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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1절-13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는데 인간을 지으실 때에 영육 결합체로 지었습니다. 이성은 영의 작용을 받아가지고 욕을 움직여 나가는 기관으로 만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작용이 육에게로 건너오려면 필연적으로 이성을 통해야 만이 육에게로 건너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이성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짓는 것은 육이 짓는 겁니까? 즉 신체가 짓는 겁니까, 이성이 짓는 겁니까? 신체가 지어요, 이성이 지어요? 죽은 시체도 신체지요?
느끼고, 또 영의 희로애락의 그 느낌을 이성과 함께 느끼기도 하고 또 이성과 몸의 희로애락을 영을 제외하고 또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이 참 희한하지요? 신체위주로 만족을 느끼고 이렇게 살다가 보면 때로는 영이 이성과 함께 괴로워하기도 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분들, 살다보면 그런 경험을 간혹 하지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어떤 그런 사건 그런 환경이 있었으면 지나고 나면 이성과 함께 또 영이 괴로워하는 그런 걸 우리가 회개상태에서 많이 느끼지요?
불신자는 영이 죽은 상태로 있긴 하지만 이성이 심히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고통을 느낀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신체의 고통도 느끼고 만족도 느끼고, 마음의 만족도 느끼고 고통도 느끼고, 영의 만족과 고통도 또 느낄 수 있는 그런 신비로운 존재로 우리 인간을 지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 신체 하나만 편안하려고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마음의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요? 신체의 고통보다도 마음의 고통이 더 아프고, 마음의 고통보다도 영의 고통이 더 심합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어놓은 겁니다.
무형체인 마음이나 영이 죄를 짓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또 되어 있습니다. 죄를 안 지으면 고통을 안 느낀단 말이요. 참 신비로워요. 그리고 내가 또 죄를 짓게 되면 내 마음에 죄악성이 감염이 되는 것을 또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하나 지어놓으면 더 죄를 지어 들어가는 그런 게 또 있단 말이요. 그렇지요? 거짓말 한 번 하면 그걸 참말로 꾸며놓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는 그게 있지요?
이성도 영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또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반면에 내 이성과 몸이 영의, 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내 신체는 이성의 지배를 받고 또 이성은 영의 지배를 받고 영은 또 육체와 결합이 되고, 이렇게 성령은 주격이 되고 내 영은 소유격이 되어 이렇게 움직일 때는 내 중생된 영에게 대치나 항거나 거역이나 또 이성과 영과의 대립이라든지 그런 게 없습니다. 잘 통과가 된단 말이지요. 그런 상태가 된다면 죽음도 잘 통과가 되는 겁니다.
영 육 이성 모두 단합된 상태로서 있으면 영의 기쁨이 이성에게로 건너오고 이성에서 또 신체까지 건너와서 모두 기뻐지는 겁니다. 또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 없는 그런 상태로 되어질 때에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호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대립이 없어요. 전부는 호응입니다.
호응이라고 그러니까 뭡니까? 자칫 잘못하면 육의 편안한 어떤 그걸 연상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고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면에 있어서 중단 없이 이루어 나간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환경이야 인간보기에 또는 신체상의 고통스러운 그런 환경일지라도 그러나 거기에 감염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룰구원을 이루어 간다. 잘 이루어 간다 그 말이지요. 하등의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이 영의 기쁨이 되고, 또 영의 기쁨이 이성으로 건너오고, 이성에서 육으로 또 건너가고. 이렇게 되면 그 자기는 벧엘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없으면 벧엘생활을 못합니다.
대립성은 어디서 생기느냐? 보통 보면 대립성을 자기 몸 밖에서 환경에서 상대에게서 찾지요. 그러나 대립성은 항상 내 이성과 몸이 영과 대립이 되는 겁니다. 외적인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 오면 참 평안은 없어지고 점점 남방으로 가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외계적으로 준비해놓은 그런 것들이 다가와가지고 두들겨 패버립니다. 그 육체와 이성을 때린단 말이요. 왜 때리느냐? ‘성도야, 네 위치가 어디냐’ 그 말이요. ‘네 신앙위치가 어디냐’ 그 말이요. 단순히 뭐 ‘교회 나간다. 하나님 믿는다’ 그런 상태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그 신앙의 성분적인 면에서의 위치. 그 차원의 위치. 그걸 찾아 올라가야지요.
보통 보면 성도들이 두들겨 맞을 때에 그런 신앙성분의 차원적 위치를 찾으려고 그러지를 않지요? 안 그래요? 자꾸 단순히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어떤 행동 활동적인 면에서 자꾸 찾거든요. 그렇게 찾지 말고 자기 신앙성분의 차원적인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이해가지요?
그 아가서에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지요? 신부는 문을 안으로 잠가놓고 열어주지를 않고. 그 이제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넣어가지고 여니까 이제 문은 안 열리고 문틈에 피가 묻혀지지요? 손가락에 피가 흐르고. 그래, 이제 신랑은 가버리고 신부는 문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해가지고 거리로 신랑을 찾아나가지요. 밤거리로 쏘다니니까 술라꾼들이 두들겨 패가지고 얻어맞고. 그게 있지요?
자기의 그 위치, 신앙위치, 차원적 위치, 더불어서 자기의 이성의 위치, 자기 마음의 위치. 자기 마음중심의 정착지. 그 살 곳이 있잖아요? 자기가 머무를 곳. 그걸 언제든지 자기가 심사를 해야 돼요. ‘내 마음이 지금 어디로 떠돌아다니느냐? 어디서 살고 있느냐? 내 마음이 어디다가 수지를 맞추어놓고 살고 있느냐?’ 항상 그거를 늘 심사를 하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뭘 하든지 그 사는 방편에 있어서 일반적인 도덕성을 벗어나지 않는 한 뭐를 하든지 자기 마음의 수지성을 예수님에게 정착시켜놓고 구원을 위해서 구원에다 정착을 시켜놓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구원이면 동작을 하고 구원이 아니면 아무 동작도 말고. 우리가 구원목적으로 자기의 소원 목적적 사상이 그렇다면 어디서 뭘 하든지 그거는 구원으로 통과돼 나가는 겁니다.
이제 그런 신앙의 정신적인 그런 차원에서 생각지를 않으니까 오늘날 기독자들이 자꾸 신앙을 갖다가 종교생활을 어떻게 함으로써 자꾸 자기 신앙을 만족시키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오늘날 교회들 그 뭐 금요 철야기도니 뭐 하는 그런 거 그게 다 그겁니다. 그 참 못 쓰지요.
주님과의 인격적 결합이 신앙상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나가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쁘단 말이요. 하나님의 활동성이 영에 건너오고, 영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신체로, 신체에서 활동으로 이렇게 나타나게 되면 그 자기에게는 그 순간에 고통은 오지를 못합니다. 만족이란 말이요.
인생이 참 기쁨으로 살고 싶으면 영 중심으로 살면 그건 내적인 면에 평안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면 내적인 면에서는 전부 다 파괴가 돼버립니다. 외부적으로 기쁨을 준다고 해도 내적 평안이 없기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요가 외래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해도 내발적인 고통이 있는 한 바꿔놓지를 못하지요. 불행이요.
세겜을 이탈해가지고 벧엘에 들어오니까 제단을 쌓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나오지요? 제단을 쌓아가지고 제물을 바치고 수고를 해도 물질이 아깝지 않고 예수님과 더 가까이. 자기의 물질뿐만이 아니고 목숨도 내발적 기쁨도 그런 상태를 어떤 그 무엇이 와가지고 중지를 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벧엘이탈. 점점 남방으로 가게 되면 벧엘이탈. 애굽으로 가까이 가게 되면 먹는 문제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내도 다 팔아먹고 빼앗기고 말지요. 자기의 목숨 자기의 삶 자기의 사업 모두 다 예수님께 맡겨야 되겠지요?
아브라함이 이제 경험하고 올라왔는데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로 ‘모든 걸 다 예수님께 맡기라’ 하는 것을 가르쳐준단 말이요.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고통. ‘어떻게 사니 고통이 오더라. 어떻게 사니 최고의 기쁨이 오더라’ 하는 그런 것을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그러한 정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참 기쁨 참 만족은 참 행복은 벧엘생활에서 나옵니다. 기쁨이요 만족이요 행복이요, 벧엘생활만 하면 사건에 따라서 기쁨의 만족도가 달라집니다. 참 기쁨을 강하게 느끼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진하게 입으면 되는 거지요. 벧엘에서 만족, 벧엘에서의 기쁨, 벧엘에서의 행복, 벧엘에서의 즐거움. 절대의 느낌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벧엘에서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 그 면에 대한 만족을 못 느끼는 것이 감퇴요 부족이 되겠습니다. 벧엘의 기쁨과 벧엘의 만족과 벧엘의 행복과 벧엘의 즐거움, 거기에 대한 만족을 느끼게 되면 자기에게는 욕심이 없어져요. 세상적인 그런 욕심이 없어져요.
배고픈 것도 만족이 아닌 것은 고픈 거고, 배고픈 것은 기근. 기근이 오면 배가 고프지요. 배고픈 것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돈에 기근, 만족에 기근, 영광에 기근. 그 면에 대해서 배고픔을 느낀다고 그러면 그거는 기근입니다. 바울이 무엇이 부러울까요? 아무 것도 부러운 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을 떠나서 자기에게 만족과 행복과 쾌락을 줄줄 알고 남방 애굽으로 들어갔지만 그러나 양심 빼앗기고 진리 빼앗기고 신앙정조 빼앗기고 애굽에게 다 빼앗겼지요. 빼앗긴 게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 준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애굽으로 내려가면 반드시 그것을 빼앗기든지 주고 오게 되는 겁니다. 내려간다는 그 자체가 바꾸는 거니까.
그리고 자기가 자기 양심을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빼앗아 갈 자가 없다는 거. 그리고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서 빼앗겼는데 진리 빼앗기고 양심 빼앗기고 신앙정조 빼앗기고. 사라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신앙사상적으로 말을 해주는 겁니다. 아내를 빼앗겼다. 신앙정조 빼앗겼다. 진리 빼앗겼다. 자기 아내를 그렇게 했으니 그 양심을 팔아먹은 거 아니요?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빼앗길 때에 어떤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 이상 내발적 고통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 이상 내발적 고통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의 최고의 고통. 내려간 거지요? 회개치 아니하면 그 고통으로 영원히 지속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아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좇아와가지고 간섭을 했지요? 애굽 왕을 열병으로 앓게 하고 사라에게로 못 가게 했지요. 사라는 밀실에 있고, 죄는 아브라함이 짓고, 고통은 누가 당해요? 바로가 당하지. 바로가.
죄는 요나가 짓고 고통은 누가 당해요? 지중해는 큰 물고기가 없다면서? 고래가 있는지 모르겠어. 고래가 제일 큰 건지? 어쨌든 큰 물고기가 지중해에 없었다면 요나는 지중해에서 바다 속으로 내려가는데 큰 고기가 지중해가 아니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에 있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느라고 그 물고기가 얼마나 열나게 달려갔겠어요? 어쨌든 인간이 생각할 때에 요나가 물속에 빠져가지고 물을 꼴깍꼴깍 먹어가지고 죽기 전에 살려야 할 거 아니야?
죄는 성도들이 짓고 고통은 불신자들이 당하고. 육 고통 영 고통. 어쨌든 생각을 해봐요. 성도가 죄짓는데 무엇 때문에 불신자들이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느냔 말이요. 죄는 성도들이 짓고 고통은 불신자들이 당하고. 바로와 물고기는 성도들을 위해서 동원되는 거지요?
내 구원에 방해자가 누구냐? 알고 보면 방해자는 딴 데 없습니다. 알고 보면 마귀도 내 구원에 협조자지요. 원수들 덕분에 내 면류관이 만들어지지요? 환난 역경 핍박이 없다면 면류관은 만들어지지를 않지요?
금면류관, 면류관을 썼다고 하는 것은 상이다 그렇게도 되지만 승리한 사람이 슬플까요, 기쁠까요? 기뻐도 보통 기쁩니까? 그러니까 기쁨의 절정이다. 면류관 쓰면 기쁨의 절정이다 그 말이요. 면류관은 이김의 총채다. 또 기쁨의 만족. 이것으로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면류관 쓴 거다 그 말이요. 알겠어요?
아브라함은 손해 본 것을 깨달았어요. 시간도 경제도 안일도 정력도 위로도 모두 다 소모되어 버렸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만족이 없어. 그래서 회개해서 올라왔지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방행회개. 돌아오는 것. 인간의 참 만족 참 기쁨은 벧엘생활에서 된다. 애굽으로 내려가면 영육 고통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자는 아브라함을 보고 얼른 일어나야 할 것이다.
회개의 종류에 있어서 기본회개가 있지요? 성령이 나를 잡고 시켜준 것. 근본적 회개. 기본회개. 이 근본적 회개에서 존재적으로 ‘세상이냐, 천국이냐’ 하고 나누어지는 면을 알 수 있고, 또 세상으로 나가던 것이 천국을 향하여 되는 것이고, 또 중복회개라 그럴 때는 여기에서는 종별회개인데 성분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 그 때 그 때마다 성분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 그러니까 그 성분적인 면에서도 ‘세상이냐, 천국이냐’ 하고서 잡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여기에서 이제 자기의 영원한 소유적인 것이 좌우된다. 그런 것을 알아야 되겠다 그 말이요.
기도 올립시다.
세상 끝 날까지 저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에도 아브라함이 벧엘을 떠나서 이탈해가지고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는 상태와, 내려가서의 당한 고통과 또 남방 애굽으로부터 탈출해서 벧엘로 올라와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그 신앙의 상태를 저희들이 비교를 해 볼 때에 물론 그 때야 아브라함 한 인간의 지역적으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 그러한 사건이지만 저희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신앙사상적으로 저희들에게 보여주어 오늘날 저희들이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점점 나가서 벧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큰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언제든지 저희들의 마음의 수지성이 이성과 영과 신체 모두 결합이 되어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궁극적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그 마음의 수지성,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어 갈 줄 아는 당신의 복된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세상사람들은 언제든지 죄를 행동이나 활동에서 찾는 것으로 기준을 세우고 있지만 저희들은 이 시간에 그 마음의 중심점이 어느 방향을 쳐다보고 있고 어느 방향을 쳐다보고 흘러가고 있는 건지?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그 영적 신앙상태에서의 위치, 차원적인 그 위치를 바로 찾아서 제 자리에서 이탈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잘 이루어 갈 줄 아는 지혜롭고 복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