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강북삼성병원 내 경교장(京橋莊)이다.경교장은 일제 때의 거부 최창학의 개인 주택으로 건축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이자 임정 요인들의 숙소, 한국독립당 본부, 백범 김구가 암살당한 뒤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저, 한국전쟁 중 미군특수부대와 의료진 주둔지, 월남대사관저 등으로 사용되었다. 삼성생명에서 매입해 고려병원(1995년 강북삼성병원
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이용하였다.현재는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경교장은 단순한 건물 덩어리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사 그 자체이다.
이곳은 백범이 머무르던 사저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며, 백범이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준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경교장은 우리 현대사의
뿌리에 해당한다. 남북관계의 화해와 국민통합에 대한 역사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에
그 의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교장 2층 백범 김구의 집무실 유리창의 총탄구멍이다.
"탕~탕~탕~탕"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5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도 안된 그 때,
초여름 낮 네발의 총성이 경교장 2층 백범 김구의 집무실에서 울린 것이다.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당시 32세)가 백범 김구을 향해 발사한 것이었다.
총성이 울려퍼지자 이미 경교장 주위에 포진해 있던 헌병들이 들어와
안두희를 헌병사령부로 압송했다.
백범 김구의 죽음 하면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다.
경교장 2층 김구의 집무실 유리창 너머, 고개를 떨군 채 통곡하는 군중의 모습이다.
사진 속 유리창에는 총탄 구멍 두 개가 선명하다. 안두희가 쏜 총탄이 유리창을 관통한 흔적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 직후 미국의 사진기자 칼 마이댄스가 찍어 ‘라이프’에 게재했던 것이다.
당시 사진 제목은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였다.
6월 27일 오전 11시 경교장은 이렇게 발표한다.
6월 26일 오전 11시 반경에 소위의 복장을 한 안두희(34)라는 청년이 경교장에 와서 백범 선생께 면회를 청하므로
2층으로 인도하였다. 그 청년은 백범 선생께 인사를 드린 후 비서가 이실(離室)한 틈을 타서 휴대하였던 45식 미국제 권총을
발사하여 면부로부터 하복부에 이르기까지 4 처의 요처에 명중되어 우리 위대한 애국자 백범 선생은 마침내 악한의 흉탄으로
인하여 운명하시고 말았다. 범인은 곧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군모를 벗어놓고 복장의 포장(襃章)을 떼어버리면서 내가 쏘았다 하고
소리치는 찰나에 정문에서 경비하던 순경이 현장에 달려와서 체포한 뒤에 들어온 헌병의 요구로 인하여 즉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백범 선생은 가장 평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애국자이신 까닭에 모든 겨레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마음으로써 대하시며 어떤 사람이 찾아오든지 반드시 면회하시었다. 이런 흉변도 백범 선생의 이런 정신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번 사건 경과는 이상과 같다.
이참에 어떠한 잡음이나 낭설이 있다면 이는 불순한 모략에 불과한 것이다.
초여름의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경교장 2층에 있는 백범 김구의 집무실에서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 이풍식, 이국태 등과 경비경찰 두 명이 뛰어 올라갔을 때는 백범은 이미 운명한 후였다.
총을 발사한 포병 소위 안두희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비서진이 안두희를 구타하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서대문 경찰서 경비주임에게 신병을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교장에 들어선 이들은
헌병대 소속 김병삼 대위 등 현역 헌병들로, 사건 발생을 미리 알고 인근에서 대기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완력으로 비서진과 경찰관을 밀치고 타고 온 스리쿼터에 안두희를 싣고 헌병사령부로 데려갔다.
헌병사령부에는 성묘를 간 장흥 사령관 대신 전봉덕 부사령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 암살은 사건현장에서부터 커다란 의혹을 자아냈다.
이후 상식을 넘어선 안두희에 대한 관대한 처분은 사람들에게 암살사건에 권력의 배후가 드리워져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안두희는 헌병사령부로 끌려가 곧 의무실에 보호조치됐다.범행현장에서 백범의 비서들에게
얻어맞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헌병사령부 장흥(張興)사령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사건 당시 개성에 있다가 급히 서울로 돌아와 보니
범인 安씨가 전봉덕(田鳳德)부사령관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며 "安씨를 즉시 감방에 수용토록 지시했으나
오히려 사건 발생 3일만에 나는 일선으로 전출되고 田부사령관이 사령관으로 승진,이 사건을 최종지휘했다"고 밝혔다.
6월27일 안두희는 군특무대로 이송됐다.여기서도 그는 극진한환대를 받았다.안두희는 "특무대에서는 맨 먼저 팬티까지
벗기는 상세한 의료진단을 한시간 이상 베풀었고 이어 실권자 김창룡(金昌龍)과 커피를 마시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고
증언한바 있다. 안두희가 특무대로 이송된 바로 그날 헌병사령부와 국방부는 『백범암살은 한독당(韓獨黨)당내 분쟁으로
안두희가 단독범행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안두희에 대한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발표였다.
안두희에 대한 취조관의 선정에도 당시 채병덕(蔡秉德)육군참모총장이 직접 관여했다.
김안일(金安一.80.목사) 당시 특무대장은 "사건이 발생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蔡참모총장이 밤에 특무대로 찾아와
같은 고향(평양)출신인 노엽 중위에게 이 사건을 맡기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김안일 특무대장은 안두희가 군법회의로
회부되기전에 6사단으로전출됐다.이어 김창룡이 특무대장으로 왔다.
그는 안두희를 위해 숙직실을 개조해 호텔과 같은 특별감방을 비롯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또 백범 암살을 직접 사주한 친일 정치브로커 김지웅(金志雄)은 안두희를 면회와 거액의 돈을 줬다.
안두희는 92년6월 김석용(金奭鏞.56.당시 백범시해진상규명위 국민운동위원장)의 권유에 의한 증언에서
"나는 첫 공판(49년8월3일)이 열리기 16일전인 7월18일 형량이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1950년 6.25전쟁은 무기수 안두희를 다시 현역군인으로 복귀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쟁 발발 이틀후인 6월27일 채병덕 참모총장의 지시로 안두희는 잔형(殘刑)면제처분을 받고 현역 소위로 복귀한 것이었다.
백범 암살의 배후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장은산(張銀山)당시 포병사령관을 들 수 있다.
안두희는 "김구선생을 암살하기 하루 전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은산이 나를 불러 단독범행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김안일 특무대장도 "장은산은 공공연하게 백범 암살은 내가 지시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말했다.
당시 군부와 경찰관계의 핵심분자들이 상호간의 정보교류라는 명목으로 만든 「88구락부」도 백범 암살사건의 기획과
뒤처리에 적극 개입한 것으로 지목받고 있다.신성모(申性模)국방장관,채병덕 육군참모총장,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김태선(金泰善)서울시경국장,김준연(金俊淵)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88구락부」의 핵심멤버였다.
김준연은 사건 직후 사건전모를 은폐하기 위해 안두희를 김지웅에게 소개한 홍종만(洪鍾萬)의 이름을 처음에는
홍우명(洪宇明)으로,다음에는 이병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이승만(李承晩)전대통령과 미국이 백범 암살사건에 관여했는지 여부도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안두희는 92년9월 증언에서 "사건 발생 1주일전인 49년6월20일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다"고 증언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진술을 부인해버렸다.
또 安은 92년 두차례의 증언에서 "미국 정보장교 모(某)중령과 마이클 중위를 만나 백범과 한독당의 동향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증언해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백범 암살에 관련됐음을 시사했다.
도진순(都珍淳.창원대)교수는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李전대통령이 백범 암살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전에 백범 암살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했고,미국도 백범의 민족통일노선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백범의 존재 자체를
부담스러워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이제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가 피살됨으로써 그동안 제기됐던 숱한 배후설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영원히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날 김구는 2층 거실에서《중국시선(中國詩選)》을 읽고 있었다. 이날 주일예배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무렵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가끔 예의 떨림체로
휘호를 썼다.자주 쓰는 휘호에는 서산대사가 지은 이른바 ‘답설야(踏雪野)’ 라는 싯구도 있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踏雪野中去 不修胡亂行)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경교장 1층에는 중앙홀과 응접실, 귀빈식당, 임시정부 선전부 사무실 등이 복원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사무실
경교장 귀빈식당
1층 응접실
경교장 2층에는 응접실과 임정요인 숙소 그리고 백범의 집무실 등이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그리고 제3전시실이 있다.
1938년, 광업 전문지 <월간 광업시대>에는 ‘최창학 씨와 아방궁’이라는 단신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주요 키워드는 ‘죽첨정, 궁궐, 석수장이, 만리장성, 옥석, 아방궁, 쾌걸남아 최씨, 건축비 30만엔, 20만엔’ 등이다.
당시 최창학 씨는 조선 최대의 금광이었던 ‘삼성금광’의 사장이었다. 삼성금광이 있던 평안북도 구성의 조악동 지역은 금광이
생기기 이전만 해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였으나 ‘골드러시’가 이뤄지면서 광부, 분광업자, 덕대(채굴 하청업자) 등
5000여 명이 모여 사는 타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최창학은 ‘신화의 주인공’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시대 때 금광 채굴권을
획득한 인물들은 대부분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를 받은 친일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광부 출신도 아니면서 채굴 허가를 받았고,
정작 평생을 광산에서 일한 전문가들은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월급이나 받는 신세로 지내야 했다.
그런데 최창학은 그 출발부터 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광산 지대에서 평범한 광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숙명적으로
광부가 되었고, 스무살 무렵부터 광맥을 찾아 다니던 사람이었다. 오랜 유랑 생활 끝에 금광을 발견한 그는 ‘개광’ 이후
엄청난 돈을 벌어 대부호가 되었다. 당시 광부 한 사람의 일당은 70전이었는데, 최창학이 하루에 벌어들인 돈은 3100원 정도였다고
당시 동아일보, 미담 등은 전하고 있다. 그는 1926년 한 해에만 당시 돈으로 200만원(환산하면 약 2000억원)을 벌었고, 막대한
자금으로 사들인 광구 76곳을 일본 광업에 투자하며 받은 돈이 600만원(약 6000억원)이었다.
그는 갑부가 된 뒤 총독부에 ‘국방금품헌납’,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는 등 식민지 정부에 협조, 친일 행적을 남겼는데, 해방이 되자 자신의 호화별장이었던 ‘죽첨정’(일제 시대 때 돈의문 일대의 행정명)을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로 내 놓았다.
최창학은 1959년 사망했고 경교장은 그의 후손에게 되돌아 간 뒤 삼성생명에 매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