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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10-17절.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바울의 교훈. 요약설교
10-12절. 분쟁의 실상에 대해 말하고, 분쟁을 없이 하라고 말씀한 내용입니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 문제나 이단 사상으로 인한 싸움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문제로 인한 사람을 중심한 싸움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바울파, 바울 다음에 고린도 교회에 와서 목회했던 아볼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아볼로파, 유대인 신자들의 최고 사도인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바파,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이 세 파 중에 바울파는 비교적 복음적이었고, 아볼로파는 헬라 철학적이었으며, 게바파는 유대주의, 율법주의적이었고, 그리스도파는 교만하고,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었습니다.
2. 이처럼, 분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10절에서 “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분쟁을 종식시키려면,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할 뿐 아니라, 서로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고”(10:19),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26:26)고 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이 때 에베소에 있었는데(고전 16:8), 이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11절의 ‘글로애의 집 사람’ 편에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분쟁하라는 것은 진리와 공의와 예수님을 위하여 분쟁하라는 것이고, 인간을 중심하고 인간적 욕구 충족을 위한 분쟁, 시기, 원수 맺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화목하게 되는 것은 좋으나, 마귀나 이단, 비진리나 불의와 타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 글로애의 집
글로애는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여성도였습니다.
이 여성도는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그의 집 사람들’은 그 집의 노예들로서 고린도와 에베소 간의 빈번한 무역선을 이용하여 무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와 에베소 간에는 1주일에 2-3회의 무역선이 왕래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AD 54-56년, 즉 3년간 전도하는 동안( 행 19:8-10), 이 집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1-4장), 음행 소식(5장), 법정 소송(6장)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12절.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소위 고린도 교회의 4당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요(행 18,고전 3:6), 아볼로는 목회자요(행 18:27), 게바는 베드로로서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대표적인 유대인의 사도요(갈 2:8-9), 그리스도파는 앞의 3파보다도 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유대계의 분파였습니다.
이 네 파의 특징을 보면, 바울파는 복음적이고, 아볼로파는 헬라 철학적이며, 웅변과 지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고, 베드로파는 유대주의적 율법조항(유대교 장로들의 유전, 미쉬나-정결법 등)들을 지키고 유대교 전통의 할례를 받아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표적과 이적을 추구하는 미신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는 끝까지 바울을 반대했던 독선적인 분파였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할 때, 끝까지 거짓 사도들을 추종했던 분파였습니다. (고후 11:4, 13-15)
13-16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중심으로 나뉘어서는 안 되고, 바울 자신이 직접 세례 준 사람이 적은 것을 감사한 내용입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세례가 분쟁의 도구로 쓰였음을 나타냅니다.
세례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나(마 28:19),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4파로 나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을 중심으로 파당과 분쟁이 생긴 문제에 관한 해결점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즉, 바울파 신자나, 아볼로파 신자나, 베드로파 신자나, 그리스도파 신자도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롬 6:3-5), 바울이 세례 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요, 아볼로나 베드로가 그 세례 준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 절에서 바울 사도는 “어찌 나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나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나는 바울파’라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 그리스보
그리스보는 원래 유대교의 회당장으로서 바울에게 전도를 받아 온 가족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행 18:8).
사도행전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2. 가이오.
가이오는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과 그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부유한 성도였습니다(롬 16:23).
로마서 16:23.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이 AD 57년 초에 고린도에 3개월간 머무르면서(행 20:3) 로마서를 써서 보낼 때에도, 거처했던 성도의 집은 고린도의 가이오와 겐그레아의 뵈뵈 집이었습니다(롬 16:1).
두 가이오가 동일인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이 가이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고 사도 요한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요한삼서 1:1-5).
3. 바울의 사명은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와 게바파의 지도자들은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15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 바울은 고린도 교회라는 큰 교회를 설립하고서도 막상 세례는 몇 사람에게만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로 아볼로가 바울을 이어 고린도 교회를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이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문제로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나누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적은 수에게만 세례 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 믿는 것이 중요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를 중심으로 사람 중심의 교권과 파벌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자체는 우리 예수님이 규정하신 것이므로(마태복음 28:19), 예수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하지만, 세례의 형식은 구약의 할례처럼 구원받은 백성임을 교회 앞에서 인친 것이므로, 혹 예수 믿은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가 천국 백성임은 확실하고, 천국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16절.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 스데바나 집
스데바나는 아가야 지방(고린도, 아데네, 겐그레아는 이 지방의 큰 도성이었음)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고 교회에 봉사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고린도 교회의 3사람 성도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는 바울에게 와 있었습니다(고전 16:15).
이 사람들은 당시 고린도와 에베소 사이를 배 타고 일주일에 2-3회씩 오가면서 무역하는 사람들로서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에베소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사정과 문제점들을 질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교훈해주려고 고린도전서 7-16장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는 ‘---에 대하여는’이란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예컨대, 7장 1절에는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이라고 했고, 7장 25절에는 “처녀에 대하여는”이라고 했으며, 8장 1절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이라고 했고, 12장 1절에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이라고 했으며, 16장 1절에는 “연보에 대하여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바나를 포함한 이 세 사람의 교회 대표자들은 바울 사도가 쓴 이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 있던 바울에게서 고린도 교회에 전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14절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했다’고 말한 다음에, 16절에 와서 다시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말을 번복한 것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곁에 있던 스데바나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이 나서 스데바나에게도 세례 주었음을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시는 은혜롭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좀 유식한 말로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합니다.
17절.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사역자를 세우신 목적은 세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구세주시라는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오직 복음을 전하게
사도와 목사와 교사 등 주의 종은 파당을 형성함이 사명이 아니라 복음 전함이 그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방법조차도 웅변적 지혜로 해서는 안 되고(아볼로처럼, 행 18:24), 표적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게바파처럼, 고전 1:22 참조)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24).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혜자요 능력자라 할지라도(아볼로파, 게바파를 염두에 둠)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 무능한 자가 되어야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전 3:18-20)
2. ‘말의 지혜’란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헬라인들의 입맛에 맞게 말의 지혜로써 전도하지 않았고, 오직 순수하게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말의 지혜를 몰라서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헬라인들이 순수하게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분반토의 및 기도]
우리는 이 시간 구역이나 주일 학교나 소속된 부서에서 사람을 중심하여 친한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흠을 들춰내어 험담하거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괜히 미워하고, 자기들끼리 당을 지어 분쟁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시다.
유다서 1장 19절에는 “말세에 경건치 않는 자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보다 부자니까 미워하고, 저 사람은 우리보다 공부 많이 했으니까 미워하고, 저 사람은 우리보다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니까 미워하는 것은 없습니까?
교회에서 높고 낮은 지위나, 유무식이나, 빈부가 무슨 차등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온전히 합하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