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모든 부처님이 연설(演說)하시는 경전(經典)과 법문(法門)을 들을 수 있었다.1-27,2
급문제불 소설경법
及聞諸佛 所說經法
1-수행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방의 무량한 부처님을 뵙고 그 모든 부처님이 연설하시는 경전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음은, 법화회상의 서품을 연설하시는 당시에 대중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상태에서 불가사의한 무량의처의 경계에 들어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듣는 것을 가리킨다.
2-만약 부처님이 무량의처의 경계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 회중에 단 한 명의 대중도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설법을 듣는 경계에 들어갈 수 없다.
3-대개 보살은 시방 부처님들의 처소를 직접 찾아가서 설법을 듣는 예는 흔하지만, 지금처럼 시방의 부처님들에게 가지 않은 채 가르침을 듣는 예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이는 오직 법화회상에서만 일어나는 가르침의 특징이라 보아야하는 것이다.
4-열반경 서품에서 “부처님이 이른 새벽에 해가 이제 솟으려는 시각에, 광명을 놓아 -여래가 오늘 한 밤중에 열반에 들려하니 만약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보라.- 하심에 부처님이 하나의 음성을 하여 말씀을 하셨으나 시방에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은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들었다.”하시었다.
5-지금 법화경의 서품에서는 반대로 회상의 대중이, 시방의 제불(諸佛)로부터 각기 다른 음성으로 설법을 하시는 법문을,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알아듣게 되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자비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6-법화경에서 이르시길, “법화경의 법사는 비록 부모님이 낳아주신 육신의 귀로, 시방의 모든 음성 즉 자연의 소리와 중생의 음성과 성문의 음성과 보살의 음성과 부처님의 음성을 한꺼번에 듣게 되어도 귀가 파괴되는 일이 없고 모두 알아듣고 이해를 한다.”하시었다. 이는 서품에서 대중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모두 법화경의 가피에 의한 것이지 중생 개인의 능력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한다.
7-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이 법화경을 읽고 외우되 만약 모르는 것이 있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있으면 내가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32상의 거룩한 몸을 하여 다시 가르쳐주리라.”하시었다.
8-또 법화경에서 보현보살이 “부처님이시여! 제가 사바세계에 중생이 만약 법화경을 읽고 외우면 6상아의 흰 코끼리를 타고 보살의 무리와 함께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 가르침을 주겠습니다.”하시었다.
9-대개 요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아견(我見)에 깊이 집착을 하여, 부처님과 큰 보살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통해 이익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닦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이 부처님과 큰 보살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10-지금 법화경 서품에서도 이미 해탈지에 이른 모든 대중도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하여 무량의처의 경계에 들어가 시방의 무량한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처지인데, 하물며 요새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불도를 닦으려 하니, 마치 어린 아이가 겨우 말을 하고 걸을 만 하니까! 멋도 모르고 말을 하며 돌아다니려는 것과 같다.
11-부처님의 8만4천의 대장경에서 그 어디에도 혼자서 깨달아 부처님께 물어보는 글이 없다. 소승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모두 부처님이 직접 가르침을 주거나 내지는 광명을 놓거나 삼매에 들게 하거나 신통을 보여 주어 대중에게 깨달음의 이익을 주시었다.
12-부처님과 큰 보살의 입장에서 중생의 기준은 마치 6살 난 어린 아이와 같음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선종에서 화두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행위는 마치 이제 막 문자를 깨친 어린 아이가 모든 문자를 모두 이해한 것처럼 여겨, 부처님의 가르침을 버리고 어리석은 제 마음을 관찰해 깨달음을 얻으려하니 이는 “이제 나는 말을 할 줄을 알고 문자를 읽을 줄을 알며 혼자 걸을 다닐 수 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할 이유가 없다.”하는 것과 같다.
13-똥 막대와 바람과 깃발과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등 천박한 언어를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로 모르고 말을 하는 것과 같다.
14-농사를 열심히 지으면 저절로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농사를 지을 생각은 않고 가을에 추수를 할 생각만 하는 것을 가지고 선종이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맛있는 음식만을 생각하고 부모님이 어떻게 농사를 지은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이는 사교의(四敎儀)를 모르기 때문이다.)
15-또 깨달음에 인가를 받으려 하는 것은 마치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니, 밥을 먹었으면 구차하게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마치 정신이 이상한 사람과 같지 않으랴!
16-보살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방등보살은 제불에게 가르침을 들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법화경에서 “습토(濕土)를 찾았으나 아직 땅을 파지는 못한 것과 같다.” 반야보살은 제불에게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각자 필요한 가르침만 듣기 때문에,“습토를 찾아 땅을 파지만 아직 물을 보지는 못한 것이다.” 화엄보살은 제불에게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중생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습토를 찾아 땅을 파고 물을 보았으나 아직 물 맛을 보지는 못한 것이다.” 법화보살은 제불에게 가르침을 듣되 중생과 함께 하기 때문에 법화경에서 “보살이 성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들었다면 그 어떤 중생이든 빨리 성불을 할 수 있느니라.”하시었다. 따라서 “습토를 보았을 때에 바로 물이 있음을 알아차린다.”소승은 습토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물어볼 여력이 없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해주어 봐야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17-법화경을 읽고 외우고 베껴 쓰며 공양을 드린다면, 그 어떤 중생이든 문(聞)을 통해 불지(佛智)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을 일승문(一乘聞)이라 한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원래 원하든 것이 아니었는데 뜻 밖에 이익을 얻었다.”하신 것이다.
모든 부처님 역시 법화경을 통해 성불을 하였으니, 법화경은 제불의 스승이 되시고, 중생은 제불이 연설하시는 법화경을 통해 성불을 하니, 법화경에 왔을 때에는 제불과 중생이 둘이 아니므로 묘법제(妙法諸)라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모든 중생이 우리가 얻은 불도와 동등하게 되게 하리라.”하시었다.
모든 부처님이 법화경을 통해 성불을 하였다면, 법화경을 중생에게 연설해야만 법화경에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다. 또 중생은 부처님의 법화경을 통해 불도를 이루게 되니 역시 법화경을 열심히 읽고 외우며 베껴 쓰고 공양을 드리는 것만이 부처님과 법화경에 은혜를 갚는 길이다. 따라서 이를 연화설(蓮華說)이라 한다. 법화경에서 이르시길,“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등이 육바라밀을 가장 잘 닦는 것이 되느니라.”하시었다.
일승묘법연화경을 나누어서 그 제목을 말하면, 일승경(一乘經)과 묘법경(妙法經)과 연화경(蓮華經)의 법을 말한다. 이 삼경(三經)에 이미 삼신(三身)의 부처님이 계시니, 일승경에는 법신불(法身佛)이 계시고, 묘법경에는 보신불(報身佛)이 계시고, 연화경에는 응신불(應身佛)이 계신다. 따라서 법화경을 읽고 외우며 베껴 쓰고 공양을 드리는 모든 법화경의 중생은 이미 삼신의 불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이 법화경을 읽고 외우면 꿈속에서 부처님을 뵈고 가르침을 들으며 수기를 받고 왕이 되어 출가해 법륜을 굴려 무량한 중생을 건지고 열반에 들되 마치 섭이 완전히 타서 재가 된 것과 같으리라.”하시었으니, 이는 법화경의 구몽수행법(九夢修行法)을 말씀하신 것이다.
-偈頌-
법화경의 신통력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시어,
우리들 경전제자(經典弟子)
법화경을 읽고 외운 힘만으로도
제불이 현재 계시는 곳에서
불도를 연설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寶雲法師 經法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