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정식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2012)』
최근 예수에 관한 자료를 찾다,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예수 연구 방향과 일치하는 책을 발견했다. 2012년에 출간하고 2015년에 재발간된 신학자 차정식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였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각도로 설정하고 그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결에 대한 아이디어를 성서 속 예수의 모습을 통해 추적하고 있다. 비록 시간적, 공간적 차이와 생각과 문화의 다양성으로 예수의 행적을 우리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 삶의 근본적인 동일성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예수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으로부터 올해 진행할 연구 방향을 좀더 체계화하려 한다.
예수의 행적에서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추출할 수 있는 태도는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정치’는 단지 행정적, 입법적 영역에서의 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세계에서 피할 수 없이 나타나는 문제이다.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의 작동을 점검함으로서 그 속에 포함된 인간들의 삶을 조정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성서 속 예수는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교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가 분노와 폭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부분 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권위’에 도전할 때이다. ‘성전정화’라 불리는 장면에서 예수는 환전상과 희생제물을 판매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성전이 타락되었음을 비판한다. 이렇듯 예수는 독점적인 체계로 권력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장시키는 특권계급의 위선과 횡포를 공격한 것이다. 특권세력에 대한 공격은 권력을 대치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이 가진 자의 축소와 갖지 못한 자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향한 길인 것이다.
정치적 회복은 종교적 권위 체계 뿐 아니라 이념과 세대와 관련된 위압과 공격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념은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모욕하고 파멸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며, 이러한 이념은 세대적 관계에 의해 강화된다. 저자는 성서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태 11:17)”라는 구절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를 비판하던 방식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분석한다. 금욕적인 세레 요한을 공격할 때는 예수의 시각으로, 세속적인 예수를 비판할 때는 요한의 시각으로 공격하고 있는 이념의 자의식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의 핵심은 특정세대가 자신의 권위를 무작정 강요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때 갖는 오만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해석의 관건은 피리소리와 상주의 애곡에 대한 조역 아이들의 반응여부보다 주역을 먼저 독점한 아이들이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무례한 억압과 원성에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 방식으로 구세대가 신세대를 핍박하는 행태야말로 예수가 탄식한 ‘이 시대’의 전형적인 모순이었다.” 저자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예수가 추구했던 하느님 나라의 토대를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는 독점적인 정치체계, 특정이념과 새대의 독단적인 지배가 철폐되어야 함을 파악할 수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은 신의 통치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최상의 조건으로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복지의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팔복’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복을 제시했다. 가난하고 애통하며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결코 제도적 외부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며 오히려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복의 내용은 인간이 자기 삶의 존재적 성격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며 삶의 주체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지’가 추구해야할 방향이다. 복지는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라 개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예수 또한 이런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에 ‘일용할 양식’이라는 물질적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성서 속, 다른 시간동안 일했지만 같은 임금을 지급한 ‘포도원 일꾼의 품삯’이야기는 예수가 보여주는 ‘복지’의 핵심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다. 자본주의적 성과와 효율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인간의 필요와 가치를 중시하는 복지의 핵심적 가치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동의 이야기를 통해 “공동체 한 사람이라도 복지의 혜택에서 배제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복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복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양극화를 극복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소수가 사회의 자산 대부분을 소유했을 때 다수는 빈곤과 결핍의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끊임없이 물질적 소유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그것은 소유의 과잉이 가져오는 양극화의 위험때문이었다. 예수는 결코 자본의 순환을 부정하지 않았다. 성서 속 ‘달란트의 비유’에서 예수는 주인이 준 돈을 투자하지 않고 방치한 하인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자본은 적절한 방법으로 투자하고 운영되어야만 전체적인 사회적 부가 증가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자본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장려했으며 문제삼은 것은 부를 장악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이기심이었다. 부가 누군가에게 편중되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때론 탕감과 증여의 방식이다. 채무를 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자신의 소유물을 사회적 약자에게 증여하는 것이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로 설정한 것이다. 이런 인간의 윤리적 태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제도가 수립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묘한 방식으로 부의 편중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토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했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지역이나 혈연의 폐쇄된 사고를 극복하는 ‘연고주의’의 배격이었으며,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고통받은 여성의 지위를 공고히하기 위한 ‘가족의 복원’이었고, 사기와 폭력을 통해 통치되는 세계의 극복이었다. 저자는 예수의 관점을 한국 사회 특히 한국교회에 적용함으로써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기독교의 내부정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예수를 통해 ‘한국교회’를 반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였다. 예수는 ‘고르반’이라는 신에 대한 의무를 핑계로 가족들 특히 부모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비판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과 매우 일치하는 모습일 것이다. “목사들은 목회를 하나님의 일로 여기면서 가족을 포함하는 일상적 인간관계의 신실한 관리는 세상일로 치부하는 어줍은 이분법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예수의 시각을 적용함으로써 변화를 위한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시각을 도출한다. 그런 시각은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과 공명하며 신실성을 갖는다. 단지 신앙적인 시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는 아쉬움이 있다. 신학자라는 저자의 한계 때문에, 어쩌면 ‘예수’라는 담론의 한계 때문에 최종적인 해결책은 종교적 색깔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폭력적인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행한 예수의 희생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유대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극복이라고 규정짓는 모습이다. “그(예수)는 소용들이 치는 폭력의 회오리에 침묵으로 응답함으로써 유대교의 전통사회에 희생양 체계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폭력의 사슬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무죄한 희생양을 자처함으로써 그들의 모방적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한 최종적 결론에서도 현실적인 해결을 넘어선 ‘신의 정의’에 초점을 맟주고 있다. “현실법정의 판결이 부정확하면 역사의 판결이 남아있다. 역사의 판결조차 어긋나면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영혼으로 마지막 심판의 저울애의 달릴 때가 있을 것이다.”
저자의 작품은 한국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예수의 시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최종 단계에서의 해결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신앙인들이 갖는 기본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예수’의 모습을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지켜야 할까? 예수의 언행과 활동 속에서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선 인간 보편적 삶의 지혜가 발견된다. 종교적 색채를 벗겨내고도 충분히 그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구체적으로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내가 진행하고 있는 예수 연구의 방향이다. 예수를 좀 더 순수한 철학적, 사회학적 환경 속에서 의미를 추적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시키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했던 일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차정식 교수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2012)』는 그런 작업에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을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공동체에서 작용된다. 출발부터 끝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