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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9:1-21절) 제사장의 옷 163. 軍人들의 옷은 단추 하나라도 모두 전투행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일단 육군과 해병대는 단추가 다른데, 해병대는 배에서 상륙하기 위해서 그물을 타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단추가 겉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륙하면 뻘이나 진흙 구덩이가 많기 때문에 털이 겉으로 나와 있는 세무 구두를 신입니다. 그리고 해군이 빵 모자를 쓰는 이유는, 조난을 당했을 때, 빗물을 받아 마실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옷은 보통 세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가 편의성입니다. 즉 옷이 따뜻하다든지, 시원하다든지, 편하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옷은 멋과 화려함입니다.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할 수 있으면,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어 멋지게 보이려고 합니다. 주로 패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서 모델에게 입히는 옷은 화려함을 선보이기 위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직업을 나타냅니다. 군인에게는 군복이 아주 중요합니다. 군인은 육해공군에 따라서 복장이 다르고, 또 근무할 때나 전투할 때나 파티를 할 때, 각각 다른 옷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군인에게는 군복이 곧 사기요, 군기인 것입니다.
의사의 경우에는 언제나 흰 가운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청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예)화려한 옷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패션쇼를 하는 모델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운동선수들이 입은 유니폼이 멋있을 것입니다. 특히 운동선수들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린 유니폼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또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의 옷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옷은 왕의 옷이 아니라, 제사장이 입은 옷이었습니다. 특히 제사장이 입은 옷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것은 조끼처럼 생긴 에봇 인데, 이 옷에는 열두 개의 보석이 달려 있어서 아주 아름다운 빛을 발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사장의 옷이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옷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이 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옷을 입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제사장의 제사를 받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입는 옷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옷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미 모세가 하나님께 지시를 받을 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략적으로 대제사장이 입은 옷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Ⅰ.제사장의 옷 1절)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려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성소에서 섬길 때 입을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제사장이라 하라도 제사장의 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대제사장에게 더 특별한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즉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때는 아무 옷이나 사복을 입을 수 없었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제사장은 그 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병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그래서 위생에 있어서 철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은 죄를 치료하는 곳이며, 인생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옷이 필요했다는 것은 인간의 알몸 상태는 죄에 빠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옷이 필요 없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우리 인간의 몸에는 하나님의 빛이 있었고,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는 몸이 변했고,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범 죄한 인간은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 죄한 인간들을 낙원에서 쫓아내시면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인간의 수치스러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한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가죽옷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짓게 하시면서 제사장에게 입힐 옷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 옷은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가릴 수 있는 의로운 옷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이 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결국 이 제사장의 옷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입히실 의(義)의 옷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수치를 다 닦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義)를 물려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이 옷은 아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어느 누구도 우리를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서 수치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왕의 잔치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왕의 아들의 결혼 잔치를 하는데, 먼저 초청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가만히 있다가 막상 잔칫날 모두 초청을 거절하고 보이콧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잔치를 취소하지 않고, 처음에 전혀 초청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아서 이번에는 길거리나 산울타리 같은 데로 가서 걸인이나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이 왕의 잔치에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했는데, 왕이 잔치에 초청된 손님들을 보러 왔을 때, 모두 예복을 입고 있어서 가난한 사람인지, 장애인인지,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사람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아무나 다 잔치에 초청이 되니까 이 잔치를 시시하게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참석해도 되는 줄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왕의 예복보다는 자기 옷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과 잔치에 청함을 받고도 오지 않은 자들을 모두 어두운데 끌고 가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우리 자격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 문은 참으로 이상한 문입니다. 자기 노력이나 자기 공로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바늘구멍처럼 작아져서 절대로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자기 자랑의 옷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자에게는 천국 문이 활짝 열려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는 모두 세상의 옷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세상에서 아무리 장관이고, 사장이고, 장군이라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모두 예수 믿는 한 성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장군 계급장을 달고, 천국 문 앞에 서면, 위병들이 모두 나와서 경례를 할 줄 알지만, 천국 문은 철저하게 닫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세상의 자격을 가지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옷은 모두 벗어 버리고, 예수 믿는 성도로서 한 형제요, 한 자매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제사장이 누구냐? 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사장의 옷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개인을 보고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보고 제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개인이 신앙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바로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그 옷으로 다 막을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 제사장의 옷은 오래되면, 낡을 수도 있고, 또 제사장이 죽으면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부활한 몸으로 영광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십니다. 히7:23-24절)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부터 훌러 내립니다. 마치 우리 집에 있는 수돗물이 시원한 땜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땜은 마르는 법이 없고, 오염되는 법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우리 집에 있는 수도가 막힐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회복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이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우리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제사장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언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할지 모르고, 또 진노의 심판이 임하는 순간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인내를 거두시는 순간 그들은 한 순간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모든 죄를 가리며,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도록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보호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떤 보호막 안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호됩니까? 믿는 자들의 마음에 날마다 성령을 부으셔서 그 마음에 새롭게 하심으로 보호하십니다.
지옥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일어나는 분노는 지옥불입니다. 이것이 억제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어느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재앙에 의해서 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스스로의 분노에 의해 망합니다. 모든 사고도 따지고 보면, 대부분 분노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분노가 가득 차 있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또 분노한 상태로 어떤 기계를 조작한다면, 과격하게 조작해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많고, 정권을 잡은 자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차면,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파괴하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은 그 속에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가 계속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노리고 있는 다른 사람의 분노로부터도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하셔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마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늘 똑같습니다. 그리고 한번 안전장치가 풀어지는 날에는 재앙이 일어나고 맙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날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하는 짓이 늘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히7:25절)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는 결과가 무엇일까?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지 않고,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도 성령의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또 절망 중에서도 소망이 있고, 낙심천만한 일 가운데서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Ⅱ.아름다운 에봇 2-5절)그는 또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을 만들었으되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실을 만들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에 섞어 정교하게 짜고 에봇에는 어깨 받이를 만들어 그 두 끝에 달아 서로 연결되게 하고”
아마 이 세상에서 대제사장의 에봇 만큼 아름답고 비싼 옷은 없을 것입니다. 이 옷은 그 당시에 가장 귀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 놓았을 뿐 아니라, 금을 얇게 쳐서 실을 만들어 이 실들과 함께 짰습니다.
에봇 위에 매는 끈도 이런 실로 수놓았고, 양 어깨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호마노라는 보석에 새겨서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는 열두 개의 서로 다른 보석을 달아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 보석들은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대제사장이 입은 옷이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시는 모습입니다. 먼저 어깨에 매단 커다란 두 호마노를‘기념보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늘 상기시키는 보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제사장에게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어깨의 두 보석이며, 여기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호마노는 누런색이기 때문에 여기에 새겨진 이름은 눈에 잘 뜁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잊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어려울 때도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어’라고 생각하면서 자표자기하고 우리의 이름이 호마노에 도장처럼 새겨져서 늘 하나님 눈앞에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잊어버리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새겨져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이런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배알(拜調)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장이나 회장처럼 높은 사람을 면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리 비서를 통해 깨끗한 명함을 제출해야 합니다. 명단에 없는 사람은 배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은 호마노에 새겨서 하나님 앞에 제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든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이름이 이미 제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절당하지 않는 확실한 보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셔도 우리에 대한 더 나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가슴에 매단 열두 개의 보석은 열두 지파의 가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10-13절)그것에 네 줄 보석을 물렸으니 곧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 첫 줄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이라 다 금 테에 물렸으니" 제사장의 가슴에 달려 있는 열두 개의 보석은 이스라엘 백성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래 변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 아니라, 말씀으로 변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모두 보석인데, 색깔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른 색깔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귀한 보석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석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루는 반짝이 다가 그 다음날은 색깔이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보석의 가치가 없습니다.
또 자기가 기분이 좋을 때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저주를 퍼붓는다면, 그것은 보석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변하고, 영적 상태도 기복이 심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꾸준히 자라게 되면, 기복이 적어지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누구든지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왜냐면 모든 것을 처음 겪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감정의 기복이 적어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숙하게 되면, 한 결 같이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똑같은 색깔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석 중에서 어떤 것은 빨간색이고, 어떤 것은 초록색이고, 또 노란색을 띤 보석도 있습니다. 자수정 같은 것은 보라색입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결 같이 뜨겁습니다. 이런 사람은 홍옥 같은 보석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한 결 같이 투명하고 정직합니다. 그런 사람은 흰색의 보석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말씀에 깊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데 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그 보석들이 거기에 붙어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즉 따로 굴러다니면, 금방 잃어버립니다.
같이 붙어 있어야 빛나는 법입니다. 따로 돌아다니는 보석은 자기 자랑은 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공동체적이지 못한 것은 이 구원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닙니다. 최고의 궤계(詭計)와 기술(技術)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용사입니다. 그런 자를 이기려면,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중심으로 붙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마귀를 이긴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습니다. 교회는 커지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는 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교회다운 모든 기능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른 형제나 자매의 유익을 위해 바쳐지고 사용될 때, 이것이 주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고, 참된 은사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는 은사는 혼자 돌아다니는 은사이며, 다른 사람을 위해 회생당하기 싫은 자기 자랑의 은사입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Ⅲ.제사장의 위기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에봇 외에도 다른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들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입어야 할 옷은 에봇을 받쳐 입는 긴 청색 옷과 속옷과 고의와 머리에 쓰는 관입니다. 제사장의 옷은 발끝까지 덮이는 긴 옷인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일체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긴 제사장의 옷은 청색으로 만들었고, 옷 끝에는 돌아가면서 금방울과 금 석류를 매달게 했습니다. 24-26절)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그 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고 순금으로 방울을 만들어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석류 사이사이에 달되 방울과 석류를 서로 간격을 두고 번갈아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여기서 궁금한 것이 석류입니다. 옛날 학자들의 주석을 보면, 석류를 율법의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석류가 껍질은 푸르고 단단하지만, 그 안에는 달콤하고, 붉은 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석류를 보면서 실제로‘이것이 율법이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 옛날 사람들은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무섭고 딱딱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 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성소나 지성소 안에 들어간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옷 끝에 매단 석류와 방울이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방울은 자기 혼자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석류와 부딪쳐서 소리를 내야 합니다. 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움직일 때, 이것이 소리가 나면, 제사장은 살아 있는 것이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항상 방울과 석류가 부딪치면, 소리가 나야 한다는 것이 고정관념처럼 머리에 박혀 있어야 합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방울이나 방울이 없는 석류는 제사장들에게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농담이라도 제사장에게 소리가 나지 않는 방울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에는 항상 방울 소리가 나야합니다. 그냥 방울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만 울려 소리를 낼 때,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것이고, 이런 말씀의 소리가 없고, 양심 감각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양심에 부딪쳐서 자꾸만 소리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치면,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이것이 괴롭기 때문에 양심의 벨소리를 죽여 놓으면, 이것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속옷을 입었습니다. 특이한 것이 고의(袴衣)입니다. 고의는 팬티를 의미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운 지방에 살아서 그런지, 고의를 입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靈) 이시기 때문에 고의를 입든, 입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고의를 입게 하신 것은, 인간은 워낙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도 불순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의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 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부정한 쪽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가장 거룩한 곳에서 가장 추악하고, 음란한 것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물론 고의를 채운다 해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평소에 입지 않는 팬티를 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조심하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인도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혹은 설교를 하면서 함부로 혈기(血氣)를 부리거나, 악(惡)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팬티는 거룩한 팬티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생각을 하도록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예화를 아주 지저분하고 유익하지 못한 데서 끌어 오기도 하는데, 이것도 삼가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머리에 관을 씌우고‘여호와께 성결’이라고 도장을 새기듯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자신의 생각까지 통제해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장의 직분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방울이나 고의나 머리 패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분은 사실 나체로 십자가 위에 달리셨고, 군인들이 그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셨기 때문에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했으며, 그의 마음은 끝까지 거룩했고,‘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루려는 생각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잡아 놓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생각에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든지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할 수 있고 실제로 남을 위하는 거룩한 기도의 시간이나 만남에서도 얼마든지 악(惡)한 생각들이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머리에‘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붙인 것은 우리의 생각은 거룩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팬티를 입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언제든지 악(惡)한 충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고백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지켜 줍니다.
그래서 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만남이나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이것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사장의 이 아름다운 복장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적나라한 본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을 덮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이상 벌거벗은 수치를 당할 위험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흰 옷을 입은 몇 사람만 나와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옷을 입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한 의(義)의 옷을 입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위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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