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의사는 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 했던 육삼정 의거(六三亭 義擄)의 주역들입니다. [1, 2]
이 사건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의열단의 황포탄 의거와 함께 상하이 3대 의거 중 하나로 꼽힙니다. 세 분의 주요 행적과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 육삼정 의거의 전말
- 거사 계획: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상하이의 고급 요리점인 '육삼정'에서 중국 정부 요인들을 매수하기 위한 연회를 연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이는 중국 내 항일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음모였습니다. [1, 2]
- 체포와 미수: 세 의사는 폭탄과 권총 등을 준비하고 인근 음식점에서 대기하며 아리요시 공사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밀고자의 폭로로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 2]
- 의의: 비록 암살 자체는 미수에 그쳤으나, 국내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침체되어 있던 항일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1, 2]
2. 인물별 상세 행적
- 구파 백정기 (1896~1934):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일본 장기(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수감 중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의 나이로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셨습니다. [1, 2]
- 원심창 (1906~1971): 백정기 의사와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일본에 남아 박열, 이강훈 등과 함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의 전신을 창립하고 단장을 지냈으며, 언론인으로서 통일일보를 창간하는 등 재일동포의 권익 증진과 통일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 2]
- 이강훈 (1903~2003): 거사 당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형으로 1942년 만기 출소할 예정이었으나, 일제가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방구금소에 다시 수감하여 광복 후인 1945년 10월에야 석방되었습니다. 귀국 후에는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후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힘썼습니다. [1, 2, 3]
3.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해방 후 이강훈 선생 등의 노력으로 일본에 묻혀 있던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세 의사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세 분의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나란히 안장되어 국민장으로 모셔졌습니다.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함께 있습니다.) [1]
이 세 분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육삼정 의거, 혹은 이들이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단체(남화한인청년연맹)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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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17일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의사는 육삼정에서 ...
2022. 3. 17. — 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중국과 한국 신문들에 암살 계획이 대서특필되었고, 항일운동에 새로운 바람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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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원심창로' 에서 원심창 의사의 애국심을 느끼다 - NAVER
2021. 11. 16. — 중국으로 망명한 원심창 의사는. 백정기·이강훈 의사 등과 함께. 1933년 3월 17일,. 원심창 의사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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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 1896 - 공훈전자사료관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의사는 옥고 중 1934년 6월 5일 천추(千秋)의 한을 가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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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훈
청뢰(靑雷) 이강훈(1903~2003) 선생은 100세의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평생을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 역사 보존에 바친 독립운동계의 산증인이자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투사입니다. 육삼정 의거뿐만 아니라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 해방 후 사회 운동까지 그의 전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1, 2, 3, 4, 5]
1. 초기 활동과 만주 무장 투쟁
- 3·1 운동 참여: 1903년 강원도 김화(현 철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6세의 나이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며 항일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을 택할 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했습니다. [1, 2, 3]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행: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이후 만주로 이동해 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국경 정착지 자치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했습니다. 그곳에서 신창학교 등지의 교사로 활동하며 동포 청년들에게 항일 정신을 교육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 2]
2. 육삼정 의거와 잔혹했던 옥고
- 흑색공포단 조직: 1930년 김좌진 장군이 피살당한 후 다시 상하이로 이동한 선생은 유자명,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민족운동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개편하고, 그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습니다. [1, 2]
- 체포와 예방구금: 1933년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처단하려던 육삼정 의거 직전, 밀정의 고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 등에서 복역하던 중 감형을 받아 1942년 만기 출소할 예정이었으나, 일제는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방구금(기한 없는 구속)' 조치를 내려 도쿄 후추 형무소에 계속 수감했습니다. 결국 광복을 맞이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에야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1, 2]
3. 해방 후 행적과 독립운동사 정립
- 삼의사 유해 봉환: 해방 직후 일본에 머물며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인 거류민단 부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때 일본 현지에 묻혀 있던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봉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현대사의 시련: 1960년 귀국 후 혁신계 정당인 한국사회당에서 활동하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몰려 또다시 2~3년간 투옥되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 역사 편찬과 광복회장 역임: 이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및 독립유공자 공적심의위원을 지내며 『항일독립운동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독립운동대사전』 등 방대한 역사 서적을 저술하여 기록이 부실했던 독립운동사를 정립했습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제10·11대 광복회장을 역임하며 숨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1, 2, 3]
4. 서거와 안장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으며, 2003년 11월 12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되었고, 현재 서울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영면해 계십니다. [1, 2]
이강훈 선생이 참여했던 만주 신민부 시절의 무장 투쟁이나, 그가 평생 신념으로 삼았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의 특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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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이강훈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독립기념관
1915년 5월 부친을 잃고 이모가 사는 철원으로 가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국가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강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 9. 20. — 이강훈은 일제강점기에 … 공사를 포살하려 하였던 육삼정 의거를 기획한 독립운동가이다.
나무위키
이강훈(독립운동가) - 나무위키
이강훈 (1903.06.13~2003.11.12): 독립운동가, 호 청뢰. - 1919: 3.1운동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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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창
원심창(元心昌, 1906~1971) 선생은 일제강점기 상하이 '육삼정 의거'의 주역이자,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독립운동계의 거물이자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투사입니다. 해방 후에는 재일동포 사회의 기틀을 닦고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한 현대사적 중요 인물입니다. [1, 2, 3]
1. 14세의 만세 투사, 일본 아나키즘의 중심이 되다
- 3·1 운동 참여: 경기도 평택(현 팽성읍 안정리) 출신인 선생은 14세이던 1919년 4월, 고향 부용면 부용산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3·1 독립만세운동에 소년의 몸으로 직접 참여하며 항일 의식을 깨우쳤습니다. [1, 2]
- 도쿄 아나키즘 운동: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뒤 일제강점기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박열(朴烈) 등과 교류하며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했습니다. 선생은 기관지 『흑우(黑友)』를 발간하고, 흑풍회, 흑우연맹 등을 연이어 조직하며 노동운동 지원과 반제국주의 전선 형성에 앞장섰습니다. [1, 2]
2. 상하이 흑색공포단과 육삼정 의거
- 흑색공포단 가입: 193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유자명, 백정기, 이강훈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고, 아나키스트 민족운동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1]
- 육삼정 의거와 투옥: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백정기, 이강훈 의사와 함께 육삼정 근처에서 매복 대기했으나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 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선생은 해방이 될 때까지 무려 12년 6개월 동안 참혹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10월에야 석방되었습니다. [1, 2]
3. 해방 후 '재일민단' 창립과 '통일일보' 창간
-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이끌다: 출옥 후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좌우 대립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거류민단(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선생은 민단 사무총장을 거쳐 제11·12대 중앙단장을 역임하며 재일 한인 사회의 대부 역할을 했습니다.
- 평화통일과 언론 운동: 6·25 전쟁의 비극을 목도한 뒤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식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역설했습니다. 이를 위해 1959년 조국의 평화통일을 정론으로 삼는 재일동포 민족지 통일일보(당시 조선신문)를 동지들과 함께 창간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 2, 3, 4, 5]
4. 서거와 추모
1971년 7월 4일, 일본 도쿄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는 선생의 유물 260여 점을 전시한 원심창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운영 중입니다. [1, 2, 3]
(※ 최근 독립운동계와 재일민단을 중심으로 원심창 선생의 서훈을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상향하기 위한 서명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1]
원심창 선생이 일본에서 주도했던 흑우회 활동이나, 해방 후 재일동포 사회에서 조총련(친북 단체)과의 사상적 대립 속에서 전개한 활동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