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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황새말의 기억
바람 / 한상길
[참고] 이 글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황새말)에 소재한 초강초등학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쓴 글이다. 본인은 1965년 이 초등학교를 41회로 졸업 했으니 무려 60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이 글을 위해 이해를 돕자면 학교 주변엔 난계 사당이 1km 근거리에 있고 모든 지명 등은 학교를 중심으로 약 4~5km 쯤의 거리에 소재하고 있다. 막상 글을 마치고 보니 현재의 상황과 너무 커다란 괴리감으로 가슴 시렸다. 반면 젊은이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연세 지긋한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도록 권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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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빠르지...?
초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로부터 느닷없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갑자기 받은 전화라 그저 먹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자고 일흔 넘어 주고받은 안부가 너무 슬프고 짠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갑자기 우리 기수 동창회장이 100주년에 대한 글을 써 내란다. 할 수 없이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놓고 한 장씩 넘겨보니 아련한 꼬맹이들이 입을 앙다문 채 초롱 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을 뿐 막상 까마득히 먼 과거사를 떠올리려니 무엇을 써야 하나 그저 눈앞이 깜깜했다. 그런데 먼저 떠난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깨져버린 거울인 양 기억을 더듬어 볼 수밖에.
아물 한 기억으로는 1959년 3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입학하던 날 가슴엔 하얀 손수건이 매달려 있었고 꼬물꼬물한 또래들이 무척 많았었다. 병아리처럼 졸 졸 졸 따라간 곳은 커다랗고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바닥엔 가마니가 깔려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6.25 동란 중 교실이 불타는 바람에 임시 교사를 지어서 그랬단다.
당시 내 눈에 비친 학교의 모습은 북쪽엔 허름한 구교사가 있고 그 앞엔 신교사가 있었다. 동쪽엔 왜놈들이 세운 신사랑 내용을 알 수 없는 비석과 아름드리 벚나무가 있고 서쪽엔 햇수를 알 수 없는 플라타너스 뒤로 사택 그리고 남쪽엔 철봉 서너 개 그 뒤편엔 몇 그루의 수양버들이 실바람에도 하늘거렸다. 동구 밖 잿골 가는 논두렁길엔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데 잘 익은 팽을 따러 올랐다 떨어진 기억이 새삼스럽게 솟구친다.
봄가을 발이 닳도록 다니던 소풍은 난계 사당 근처에 소재하고 있는 옥계폭포 관어대 제천당 호서루가 단골이었다. 단 한 번 6학년 때든가 옥계폭포를 넘어 옥천군 이원면에 소재한 개심지로 소풍 간 적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편도 약 10여 km 그 먼 곳까지 걸어갔다 오느라 무척 고생한 생각이 아련하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지만 당시 경부선 1번 국도는 비포장에 자갈밭이라 어쩌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를 몽땅 뒤집어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풍 가는 날이면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마저 들떴다. 까닭은 거의 하루 삼시 세끼 꽁보리밥 아니면 죽만 먹고 자란 터라 쌀이 조금 섞인 김밥을 먹는다는 게 큰 기쁨이기도 했거니와 어쩌다 삶은 달걀 한두 개라도 보따리에 넣어주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용돈을 타내어 콜라나 사이다 등 군것질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부러웠던지.
선생님들은 가끔 5~6학년을 동원 난계 사당이 소재한 고당리 뒷산으로 토끼몰이를 가기도 했다. 당시의 산들은 땔감으로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가는 바람에 우리들의 키만 한 나무가 거의 없었고 그 까닭인지 토끼도 무척 많았었다. 지금은 산이 너무 우거져 토끼 보기 그렇게 어렵다는 시골 친구들의 전언이다.
우리 학급(41회)은 두 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는 2반이었고 6년 동안 단 한 번도 반을 바꾼 적이 없다. 한 반은 대략 70여 명 쯤 되는 콩나물시루였고 전학을 오가도 내 번호는 늘 60번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 중 어떤 여자 친구들은 나보다 키 큰 애들도 다수 있었는데 후에 안 사실은 늦게 입학하는 바람에 또래들보다 나이가 서너 살 더 먹었다는 것이다. 사연은 먹고살기 힘드니 집에서 일 시키느라 학교를 마지못해 보내야 했다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너나없이 거의 나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수준이었다. 고기라고 해봐야 기껏 물고기 토끼 닭 정도에 그마저 풍족하게 먹지도 못했다. 그래서 배곯은 아이들은 개구리 뱀 가재 등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것이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명절이 다가오거나 대소사가 있어야 겨우 돼지 한 마리 쯤 잡곤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봄에는 학교 오가는 길에 버들강아지 진달래꽃 삐삐라는 풀을 무수히 뽑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었다.
오늘에야 잘 사는 나라 중 열 손가락 안에 당당히 꼽히지만 당시엔 제일 못 사는 나라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는 그 지독한 가난을 탈출하려 절치부심 했는데 모름지기 이 나라 발전의 초석은 1930년~1960년생들이 아닌가 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까닭은 국가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독일 광부로 간호사로 베트남 전쟁터로 파병을 보내거나 사우디 등 열사의 나라로 돈을 벌려 수없이 떠나야 했던 숙명 같은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각계2구 내 고향 즘말-핏골에 사는 친구들은 학교 가는 십리 길이 정말 멀게만 느껴졌다. 오로지 걸어서 오가야 했기 때문에 겨울엔 삭풍 에이듯 불어대는 강바람 하며 모닥불 놓다 지각하거나 양말이나 검정 고무신(흰 고무신은 부자 집 아이들만 신었음) 태워 먹기 일쑤라서 선생님한테 혼나기 다반사였다. 게다가 당시 아이들의 영양상태가 너무 열약해 얼굴엔 허연 버짐이 피거나 더러는 머리에 도장 부스럼이 나기도 했다.
그 시절 국제적인 도움을 받게 되는데 처음엔 학교 정문 옆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고 강냉이 죽을 끓여 주다 그 후 가루로 배급 해 주었다. 그 다음엔 분유를 주었는데 그 먹는 방법을 몰라 그냥 맹물에 타 먹는 바람에 많은 애들이 심한 설사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분유를 물에 이겨 밥솥에 쪄 먹으면 된다는 말이 돌아 막상 시도해 보니 마치 돌멩이를 깨물어 먹는 것처럼 단단했다. 까닭은 채소 같은 음식만을 먹다 갑자기 지방 성분을 섭취하면 설사를 한다는 견해였다.
영동엔 한동안 미군 통신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의 쓰레기를 우리 동네 터널 앞 백사장에 버렸기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근거리 각계1구나 약목리에 사는 아이들 역시 너나없이 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더불어 살았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 쓰레기통 뒤지는 아이들을 볼 때면 옛 생각이 불현 듯 떠올라 가슴 뭉클하도록 서글퍼진다.
우리 동네 근처엔 기차 터널 세 개가 있다. 그 주변이 동란의 격전지라서 이산 저산 할 것 없이 터지지 않은 총알 수류탄 지뢰 포탄 등이 곳곳에 수없이 널려 있었다. 우리 동네서 멀지 않은 곳에 노근리가 있고 좀 더 지나면 추풍령 방어선이 나오기 때문에 터널 주변에서 격전이 엄청 심하게 벌어졌었다는 후문이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줄도 모르고 또래들은 총알을 주어와 모닥불에 얹어놓고 멀리서 지켜보노라면 빵 빵 빵 터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불행히도 그 때문에 비명횡사한 친구도 있었으니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무섭고 슬픈 일인가.
그 터널 세 개 중 하나는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로 쓰였는데 어느 해인가부터 나병 환자들이 그곳으로 대거 몰려 와 생활하는 바람에 무서워 그 길로 다니지를 못하고 산 중턱으로 난 길을 벌벌 떨며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때로는 상의군인들이 동냥을 오면 어린나이에 무서워 아무것이나 막 퍼주기도 하는 바람에 혼나기도 했다. 그 뿐인가 시골엔 무슨 귀신이 그렇게도 많다는 소문이 돌아 그믐밤 뒷간에 가려면 들일에 지친 어머니를 깨워 망을 보게 했으니 말이다.
순진한 마음에 봄이 오면 나비를 보았다거나 무슨 꽃을 보았다는 게 큰 자랑거리였고 민들레 개나리 진달래꽃을 보면 자랑스레 꺾어가기도 했다. 여름철엔 학급 전체가 초강천에 나가 온갖 물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목이 마르면 그 물을 그냥 퍼마시기도 할 만큼 깨끗했다.
상급생들은 겨울이 오기 전 솔방울을 따야 한다. 교실을 따듯하게 데울 연료가 필요해서다. 그만큼 나라 살림이 어려워 교실 데울 연료조차 지급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고 꽁보리밥 도시락이라도 싸가는 날엔 의례 난로 위에 수북 쌓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많은 애들이 점심을 굶고 물로 배를 채웠다는 사실인데 나도 그 중 한 아이였다.
요즘엔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만 숙제로 파리도 잡아가야 했다. 당시 애들 손바닥만 한 성냥갑엔 닭이 그려져 있었는데 닭 성냥이라 불렸다. 그것으로 한 통 이상씩 잡아가야했고 쥐를 잡아 쥐꼬리를 서너 개씩 잘라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송충이를 잡아야 한다며 산을 올라야 했는데 고사리 같은 여린 손이 송충이 가시에 찔려 가려움에 혼쭐나기도 했고 가을엔 아카시아 씨를 한 홉 이상씩 받아가기도 했다.
가끔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강제로 회충약을 복용시키기도 했는데 문제는 수업도중 기생충이 항문으로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바람에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차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당시 주변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그렇게 까지 했을까 싶다.
최고의 놀이라고 해봐야 기껏 재기차기 자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공기놀이에 가끔 여자애들 고무줄 끊는 심술을 부리기도 했는데 구슬이나 딱지 치는 아이들은 그 많은 구슬이랑 딱지를 따다가 무엇에 썼을까. 웃기는 것은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땅따먹기하다 학교 운동장을 몽땅 잃어버린 양 뭣이라고 그렇게 서러워했을까.
그 때도 왕따 당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남자 같은 경우 많은 구슬이나 딱지를 따면 나누어 주거나 잃어 주기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몽땅 가져가버리거나 여자 같은 경우엔 고무줄놀이를 하다 양보를 하지 않거나 혼자 점수를 많이 벌어 가면 사단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오는 벌칙은 <너랑 안 놀아> 였고 많은 아이들이 동조하며 수근 거리는 바람에 그 부모가 찾아와 선생님에게 일러바쳐 애꿎은 아이들이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나기도 했다.
개중에는 축구공을 가지고 있는 애들이 더러 있었는데 시합이 벌어지면 그 마저 몇 푼주고 빌려야 했다. 학교에 있던 두 세 개의 공은 툭하면 펑크 나고 바람마저 빠져버렸다. 그 공은 지금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가죽 속에 고무로 된 주부가 있고 그 주부에 공기를 불어 넣어 겉가죽을 마치 운동화 끈 매듯 했는데 그 공 가진 애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그래서 공이 너무 귀하다보니 동네 돼지 잡는 날이면 오줌보를 구해 마치 축구공처럼 차고 놀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때로는 상급생들이 자기 동네 앞을 지나가는 애들을 불러놓고 곧 잘 싸움을 시키기도 했는데 영문도 모른 체 다투다 코피 터지면 무조건 지는 것이었다. 툭하면 싸움 시키던 그 선배들 지금 두발 뻗고 잘 자냐...?
당시 초강리(황새말)를 제외하고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 없었다. 그 시절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월남 갔던 사람들이 귀국할 땐 전자제품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무슨 소용.
그래서 말로만 듣던 냉장고 텔레비전 전화기 라디오 등 전자제품을 처음 눈으로 접하고 마냥 신기해했다. 그 시절 통신수단이라고 해봐야 기껏 심천면에 소재한 전파 중계소에서 유선으로 보내주는 스피커에 온 가족이 귀 기울여 듣던 생각이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그 시절 최고의 히트작은 <섬마을 선생> 이라는 연속극이 엄청난 유행을 불러왔는데 시골 사람들은 그 연속극을 듣지 않으면 이야기 거리가 없어 왕따를 당할 정도로 대 유행이었다. 그 주제곡이 지금도 나이 지긋한 분들이 즐겨 부르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이다.
2023년 초강초등학교 홈페이지엔 현재 전체 학생 수 25명이라는 게 정말 믿기지 않을뿐더러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니 그저 놀랍기도 하다. 그 중엔 훌륭한 선후배 동창들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해지기도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려오는 고향의 추억들이 눈부시게 가슴을 적시게도 한다. 그러나 어느덧 노을처럼 붉어가는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듯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오늘 이 글을 읽는 동료나 선후배님들께 묻노니 인생사 슬픈 생각마저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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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한상길(韓相吉) 詩人 / 自=바람 1952년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2구(즘말) 출생 1965년 41회 초강초등학교 졸업 2000년 <문예2000>誌에 편운(片雲) 조병화(趙炳華)님 추천 등단 詩集= 내 숲 속의 푸른 섬 / 고향의 등불 共著= 모시울 가는 길 / 바람의 꽃 / 마음 닿을 수 있는 거리 / 삶의 크기 재기 / 새내는 흐른다 / 가을꽃은 슬프다 / 세종시향 외 다수 現 =세종시인협회 회원 / 白樹文學 회원 前 =朝鮮日報社 사원 mail=hancom99@naver.com https://blog.naver.com/hancom99 (고향의 등불) http://cafe.daum.net/hancom99 (내 숲 속의 푸른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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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각계1구 45회 김혜환 입니다. '초강초등학교 100주년'으로 검색을 하다가 발견했습니다.
카페에 가끔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급적 아래의 주소로 들어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의 글은 5월 초 아래의 주소에 게재 할 예정입니다.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ancom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