행을 행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잠시 기다리도록 요청하는 자들이다.
(3) “장님”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여인을 보지 않으려고 그 눈을 감음으로 걷다가 벽에 박치기 하는 자들이다.
(4) “절구 공이”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주어지는 유혹들을 보며 그저 관심 없이 머리만 달고 걸어 다니는 자들이다.
(5) “영원히 세는”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선행이 실패를 메운다면 자신의 선행을 항상 세고 다니는 자들이다.
(6)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욥 같이 진정 의로운 자들이다.
(7)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같은 자들이다.
2. 사두개파(The Sadducees, 자연주의자)
사두개란 말은 "의로운"이란 뜻의 "싸디킴"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은 솔로몬의 제사장인 '사독'(삼하 8:17) 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두개파’는 사실에 있어 사독의 자손이 아니면서
사독의 자손 행세를 하는 당시 하스모니아 왕조를 지지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의회의 의원’을 가리키는 헬라어 ‘쉰디코이’(σύνδικοι)가
히브리화한 ‘차두킴’(מידּ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이 중류 계층인 반면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귀족층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제사장 계급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동료들에게도 이방인을 대하듯 무례히 행하며
자신들의 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기록된 토라의 권위를 인정했으나 구전 율법의 권위는 인정치 않았다.
장로의 유전을 대단히 강조하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사두개파는
그들이 성경 안에서만 발견하였던 교리들로 그들의 신조를 국한시켰다.
그들은 기록된 율법만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리새파에게 율법이 신앙의 중심이라면 사두개파에게는 율법이 신앙의 왜곡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헬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부활, 천사, 마귀에 대한 교리를 부인했으며,
성공과 역경은 인간 행동의 결과라고 믿었다.
그리고 재판에서 바리새파는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여 관대한 편이었으나 사두개파는 엄격하였다.
주후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것은 대제사장이 공공의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헤롯 치하와 로마 총독의 치하에서 예루살렘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그때그때의 정부를 인정하였으며 유대인 중에서
들끓는 로마인에 대한 적개심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사두개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계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3. 엣센파(The Essenes, 쿰란공동체, 금욕주의자)
엣센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하시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엣센파는 바리새파의 출현에 어떠한 독특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엣센파의 기원은 바리새파의 기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며
이것은 엣센파의 엄격한 정결규정들과 성별을 위한 노력에서도 잘 입증이 되고 있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4,000명 정도였으며 단순하고 절제 있는 생활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 단체에 가입하려면 반드시 3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이 종파(Sect)에 입단하면 누구나 자기 개인 재산을 공동체에 귀속시켜야 했다.
이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약속들이
자기네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엣센파라는 말은 ‘호시오스’(거룩한)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고, 독신을 강조했다.
어떤 그룹에서는 자녀를 갖기 위해 결혼을 허락했으나 대부분 양자를 데려다가 키웠다.
생활은 손 씻는 결례, 세례, 기도 등 수도원적 생활을 했다.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는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했다.
세례 요한의 생활과 그의 세례 의식 등이 엣센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역사의 과정에서 엣센파는 네 개의 파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 잘 알려진 것이 “셀롯당”(the Zealots, 열심당)이다.
엣센파의 신학은 약간씩 다르나 다음의 네 가지를 믿었다.
(1) 유일신 신앙(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믿음),
(2) 열렬한 율법 연구와 은유적 해석 방법,
(3) 엄격한 안식일 준수,
(4) 영혼 불멸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로서,
마카비 가문의 하스모니아 왕가의 통치자들이
자신들 스스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사함에 반대하여,
사해 근처 쿰란(Qumran)이라는 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던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도의 부패를 주장하며
진정한 대제사장 메시아는 장차 자신들이 사는 광야에 임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왕적 메시아와 제사장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으며,
그 준비로 엄격한 종교적 훈련을 실행했다.
그들은 매일 종교적 의미의 목욕(ablution)을 하였으며,
결혼을 하지 않고, 기도와 노동,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7년 쿰란의 사해 사본이 발견된 이후
기독교의 고향이 베들레헴이 아니라 쿰란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엣센파의 회원이 되려면 3년 동안의 견습기를 거쳐야 하며,
서약을 한 다음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의 공동체는 엄격하게 나누어진 네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제1계급 제사장, 제2계급 레위인들, 제3계급 이스라엘의 자녀들,
제4계급 문의 개종자들(온전 개종자인 의의 개종자와 구별됨)이다.
4. 열심당(The Zealots)
열심당의 기원은 멀리 마카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계자라면,
열심당은 마카비 왕조의 정신적인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즉 유대인 중에는 투쟁적인 민족주의 노선에서 유대교의 활로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카비 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했고,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유대인의 마카비 왕조가 있을 당시에는 그들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누그러졌으나,
로마인의 점령 시대가 되자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분개하였고, 다시 민족주의의 감정이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신약 시대에 들어와 소위 열심당이 나타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과격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신약 성경에서 ‘셀롯’(눅 6:15; 행 1:13), 혹은
‘가나안’(막 3:18)으로 불리는 자들로서, ‘셀롯’(ζηλωτής,
‘젤로테스’)은 이 당의 헬라식 명칭이고,
‘가나안’(καναναȋος, ‘카나나이오스’)은 이 당의 히브리식 명칭으로 모두 ‘열심당’이라는 뜻이다.
‘열심당’을 “시카리”(sicari, 자객들)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옷 속에 단검을 숨겨 가지고 다니다가
불만의 대상들을 불시에 찌르고 군중 속으로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마 27:38)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옆에 달린 강도가 “열심당원”이었다고 말한다.
또 (막 15:7)에 나오는 바라바도 열심당원이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순교를 당하면서도 가이사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을 죄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악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해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대로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로마에 대항하는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주후 66-73년의 열심당의 주요한 반란 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주후 66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약탈 직후,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벧호론에서 로마군이 열심당에게 패하였다.
주후 67년에는 로마의 베스파시안 황제가 안디옥으로부터 도착했으며, 셉
포리스의 유대인들이 항복하였다.
그리고 조데파트에서는 유대군 수비대가 2개월 간의 포위 공격 후에 대량학살 당하였다.
그해 말에는 디베랴 지역 유대인들의 저항이 진압되었다.
주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성전과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갔다.
주후 73년에는 저항하던 유대인의 잔류 세력들이 로마에 의해 말살되었다.
마사다 최후 저항군들은 아내들과 자식들을 죽인 후에 자결하였다.
5. 헤롯당(The Herodians)
이들은 이두매인으로 로마에 아첨하여 권세를 누리던 헤롯의 노선을 지지하고
결탁한 자들로서, 정치적으로 또한 세속적인 무리였다.
대체로 친로마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현실과 타협하는 자들이었다(막 3:6).
헤롯당에 대해서는 신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 분파라기보다는 헤롯 가문 특히 헤롯 안디바의 친구들이요 지지자들이었다.
4세기의 교부인 에피파니우스는 그들이 헤롯을 메시아로 간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6. 서기관들(The Scribes)
유대 민족의 포로 귀환 이후 해이해진 민족정신을 율법으로
공고히 하려는 에스라의 율법 운동의 결과, 유대 사회에는 이른바 서기관의 무리가 생겨났다.
이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던 에스라의 정신을 본받아(스 7:10),
율법을 연구하고(율법사), 그대로 실행하며 백성에게 가르치는 자(랍비)들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해준 성문 율법을 백성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율법을 이론적으로, 생활률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 613조에 달하는 ‘할라카’ 소위 구전 율법(유전, Oral Torah, 막 7:3)을 만들어냈다.
서기관들은 율법 연구의 전문가들로서 세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율법을 연구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교육하였고,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에서 율법의 치리를 맡은 재판관으로 활약하였다.
7. 산헤드린(Sanhedrin)
예수 그리스도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및 정치 단체였던 산헤드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산헤드린은 ‘대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헤롯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후에는 로마의 감독을 받으면서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통치 기능을 담당했다.
구성원은 71인의 명망 있는 인사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은 사두개파나 바리새인에 속해 있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만이 사는 도시와 마을에서 유대인의 생활을 지배했고
율법을 어기는 자는 태형이나 추방으로 다스렸다.
좁은 지역에서는 7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재판이 시행되었고,
좀 중대한 문제는 23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에 보내졌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가장 큰 권위가 주어졌다.
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최고회의와 같은 권위가 주어져
유대 지역의 문제는 물론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도 그 권한을 행사했다.
산헤드린의 의장은 항상 대제사장이었으며(마 26:57, 행 5:17, 24:1),
대제사장 다음으로 높은 지위는 성전의 군관이었다(눅 22:4,52, 행 4:1).
이론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은
모든 유대인들의 영적, 정치적, 법적인 문제를 관장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하급 법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을 듣고 법률적인 결정을 했으며,
모세의 율법을 범한 죄나 신성모독 죄 등에 대해 판단을 하였고,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역할도 감당했다.
고소당한 사람들을 취급하는 진행의 법칙은 공정성을 유지했으며,
가능한 한 고소당한 사람의 죄를 면해 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할 때는 그들의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바리새인
바리새인(Ⅰ) - 기원
바리새인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포로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성전과 함께 종교의식을 빼앗긴 채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율법서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종교와 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율법이었으며, 그 이후로 율법은 유대인의 정체성의 근원이 되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에스라 이후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성전중심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제사장을 율법과 종교문제의 최고의 권위자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전 중심의 제사장 같은 성직귀족계급과 율법중심의 서기관 또는 ‘Sopherim'이라고 불리는 ‘율법학자’라는 이중적인 권위체계가 생겨났다. 이런 이중구조가 진행되면서 제사장이 아닌 율법학자들이 모세 오경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생활에 적용시켰으며, 이들은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충성할 의무도 없었고, 그들의 규정에 반론을 제기하기 까지 이른다.
이렇게 성직귀족계급과 율법학자 사이의 대립은 페르시아 시대 말엽과 헬라시대 초엽에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포로 시대와 귀환 후의 시대에는 평신도 율법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위대한 회당의 사람들’과 ‘제2성전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이방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운동의 주도적 세력이었다. 이들이 실질적인 지배권을 획득하자, 세습성직자들의 힘이 약화되었다. 더구나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임명한 성직자들은 세습제사장 계열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정통 유대인들은 제사장을 믿거나 의지할 수 없었다. 헬라문화가 유대인의 생활에 침범한 이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성전의식이 완전히 정지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율법은 이와는 상황이 달랐다. 강대국의 힘으로나, 이와 합세한 성직자들의 힘으로도 율법은 파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율법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충성심의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마카베오가 저항할 때, 종교적 중심세력은 서기관들의 집회, 유대회당과 경건파인 하시딤(Hasidim), 즉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마카베오상 7:11-17). 이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헬라화 정책에 항의한 반면에, 실권층이던 성직자 계급은 시리아 정복자와 화평을 맺음으로써, 민족의 대의를 저버렸다. 이들이 사두개인들(Sadducees)의 선조였다. 마카베오 치하에서 성전의 예배는 회복됐지만, 그가 세운 하스몬 왕조는 게루시아(Gerousia) 내지 원로원이라는 통치조직체를 유대에 도입시켰다. 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평신도의 ‘Sopherim'을 게루시아 평의회의 국민의 대표로 인정한 것이다. 유대교 국가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게루시아 자체가 헬라문화의 침투를 상징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게루시아는 평신도가 통치하고 행정하는 것으로 성직계급보다 지위가 높은 헬라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바리새 운동이 바로 이 헬라시대에 평신도 율법학자계급에게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바리새파의 핵심을 형성한 것은 일단의 평신도 서기관이었으며, 여기에 여러 파벌이 동조하여 강화되고, 나중에는 성직자도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기세로 인해 초기 헬라 시대의 어느 단계에서는, 모세 오경의 유일한 권위가 성직자이며, 따라서 성직자들이 백성의 지배자라는 기존의 구도에 강하게 도전하게 되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이 역사에 등장할 때는 이미 이들이 이렇게 유대의 기성종교단체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있을 때였다
바리새인(Ⅱ) - 명칭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 낱말의 기원을 ‘분리되어 있는 사람’(파루쉬[paruš], 페리쉬[periš])의 뜻인 히브리어 파라쉬(pāraš, 아람어 페라쉬[peraš])로 파악하고 있으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는 율법을 성직자들처럼 해석하는 자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평신도 해석자들이 한때 동료 성직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떨어져 나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름의 기원을 주전 163년의 하시딤과 유다 마카베오파 사이의 ‘분리’에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들은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지 않다.
이 낱말은 문자적으로 엄밀하고 철저하게 레위기의 율법식으로 준수하려는 나머지 불결한 것, 특히 불결한 자들, ‘세상 사람들’로부터 분리해 나온 사람들을 뜻한다. 또한 히브리어의 파루쉬는 ‘거룩한, 신성한’을 뜻하는 카도쉬(qadōš)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시프라(Sifra)는 레위기 11장 44-45절에 나오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를 ‘내가 분리되어(paruš) 있으니 너희도 분리될지어다(perušim)'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자들’ 내지 ‘거룩한 자들’이다.
또 다른 설명은 명사 ‘바리새’의 뜻을 ‘해석자’를 의미하는 말로 여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파라쉬의 뜻 중에는 ‘가르치다, 쪼개다, 분할하다’의 뜻이 있는데, 이는 곧 ‘해석하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라는 이름이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이 이론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 하나의 설명은 이 헬라식 이름이 ‘바사인’을 뜻하는 아람어 프리쉬(perîšî')의 헬라어 형태라는 것이다. ‘바사인’이라는 말은 바리새인의 반대자인 사두개파가 바리새인이 외국의 교리, 특히 바사의 교리를 유대교에 도입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바리새인에게 붙인 별명이었다는 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입장만이 특출나게 타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불결한 것에서 ‘분리되어 있는 자들’로 생각되며, 이 종파의 율법상의 분리주의, 특히 의식상의 분리주의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Ⅲ)-특징
바리새인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율법존중주의에 따른 분리주의, 전통적 유전의 철저한 준수, 진보주의가 그것이다. 첫째, 바리새인의 주요특징인 율법존중주의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율법 해석상의 철저한 정확성과 율법의 세부적인 고수로 유명했다. ‘조상으로부터’ 구두로 전승해오는 율법의 전통이, 정교한 체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율법 해석상에서 보여준 그들의 ‘정확성’에 기인하며, 이것이 역사적인 바리새주의의 주요 특성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율법 주위에 울타리’를 두른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고, 때문에 ‘벽을 두르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이들은 모세 오경에 바리새인의 전통이라는 ‘벽’을 둘러서 모세 오경을 가두어두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비바리새인들을 자신들이 독점한 모세 오경의 은혜에서 배제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종파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율법 해석상의 정확성 뿐 아니라, 그들이 전통을 실제로 준수하는데 있어서 유대교 종파 중에서 가장 엄격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 7장 3절에서처럼 자신의 몸과 의식용 비품 및 기구에 관한 의식적인 정결과 분리를 강조하게 된 것도 율법을 존중하는 바리새인의 엄격주의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레위기식의 규약의 의식상의 요건을 세밀히 준수함으로써 정결에 대한 완전론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의식상의 부정을 두려워하여 상처입은 사마리아 사람을 피한 것처럼 비(非)바리새인 즉 평민들을 불결하다고 피했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태도나,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씻는 그들의 태도(마 23:25)는 다른 문서들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
둘째, 그들의 특징은 첫 번째 특징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상의 유전을 철저히 준수한 것이다. 이른바 ‘장로들의 유전’(마 15:2, 막 7:3,5)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존중은 사두개인들과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낸 점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적이고, 고정적이어서 새로운 상황에 순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전통은 구전(口傳)이 본질적인 특색이었으므로 새로운 사태에 순응할 유연성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구래서 권위적 전통을 가진 조직체가 바리새주의 안에서 자라났으며, 항상 확장이 가능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정경은 오세 오경을 넘어서 예언서와 성문서까지 모함할 수 있었다.
셋째, 바리새주의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개방성이다. 요세푸스가 바리새인을 ‘합리주의자’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는 진보주의자들에 속해 있었다. 벨하우젠(Wellhausen)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사두개인은 정당에 불과할 정도로 하스몬 왕조와 성직자 계급 및 집권귀족계층과 밀착되어 있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그들의 종교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운동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핑켈슈타인(Finkelstein)은 바리새인은 민주주의 정당뿐 아니라, 국민이 일으켰던 진보적 종교운동의 선봉자였으며, 사두개인들은 낡은 성직제도와 지주 귀족층을 대표하는 단체라고 한다. 결국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모두 권력단체였으며, 유대교에서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저마다 분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두개인은 옛 방식과 현상 즉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관료주의에 귀착된 반면, 바리새인은 주전 2세기부터 줄기차게 유대에서 국민을 대변하는 자유주의자요, 또한 진보주의자였다.
바리새인(Ⅳ) - 정의
바리새인에 대해 요세푸스와 신약성서가 언급한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둘의 바리새인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는 성문과 구전으로 된 율법의 가르침과, 내세와 죽은 자의 부활을 유포하는데 평생을 바친 학자계급이라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이들에 대해 유대인의 지배적인 ‘철학’의 해설자로 묘사하면서, 사두개인 및 에세네파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로 정의했다. 사두개인들은 성문화된 규정만을 인정했는데,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전들까지 백성들에게 전하며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이 둘의 갈등은 심했다. 요세푸스가 평가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가장 정확한 해설자이며, 사상적으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삶의 방식을 제공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혼불멸과 육신의 부활을 가르쳤으며, 운명과 자유의지의 상호작용을 인정했다. 유명한 바리새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가말리엘(Gamaliel)의 아들 시몬은 율법에 있어서 죄고의 전문가였다고 요세푸스는 언급했다.
신약성서는 바리새인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요세푸스와 비슷한 이해를 보여준다. 빌립보서 3장 5-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에서 그는 스스로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다고 언급했다. 즉 바울이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소개하면서 율법과 조상의 유전에 충실했던 것으로 언급한 것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 이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유전’(paradosis)이라는 표현은 전문적인 용어인데,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도 구전된 율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7:3, 8-9, 13; 마 15:2-3, 6).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율법을 가르치는 학자들이며, 바울은 이들의 율법해석의 상당부분을 지지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도 바리새인은 두 가지 율법을 다루는 학자계급으로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서 7장 5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 즉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해석하고 준수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자들로 자처한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밀의 이삭을 자르는 것에 대해 예수가 말리지 않는다고 비난할 때(막 2:23-27),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고 경고할 때(마 15:1-9), 이혼에 대한 문제로 논쟁할 때(마 19:12-9),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에 대해 논쟁할 때(마 22:15-22) 등 그들은 스스로를 율법의 권위자로 자처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예수가 그들을 지칭한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2-3). 여기서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율법의 권위있는 대변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으로 보아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성문과 구전이라는 두 가지 율법 모두를 강조하며, 율법에 권위있는 학자겸 교사들임을 알 수 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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