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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탐방 4탄 < 청도에서 화순 구경 가기 >
2017년 9월 23일과 24일(토, 일요일), 길이 좀 멀지만 전남 화순을 1박 2일로 구경하기로 9월 초 결정을 하고 늘 하던 것처럼 안선생이 머리가 되고 황선생은 발이 되고 나는 지갑이 되어 8시 30분에 청도에서 출발했다. 적벽(赤壁)이란 곳이 유명하다고 해서 미리 9월 11일 버스 투어를 1인당 1만원에 신청을 해 두었다. 오늘은 화순 도착과 동시에 식사를 하고 고인돌 공원과 운주사 구경 후 괜찮은 곳에서 저녁과 음주를 하고 숙소에서 자고 내일 9시 30분에 이용대 체육관 앞에서 적벽 버스 투어를 시작해 다녀와 점심 후 상림공원 꽃무릇을 구경한 후 청도로 오는 걸로 대략의 계획을 세웠다. 교통편은 저번 통영 여행에도 끌고 간 황선생의 일본 닛산에서 나온 SUV 차량인 퀘시콰이(QASHQAI)로 연비가 좋아 유류비가 1/3 정도는 절감되는 것 같았다. 거리가 청도에서 236km이며 90Km/h일 경우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경과되며 통행료는 1만 원 정도.
날씨가 가을답게 선선하면서도 투명하여 먼 산이 그 형체를 뚜렷이 드러내어 가깝게 보일 정도로 화창하다.
< 거창 휴게소에 들러 휴식 겸 커피를 마시는데 ‘비건 전문점’이라 적어 두었다. 비건(Vegun)은 종교적 신념, 환경보호, 영양상의 문제, 도덕률 등의 이유로 소나 돼지와 같은 육류나, 가금류 등의 식품, 우유와 달걀 같은 낙농 제품 뿐 아니라 해산물 등 일체의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거나, 동물학대에 반대하여 동물성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다. 낙농 제품을 섭취하는 베지테리언(Vegetarian - 채식주의자)과 구분된다고 하니 더욱 엄격한 채식주의자라 보면 되겠다. 그러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식물은 여전히 불쌍하다.>
12시 전에 화순에 들어와 차를 화순 고인돌 전통시장 바로 옆 화순읍 자치센터에 세우고 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 시장 안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이 병어였는데 그 값이 만만찮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것이 15,000원이고 그것보다 조금 더 크면 20,000원이다. 병어야 오뉴월이 제철이지만 그래도 전라도라고 생각하면 그리 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외 더덕, 영지, 위장에 좋은 누룩나무 껍질과 구지뽕나무 뿌리 말린 것과 같은 민간에서 쓰이는 한약재를 많이 팔고 있다. 특산물로는 파프리카가 유명하다.
특별한 음식으로는 무등산 계곡에서 채취한 다슬기로 만든 다슬기수제비, 애호박 된장국, 검정콩으로 만든 흑두부, 보양식으로 유명한 흑염소탕과, 직화구이 돼지떡갈비와 청국장, 팥죽, 파프리카, 잡채 호떡 등으로 먹거리가 풍성했다. ‘방귀뽕뽕주’란 재미난 이름의 약초음료도 있었는데 이는 방풍나무뿌리, 당귀, 꾸지뽕, 뽕잎 등을 막걸리와 함께 넣고 끓인 것으로 약초로 유명한 화순을 홍보하기 위해 상인들이 직접 개발한 먹거리라 한다.
< 화순 고인돌 전통시장. 3일, 8일의 5일장인데 생각 밖으로 시장이 크고 활기에 넘친다. >
< 시장 안 진미식당이 인터넷에서 나름대로 이름이 있어 소고기 육회 반 접시에 애호박 찌개 셋을 주문했다. 애호박 찌개는 사실 돼지고기 찌개에 애호박이 거드는 정도로 경상도라면 돼지찌개라 할 만한 것이었다. 창란 젓갈과 고추 장아찌 같은 음식이 짭조름하면서도 조금 단 맛이 있었다. >
식사 후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순고인돌유적지로 향했다. 안선생은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어 별로라고 했지만 운주사 가기 전에 따로 갈 만한 곳이 없고 화순의 명소에 대한 관광지도도 얻을 겸 가보기로 했다. 입구에서 방명록을 작성한 후 안내하시는 분의 말씀이 이 길로 가서 돌아오지 말고 중간 중간 차를 세워 고인돌을 본 후 고개를 넘어 바로 운주사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차를 두고 걸어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별로라고 했다는 안선생의 양심고백과 달리 세계문화유산이라 할 만큼 충분히 훌륭한 볼거리가 많았다.
< 차량이 충분히 교행 할 정도의 넓은 길이 닦여 있어 볼거리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도 찍고 했다. >
< 한적한 곳에 있는 달 바위. 반달 모양의 아름다운 자연석이다. 달바위 오기 전 괴바위도 있었는데 한자로는 묘암(猫巖)이라 적혀 있어 고양이바위란 뜻이니 아마 경상도 할머니들이 사투리로 고양이를 이모음역행동화 시켜 “꾀내이”라 부르듯 이 바위 이름도 비슷한 음운현상이 작용한 것 같았다. >
대신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목탄의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2,500년 전의 물건이라 하니 그 시기에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하는 초보적 의문이 들었지만 피라미드도 만든 인간이니 무얼 못했겠는가. 다만, 춘양면 대신리와 도곡면 효산리 고인돌 유적지에는 고인돌의 덮개돌을 채석하는 장소가 고인돌 무더기 바로 위 산기슭에서 발견되었고 채석을 하다 만 석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무거운 돌을 움직이기보다 손쉬운 사람의 body를 움직였을 가능성이 많아 이곳이 자연스럽게 고인돌 유적지가 된 것이라 짐작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공원묘지라고나 할까? 지금의 추세대로 화장이 보편화되어 매장 문화가 사라진다면 아마 수천 년이 지난 후 어느 고고학자가 지금의 공원묘지 무덤을 발굴하고 나서 고대인의 거대한 무덤군이라고 명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 춘양면 대신리의 핑매바위 고인돌은 길이 7.3m, 폭 5m, 두께 4m로 무게가 200t이상이라 한다. '장군바위'로도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바위 가운데 새긴 것은 “여흥민씨세장산(驪興閔氏世葬山)”으로 이 산이 여흥 민씨들의 선산이라 뜻인 것 같다. 고인돌에 저런 것을 새겨 둔 것은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인 듯하다. >
< 이 돌이 자연석이 아님은 뒷부분의 돌을 인위적으로 고인 흔적에서 드러난다. 앞과 뒤, 그리고 옆면에 전부 굄돌이 보인다. 바위 위에 흰 냄비가 보이는가? 누군가 법랑을 두고 갔는데 안은 비어 있었다. >
전문가들은 당시 10t의 바위를 옮기기 위해서는 100여 명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핑매바위는 200t이니 이를 옮기기 위해 2,000명 이상이 필요했다는 계산이 나오고 이 일대에 그 정도 동원할 수 있는 수의 성인이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하긴 이 지역이 왜 화순(和順)이겠는가? 옛날부터 사람 살기에 그만큼 좋은 곳이라 화순이겠지.
경상북도 청도에도 화양읍에는 남북으로 줄지어 서있는 고인돌 무덤군이 있고 각남면 쪽 들판 중간 중간 방치된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채석장인지는 몰라도 각남 신당리를 지나 공동묘지 옆 못과 그 주변에 길이 3m, 폭 2m, 두께 0.5m 정도 크기의 둥글넓적한 돌들이 굉장히 많다. 또 각남 대산리 동네 입구에 있는 큰 바위도 고인돌이라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재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도로 옆에 있어 조금 묻힌 상태인데도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핑매바위와 세계 제일을 두고 한번 겨누어 봄직도 하다. 물론 이것이 진다면 대산지 못 옆에 있는 고인돌로 승부를 걸면 거의 확실하게 타이틀을 빼앗아 올 수 있을 듯하다. 청도군에도 발굴을 하면 대단한 이야기 거리가 많이 있는데 발굴을 하지 않고 먼 후손을 위해 숨겨두는 듯하다. 이런 점은 내일도 이어진다.
고인돌 발굴지도 있었지만 운주사가 오늘의 핵심이기에 과감히 생략을 했다. 사실 오늘 저녁의 마주할 주안상이 눈에 어른거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견문의 일부를 생략까지 해가며 길을 재촉했건만 못된 내비년이 무슨 심통이 났는지 안내대로 가는데 유턴을 시킨다. 돌아오니 거의 그 자리다. 가는데 4km, 오는데 4km, 8km를 뺑뺑이 돌고나서야 운주사로 향했다.
< 입장료는 1인 3,000원이다. 두 사람의 키가 같은 것은 착시현상이 아니다. 좌측에 30km/h의 찻길이 있는데 운주사에 비로소 도착한 흥분을 참지 못하고 승용차로 바로 일주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큰 시멘트 블럭을 두었다. 박은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일주문 편액을 구경한다고 위만 보고 오다가 와자작 차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불심 깊은 불자가 더러 있는 모양이다. >
“영귀산 운주사(靈龜山 雲住寺)” 영험한 거북산에 구름이 머무는 절이라 그래서 구름 운자의 “雲”을 저리 사람의 발처럼 서 있는 모양으로 적었다고 한다면 나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걸까, 아니면 령(靈)자와 모양을 맞추려는 배려에서였을까. 이 글씨를 쓴 남전 원중식 선생에게 물어보아야겠지만 고인의 간 곳을 모르니 해석은 산 자의 몫이요, 해석에 대한 평가도 산 자 마음대로다. 이 현판 뒤편은 천불천탑도량(千佛天塔道場)이란 현판이 있는데 이 역시 남전 선생의 글씨이다. 천불천탑이란 명칭이야말로 운주사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이니 그 부처와 탑의 꾸밈없는 천진난만함이 이 현판 글씨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할 정도로 어린아이가 나름대로 정성스레 쓴 듯한 인상을 준다.
< 힘이나 기교를 다 빼버리고 쓴 글씨가 오히려 운주사라서 잘 어울린다. >
< 들어가면 좌측에 그냥 바위가 있다. 연장바위이고 그 유래가 적힌 걸 보아야 아, 이 절과 관련이 있는 바위구나 할 정도로 그냥 바위다. >
이 바위에는 하루 만에 1,000개의 불상과 탑을 완성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믿음으로 석공들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는데, 일하기 싫어하는 한 동자가 닭 울음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날이 샌 줄 알고 연장을 두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은 그 형체가 어느 정도 유지된 것이 93불 21탑이나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천불천탑이 있었다고 하니 조선 초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불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억불숭유 정책으로 대략 자기 집의 계단을 만들든지, 무슨 용도가 있을 때 마구잡이로 훼손한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니 과연 옛날의 천불천탑의 운주사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다.
옛 청도군청 앞마당에 잠령비(蠶靈碑)가 있었다. 청도는 앞산에 잠실이 있을 정도로 누에가 성했던 곳이니 그 누에의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강점기 때 비를 세운 것인데 그 돌의 모양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크고 단단하고 좋았다. 지금은 어디로 치웠는지 모르겠다만. 그런데 그 돌이 청도 화양읍 석빙고 천장돌이었다고 한다. 1713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6개의 석빙고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그 석빙고의 돌을 가져다가 잠령비라는 글씨를 힘차게 새겼던 것이다. 혹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아 쓸모없게 된, 크고 넓고 단단한 돌을 여러 사람이 편리하게 다닐 수 있는 다리 공사에 사용함으로써 실사구시에 힘쓰기도 했다. 문화재가 원료적(참, 희한한 단어를 창조했다)으로 재활용이 된 경우라 하겠다.
40년 전쯤, 대학시절에 경주 배반동에 사는 친구가 있어 방문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 논길을 따라 걷다 보니 논두렁의 층계가 진 곳에 큰 돌거북이 넙죽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석조귀부인데 비석은 어디서 잃어버리고 비좌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건축물은 전혀 없고 거북이만 나를 멀뚱히 보고 있어 이곳이 옛날에는 이 거북이가 비석을 업고 거만을 떨던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논에 버려진 돌거북을 집에 가져가 깨끗이 씻어 타고 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크기기 1m 50cm는 족히 되어 보여 황급히 욕심을 거두었다. 경주 그 친구도 이젠 명퇴를 했고, 이미 배반동 집도 예전에 팔았다고 하니 그 돌거북이 아직 계단으로써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다.
< 연장바위를 지나자마자 나타난 보물 796호로 지정된 9층 석탑과 저 멀리 7층 석탑 2개. 날씨도 좋고 다니는 사람도 그리 없고. 넓은 운주사지에 흩어진 탑과 불상을 찾는 숨바꼭질이 드디어 시작이 되었다. >
< 석불군 가의 우측 언덕에 힐끗 보이는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듯 보이는 오층석탑. 옥개석을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일명 거지탑이다. 거지가 천지개벽을 위해 탑을 쌓고 싶었지만 기술 좋은 석공을 고용하지 못해 저따위 거지같은 탑을 만들었다는 건지, 거지가 직접 탑을 쌓다보니 저렇게 된 거인지, 저것도 탑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의 거지탑인지 알 수 없다. >
< 석불군 가에는 6개의 석불을 바위에 대강 기대어 두었다. 오른쪽 두 기는 제 자리였는지 몰라도 나머지는 원래 제 자리는 아니었으리라. >
< 두 장의 사진을 합하여 석불군 나가 완성이 되었다. 오른쪽 4.75m의 대형 입상 주존불이 있고 좌측에 5구, 우측에 2구의 입상 협시불이 있다. >
< 아마 운주사에서 가장 좋은 풍경이 아닐까? 3개의 7층 석탑이 같은 듯 다른 느낌으로 하늘 향하고 있다. >
운주사는 일반 절이 가지는 위압감이 전혀 없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높이와 깊이에서 오는 위압감도 없고 엄청나게 큰 대웅전이나 놀랄 정도로 큰 부처상이 있어 느끼는 압박감도 없다. 다만 평평한 들녘에 드문드문 심심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여유를 두고 섬세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탑과 부처가 조금 모자란 듯한 자세와 표정으로 우릴 맞는다. 높다고 해봐야 위 사진 왼쪽 편에 있는, 누워 일어나길 기다리는 미륵불이 있는 산이라고 하긴 조금 뭣한 언덕 정도일 것이고 크다고 해봐야 언덕에 누운 미륵인데 그 마저 누워 있어 위압적이지 못하다.
< 부서진 석재를 모아둔 곳에서 무늬가 새겨진 돌을 발견했는데 아쉽게 불두(佛頭)가 없다. 오른쪽의 것은 누군가가 아쉬운 마음에 돌 하나를 올려 두었다. >
< 여러분은 이 셋 중 어느 것이 첫 번째와 어울리며, 어느 것이 두 번째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는 형체로 보아 각각 첫째와 둘째를 권하고 싶다. 그러나 선택 받지 못한 셋째를 위해 당분간은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
< 부서진 불상들 사이로 갑툭튀한 토종 참개구리가 참 반갑다. 원래는 초록색인데 주변의 마른 풀이 많아 보호색을 저렇게 선택한 모양인데 이라크 전에 파병된 미군들의 전투복을 연상하게 했다. >
참개구리를 보는 순간, 나는 오늘 고인돌 공원에서는 비탈을 내려오다가 검은색 바위 위에서 따사로운 가을볕을 온몸에 받으며 겨울 날 집을 걱정하던 뱀 두 마리를 본 것도 떠올랐다. 그들도 인간처럼 추운 겨울을 날 주택 때문에 고민이 많은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에 이야기는 끊어졌고 그들은 바위 속으로 순식간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두 마리 모두 타조를 닮았는지 자기의 꼬리가 아직 밖에 있는 줄은 모르는 모양으로 들어갈 때의 속도보다 엄청나게 천천히 꼬리를 말아 넣었다. 황새 같은 부리가 긴 새라면 충분히 꼬리를 잡고 줄다리기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치적으로 고인돌 아래는 동면하는 뱀들이 엄청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돌탑에 기대지 말라는 것도 탑 안에 채운 돌 사이로 뱀이 많이 들어가서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인데 고인돌 아래는 인간의 body를 넣은 공간이 있고 위는 튼튼한 돌이 눈비와 바람을 막아주니 이보다 더 나은 피신처가 어디 또 있겠는가 말이다.
< 참 좋은 가을날이다. 쌍교차문(雙交叉紋) 7층탑에서 운주사 대웅전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쌍교차문(雙交叉紋)이란 탑신에 한 쌍의 X자 무늬를 새긴 것을 말한다. >
< 쌍교차문(雙交叉紋) 7층탑을 지나면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을 만난다. 석굴암에서 보듯 일반적 광배는 머리 뒤 둥근 형상인데 이 부처는 고호가 생명력이 살아 움직이는 물결무늬로 캔버스를 채우듯 구불구불한 불꽃 형태의 후광으로 전체 광배를 덮고 있다. >
< 이런 형태의 사진이었으나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왼쪽 부처가 또 잘린 형태가 되는 것이 못마땅하여 아래와 같이 짜깁기를 해 넣었다. >
< 사각형 연화 대좌의 석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반형 대좌의 부처까지 4구의 부처가 석불군 다를 이룬다. 오른쪽 부처도 단독 샷을 받은 셈이어서 그리 불만은 없을 듯하다. 좋은 컴퓨터가 부처 한 분 살린 셈이랄까? 어쨌든 모두 모인 터이라 내 마음도 상당히 흡족하다. 가족은 모여 지내야 좋은 법이니까. >
< 석조불감 앞 칠층석탑과 보물 797호, 석조불감 안의 부처. 불감이란 부처를 모시기 위해 만든 방이나 집이니 감실 부처란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 관심 있는 분은 읽어보기 바란다. 자판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
< 어떤 미술 하는 친구가 석조불감 앞을 차지하고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불감을 설명하는 글에 따르면, “이 불상은 머리 윗부분이 파손된 상태인데 넓고 편평한 얼굴에는 눈썹과 콧등의 일부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지만 목과 어깨부분이 붙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있는 반면 왼손은 어깨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와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어색하다. 광배는 불신과 약간 떨어진 뒤쪽의 판석에 두광과 신광의 구분이 없이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했는데, 불꽃무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설명으로 보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꽃무늬가 확실한 광배석불이나 그렸으면 나으련만 그려진 불상의 모양이 이미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그가 운주사의 졸(拙)을 추구하려고 했다면 그는 이미 성공한 것 같다. >
< 그래서 차라리 등을 맞댄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으니 미술학도의 흔적은 어느덧 사라지고 청량한 가을이 다시 살아나면서 번잡을 떠난 화순(和順)의 풍경이 화면을 채운다. 관점의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 운주사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3개가 있는데 구층 석탑과 석조불감, 마지막 또 하나의 보물이 바로 원형다층 석탑이다. >
불교의 출발지인 인도 탑이 원래 무덤 모양의 반구형인데 이것이 중국에 전파되면서 가옥 모양의 목탑형식으로 변했고 이것이 다시 우리니라에 들어오면서 풍파를 견딜 수 있고 오래 유지되는 석탑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각형의 석탑형식에 익숙해져서 이런 원형의 석탑을 이형(異形) 석탑이라 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운주사는 이형석탑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우린 탑이라고 하면 불국사의 석가탑 형식을 정도(正道)로 생각을 하고 그런 모양에 길들여진 것이다.
< 스리랑카의 Abayagiriya(아바야기리야) 다고바. 거대한 반구형이다. 다고바와 파고다(pagoda), 비슷하다. >
< 인도네시아 자바의 세계 3대 불교유적지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은 한마디로 하면 부처님의 무덤이다. 사각형 기반 위에 반구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반구형 위에 다시 안에 부처를 모신 스투파(stupa)를 두었는데 이 스투파도 반구형이다. >
< 스투파 안에 이처럼 부처가 모셔져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정말 엄청난 크기였는데 앙코르와트보다 300여 년 전인 824년 지어졌다가 지진과 머라피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엄청난 화산재에 묻혀 잊혔다가 1814년 네덜란드인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곳이다. >
<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지금의 인도에 해당하는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그 형태가 원형(圓形)에 가깝다. 어찌 보면 운주사 거지탑의 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물론 이게 진짜 허왕후가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각형은 인공이 가미된 모습이고 어쨌든 초기의 불탑은 원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런 탑들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탑이 대웅전 오른쪽 뒤 둔덕에 둥근 돌 넷이 포개져 서있는 원형구형탑, 일명 항아리탑, 혹은 바루탑이라 불리는 탑인데 본디 항아리가 7개였다고 한다. 다층탑은 3∼13층까지의 홀수탑이 기본이므로 항아리탑도 최소 5층에서 7층까지였을 것이며 이는 근처의 4층뿐인 명당탑도 같다.
< 그 옆에 있는 것이 명당탑인데 모양으로 보아 7층탑이 아니었을까. 이도 역시 일반적 탑의 형태에서 벗어났다. >
신라나 백제탑이 지닌 안정감이라든지 예술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고려 초에 만들어진 이 형편없는 탑들은 경제적 능력으로 인한 기술의 퇴화와 종교에 대한 믿음이 초래한 죄의식 없는 예술의 파괴행위를 보여준다. 운주사는 이형탑(異形塔)의 전시장이라 할 만한데 나는 그 이유를 미륵불과 연관해 생각하고 싶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와 낡은 세계와의 결별을 꿈꾸는 자들의 저항의식이 기존의 탑 모양마저 거부하고 이런 이형과 꾸미지 않은 자연석이나 모든 것을 감싸는 원형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겨우 7층탑의 몸 장식으로 넣은 것이 X를 두 개 교차해 표현한 정도이니 귀족과 상류층의 것이 아닌 힘없고 가난한 그들의 부처와 탑의 모양이 그들의 모습을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탑은 대강 옆 산에 흔히 있는 화산쇄설암인 응회암의 자연석을 얹거나 대강 판석으로 쪼개어 조각을 하다 보니 원형이 가장 쉬웠을 것이고 부처도 응회암으로 대강 조각해 큰 바위 아래 세워 두다보니 강도가 약한 응회암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지금 우리가 보는 이목구비가 밋밋한 형태의 부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화강암으로 만들고 그것도 절집 안에 잘 보관할 능력이 없는 민초들의 생활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머리에 눈을 지고 응달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과 같은 그런 고단한 삶이 아니었든가. 어찌 석굴 속에서 화강암으로 조각되고 돌봄을 받는 부처, 단단한 화강암으로 잘 결속되도록 짜 맞춘 솜씨 좋은 석공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의 삶은 민초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 석불군 마의 모습. 이런 것이 민초의 삶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오른쪽 두 부처는 감실의 형식을 취해 지붕이 있는 듯하다. >
< 비뚤어지고 부서지고, 일부는 없어져버린 탑을 배경으로 한 운주사의 대웅전. 원래는 운주사지였다가 이제 대웅전이 들어서 지(址)자를 뗄 수 있게 되었다. >
< 절 안에도 여기저기 어떤 것은 사각, 어떤 것은 원형의 부서진 탑들이 두서없이 서 있다. 아마 여기저기 발굴을 하면 수없는 탑이나 부처들이 숨겼던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
다시 대웅전 쪽으로 내려와 와불과 칠성바위가 있다는 오른쪽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니 넓적한 거북바위 위에 5층과 7층의 오누이 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계단을 오르는 탐방객을 내려다보는데 계단을 오르면서 보아 그런지 높이로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다.
< 오층탑과 칠층탑이 거북 바위 위에 나란히 서서 와불을 지키는 창검처럼 보인다. >
< 마지막 석불군 바, 영귀산 동쪽 산자락에 가∼마의 5군데 석불군이 있는데 비해 서쪽 자락에는 이곳밖에 없다. 바위를 감실삼아 9분의 부처가 계시는데 대좌가 12개이니 아마 3분의 부처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하다. “옮겨진 듯하다”란 말이 가지는 수많은 의미 중 과연 3분의 부처는 어떤 경우의 '옮김'을 당하셨을까? >
< 와불 가기 전 갑툭튀한 시위불. 운주사의 부처 중 가장 깨끗한 모습이며 온전히 형체를 갖춘 몇 안 되는 부처 중 하나.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불상이고 옆에 있는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두 불상을 지키듯이 아래 서 있는 머슴불상으로 표현되는 노사나불도 있다. “와불을 지킨다하여 머슴불로도 불리는 이 부처는 와불의 한쪽을 잘라내어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이 불상의 크기는 좌상의 와불 오른쪽에 길이 6m, 너비 95∼115cm, 두께 68cm의 채석 흔적의 크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래 와불을 삼존불로 조성하려 하였고 이 시위불이 그 협시불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자료출처: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
< 큰 부처가 앉은 부처(坐佛)로 비로자나불상이고 위에 있는 작은 입상(立像)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두 불상 아래 반듯하게 돌을 잘라낸 흔적이 보이는데 그 떼어낸 돌로 만든 것이 아래에 서 있는 머슴불상으로 표현되는 노사나불이다. 원래 와불을 삼존불로 조성하려 하였고 아래 시위불이 협시불이라 주장하는 근거가 이 떼어낸 부분이다. >
천불 천탑과 동시에 와불(臥佛)은 운주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예술성이 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9층과 7층 석탑, 감실부처와 같은 국가 보물급에도 들지 못하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73호로 지정을 받았을 뿐이다. 이 부처가 일어서는 것이 두려운 누군가가 고의로 그 가치를 폄하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음모론일까? (2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