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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31샤롯데피천득문학수상작품전체평
피천득의 이름 아래, 수필은 어디로 가는가
제3회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작을 읽으며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나는 사십 년 동안 수필을 써 왔다. 그 긴 시간 동안 지켜 온 믿음이 하나 있다. 문학은 변해야 하지만, 문학이 문학일 수 있게 하는 근간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지면 소재와 표현이 달라지고,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변한다. 삶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들이는 수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수필을 읽으며 거듭 묻게 된다. 수필은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가. 무엇이 수필의 발전이며, 무엇이 다른 장르의 문법을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 결과인가. 제3회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들을 읽으며 이 질문은 더욱 무거워졌다. 「누런 수의」 「오래된 현재」, 「상속」, 「곰팡이의 은거」, 「돌보는 마음」, 「쇳내」, 「기계에게 보는 법을 가르치며」, 「다시, 고사리 앞에서」는 기억과 상실, 가족과 돌봄, 사물과 기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의 수필이 다양한 소재와 표현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변화가 어디까지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는지 생각하게 한다.
수상 작품 여덟 편을 다 읽고 한참 덮어 두었다. 사십 년 동안 수필만 쓰고 수필만 읽고 수필만 평해 온 사람이 받은 첫 느낌은 반가움과 낯섦이 반반이었다. 문장은 분명 좋아졌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알던 수필인가 하는 물음이 쉬 가시지 않았다.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수필 부문은 피천득의 이름을 걸고 있다. 피천득은 우리 수필이 지켜 온 담담함과 청초함, 체험의 진실성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 이름 아래 뽑힌 작품들이 오늘의 수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일은 한 문학상의 평가를 넘어선다. 지금 한국수필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 가지를 묻는다. 수상작들은 전통 수필의 개념에 비추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었는가. 그 바뀜은 발전인가, 단지 변화인가. 그리고 이 흐름이 이어질 때 수필의 내일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그 내일을 위해 심사와 문단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2. 수상자 명단이 먼저 말하는 것
작품을 읽기 전에 작가 약력부터 펼쳐 보면 이번 수상의 성격이 먼저 보인다. 여덟 명 가운데 수필 문단에서 오래 활동해 온 작가는 우수상의 박종희와 장려상의 문경근 둘뿐이다.
대상의 이승준은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지방에서 개인사업을 하며 틈틈이 글을 써 온 생활인이다. 최우수상의 노경수는 동화작가이고, 정현우는 신춘문예로 나와 시집 세 권을 낸 시인이다. 우수상의 정수우는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 드라마 기획을 해 온 콘텐츠 작가다. 장려상의 천동현은 2003년생 공학도이고, 최현경은 수필과 시, 동화를 함께 쓴다.
수필 문단의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했고, 수필 문단의 안쪽 사람들은 그 아래에 섰다. 이 사실을 두고 타 장르가 수필을 점령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대상은 기성 문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생활인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온 이들이 상위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이 글은 그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거기서 수필 문단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묻고자 한다.
3. 대상 - 이승준 「누런 수의」: 사색 수필의 귀환
「누런 수의」는 다른 일곱 편과 종류가 다르다. 일곱 편은 체험이 중심이고 사유가 그것을 해설한다. 이 작품은 거꾸로 매미 허물이라는 사물 하나를 붙들고 생각의 층을 차례로 내려간다. 곤충의 우화와 키틴질에서 출발해, 일본어 '우츠세미(空蟬)'가 본래 현세의 사람을 뜻 했다는 어원을 지나 이승과 저승의 사유에 이른다. 그다음에야 할아버지의 발인이라는 체험이 오고, 배냇저고리와 고치와 요람으로 연상이 번지며,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입었던 옷들의 목록으로 닫힌다.
이 구성은 김진섭과 이양하가 열어 놓은 사색적 수필, 우리가 중수필이라 불러온 전통에 닿아 있다. 근래 공모전 수필이 거의 체험 회고 일색이었음을 떠올리면, 사물을 끝까지 생각하는 이 글이 대상에 오른 것은 반가운 일이다.
가장 빛나는 대목은 발인 장면이다. 수의를 입고 누운 할아버지를 화자는 "갓 허물 밖으로 나온 매미처럼" 뽀얀 빛으로 누운 모습으로 본다. 수의는 "날개옷"이 된다. 주검을 막 우화한 생명으로 뒤집어 읽는 이 시선 앞에서 죽음은 울음의 대상이 아니라 변태의 한 순간이 된다. 이어 삼베 배냇저고리에 담겼다는 "부스럼 나지 말고, 가렵지 말고, 잘 참으라"는 축원을 할아버지의 수의에 되돌려, 이제 부스럼 날 일도 가려울 일도 없으시니 편안해지시라고 속으로 인사한다. 다른 수상작들이 애도를 울음으로 치렀다면 이 작품은 덕담으로 치른다. 그 축원의 출처를 모른다고 밝혀 두는 정직함도 수필다운 미덕이다.
후반부의 열거는 형식 자체가 의미가 된다. "~하면서."로 끊기는 미완결 문장들이 이어지는 사이로, 이십여 년 땀을 받아낸 검도 바지, 오버로크만 떼어 물려 입던 아버지의 근무복, 조카의 돌옷, 각질 묻은 외할머니의 환자복, 사고로 누워 죽을 흘리던 화자의 수술바지가 지나간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옷으로 다시 쓰이는 일종의 연도(煉禱)다. 그리고 결말에서 수의를 상상하던 화자가 옷장 앞에서 보는 것은 수의가 아니라 "나의 수많은 배냇저고리들"이다. 벗어 둔 모든 허물이 실은 새로 태어날 때의 옷이었다는 이 반전은,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이미지 하나를 뒤집는 것으로 글을 닫는다. 여덟 편 가운데 가장 좋은 결말이다. '허물'이 벗은 껍질이면서 과실(過失)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울림도 은근히 작동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을 것이 있다. 첫째, 서두가 약하다. "탐험할 미지의 세계"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같은 첫 단락의 상투어는 작품 전체의 격에 미치지 못한다. 레지던스의 밤, 허물을 가득 채운 유리병이 놓인 책상에서 바로 시작했다면 훨씬 강했을 것이다.
둘째, 지식이 소화되지 않은 채 드러난다. 우츠세미와 『겐지모노가타리』 대목은 교양 강의의 말투이고, "얼마나 기묘하고도 낭만적인가"라는 자기 감탄까지 붙어있다. 인용한 지식이 사유를 밀어주기보다 사유를 대신하는 순간이 있다.
셋째, 관념이 논증이 아니라 단언으로 처리된다. 저승이 "완전한 자유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라는 대목이나, 수의가 "스스로 벗지 못한 삶의 마지막 허물로서 추억된다"는 문장은 거듭 읽어도 논리가 선명하지 않다. 사유형 수필에서 사유의 문장이 흐려지는 것은 작지 않은 결함이다. 수의가 한 대목에서는 벗어 둔 껍데기이고 다른 대목에서는 날개옷이 되는 비유의 흔들림도, 결말이 어느 정도 화해시키기는 하나 의도된 변증인지 관리되지 못한 미끄러짐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넷째, 체험의 피가 얇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손자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수의라는 사물을 보여 주기 위해 등장할 뿐이다. 관조의 품격을 얻은 대신 사람의 체온을 잃었다. 또 배냇저고리를 보여 준 '지인'이 어느새 "화사한 치마를 입고 오던" '당신'으로 바뀌는데, 같은 사람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시적 모호함은 시에서는 미덕이지만, 수필에서는 독자와 맺은 '이것은 나의 삶'이라는 약속을 흐린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대상은 합당하다고 본다. 수필의 본령인 '사물을 통한 존재의 사유'를 여덟 편 가운데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고, 죽음을 다루면서 감정을 부풀리지 않고 관조와 해학으로 넘어선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압도적인 대상은 아니다. 필자라면 정수우의 「돌 보는 마음」과 끝까지 저울질했을 것이다.
4. 최우수상 — 이야기의 힘과 문장의 밀도
노경수 「오래된 현재」 - 여덟 편 가운데 이야기의 힘이 가장 센 작품이다. 대전 변두리 자취집의 공동 수돗가, 방문 앞의 빨간 구두, 몇 번이나 풀었다 다시 뜬 꽈배기 무늬 조끼, 감청색 공군 제복, 통금 사이렌. 장면을 이루는 소품들이 모두 살아 있다. 백미는 그가 사우나에 간 사이 그가 데워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대목이다. "삶은 달걀노른자처럼" 아늑했다는 비유는 겪은 사람이 아니면 건지기 어려운 감각이다. 여관 장면에서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는 절제가 이 글의 품격을 지킨다. 화자의 이름 '경수'가 대화 속에 그대로 등장해 체험의 진실성을 받쳐 주는 것도 수필답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글이 흔들린다. 회사 세무조사와 경리부장 퇴사 일화가 이어지면서 글은 연애 회고에서 처세담으로 급히 방향을 바꾼다. 둘을 잇는 고리인 '그가 들려준 말들'은 서두에서 잠언 몇 줄로 나열되었을 뿐, 그것이 실제 삶의 어느 장면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삶의 가치관을 세워준 인연"이라거나 "나를 부자로 살게 한다"는 마지막 진술이 증명 없는 결론으로 남는다. 키와 몸무게, 하우스 모델 경력을 밝히는 대목이나 어린 왕자에게서 빌려 온 "꿀 빛 새벽"은 글의 결을 흐린다. 이별의 이유가 끝내 비어 있는 것은 소설이라면 결함이겠지만 수필이기에 오히려 정직하다. 아쉬운 것은 그 정직한 공백을 결말의 교훈 진술이 덮어 버렸다는 점이다.
정현우 「상속」 - 문장만 놓고 보면 여덟 편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빨랫줄로 열어 빨랫줄로 닫는 수미상관, 폭설 속 전선 위에서 서로 몸을 붙인 새들, 물질하러 들어가는 어머니의 등, 손바닥 위에 놓인 차가운 전복. 시인의 눈으로 건져 낸 이미지들이다. 서류에서 이름을 지우는 법적 상속과, 늦게 잠드는 버릇과 걱정을 숨기는 성정이 건너오는 삶의 상속을 겹친 발상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수필의 경계를 가장 크게 흔든다. 우선 시간의 층위가 어지럽다. 2025년 1월의 일기는 "벌써 이 년"이 흘렀다고 하는데, 2월의 일기에는 연명치료 서명과 "아직 당신은 살아 있는데"가 현재형으로 섞인다. 회상으로 읽을 수는 있으나 시제가 그것을 받쳐 주지 못한다. 폭설주의보의 새벽과 눈발 속의 전화가 두 일기에 거듭 나오는데, 의도된 후렴인지 퇴고의 흔적인지 독자는 판단할 수 없다. 다음으로 '당신'이 모호하다. 첫 일기는 연인을 잃은 글처럼 읽히고, 추신의 벚꽃 아래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을 털어 주는 장면도 연서의 어조다. 끝으로 기도문과 울음의 직접 서술이 많다. 피천득이 지킨 담담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글을 산문시나 서간체 시로 내놓았다면 필자는 전적으로 상찬하겠다. 그러나 수필로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번 심사가 수필의 사실성이라는 약속보다 문장의 밀도에 더 큰 무게를 두었음을 보여 준다. 그 기준이 옳은지는 뒤에서 다시 묻겠다.
5. 우수상 — 모범 답안과 새로운 모델
박종희 「곰팡이의 은거」 - 전통 수필의 문법을 가장 성실하고 숙련되게 구사한 작품이다.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로 옮겨 가고, 사람에게 이르러 깨달음에 닿는 정석을 그대로 밟는다. 곰팡이가 매끄러운 합성 섬유보다 숨 쉬는 천연 섬유에 더 잘 번진다는 사실을, 거절을 모르는 남편과 빗장을 지르는 세태의 대비로 끌어온 비유는 정확하고 신선하다. 친구의 사정을 외면하지 못해 카드로 긁어 온 토르마린 찜질기 열 대, 마음에 들지도 않는 구두 세 켤레 같은 구체가 비유를 허공에 뜨지 않게 붙잡는다. "물론 곰팡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며 미화에 제동을 거는 균형 감각도 노련하다. 약점은 지나친 친절이다. 곰팡이는 마른 곳에서 피지 않는다는 원리를 서너 번 바꿔 가며 되풀이해, 독자가 이미 알아들은 비유를 거듭 풀어 준다. "서슬 퍼런", "지독한", "억척스러움" 같은 상투적 수식도 잦다. 결말은 정직하지만 예측 가능하다. 우리 수필 문단의 모범 답안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이 이번 심사에서 생활인의 사색과 시인의 산문 아래에 섰다는 사실을, 수필 문단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수우 「돌 보는 마음」 - 필자는 이 작품을 새로운 수필의 가장 건강한 모델로 본다. 증강현실로 마멸된 석불의 원형을 되살리는 직업의 현장과 외할머니 손바닥의 굳은살이라는 오래된 정서를 한 줄로 꿰었다. 산길에서 주운 이끼 낀 돌멩이를 날마다 닦다가 그것이 자꾸 작아져 영영 사라질까 겁이 나 손을 멈추는 대목, 헤드셋을 벗은 뒤 깎이고 패인 불상이 그 자체로 "거대한 굳은살"처럼 보이는 대목에서, 복원하려는 욕망의 허망함과 닳아 버린 것의 존엄이 설명 없이 이미지로 전해진다. 화물열차와 건널목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치로 되풀이되고, "나는 빈손이 되어 건널목을 건넌다"는 마지막 문장은 놓아 보냄을 행동으로 보여 준다. 현재형 시제로 장면을 밀고 나가는 방식은 필자가 오래 주창해 온 상황수필(狀況隨筆.situation essay)의 방향, 곧 극적 상황에서 내면으로, 내면에서 주제의 체화로, 그리고 여운으로 나아가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과거형 체험 나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의미가 크다. 다만 영화 연출 출신답게 몽타주식 장면 전환이 잦아 연등에 매달린 이름표 장면처럼 앞뒤가 덜 이어진 컷이 보인다. "희맑은", "빡지근히" 같은 어휘는 공들인 흔적이 너무 드러난다. 대상작과 이 작품은 모두 '닳음'과 '벗겨진 흔적'을 다룬다. 하나는 사유로, 하나는 장면으로 같은 주제에 다가간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으면 오늘의 수필이 가진 두 개의 좋은 길이 보인다.
6. 장려상 — 세 개의 얼굴
문경근 「쇳내」 - 진정성으로는 의심할 데가 없는 글이다. 학교 개축 현장에서 헐어낸 붉은 벽돌을 손수레로 실어 와 아들의 신방을 늘이는 아버지, 겨우 석 달 만에 분가해 버린 아들, "입 무겁기는 당신하고 아들이 어찌 그리 똑같소"라는 어머니의 한마디. 한 시대의 아버지와 말 없는 부자 관계가 절제 있게 그려진다. 다만 구조에 문제가 있다. 제목이자 소재인 공구가 서사 안에서 일하지 않는다. 스무 가지가 넘는 공구가 나열되지만 정작 방을 늘이는 장면에서 그 공구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쇳내는 서두와 결미에만 액자처럼 걸려 있다. "서사를 깨워보고 싶어진다", "이야기 속으로 한발 한발 들여놓는다" 같은 예고성 문장이 서두에서 거듭되고, 결말은 작은 일들이 모여 삶을 지탱한다는 일반론으로 흩어진다. 우리 수필 문단의 주류 문법이 지닌 미덕과 한계를 함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천동현 「기계에게 보는 법을 가르치며」 - 스물셋 공학도의 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투명해서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유리문을 인식하지 못하는 로봇과 이십 년 넘게 어머니를 '배경'으로 처리해 온 자신을 포개는 착상이 명쾌하다. 빛을 쏘아 되돌아오는 시간을 재는 라이다처럼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시간을 잰다는 결말도 깔끔하다. 그러나 너무 깔끔하다. 비유가 지나치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면 수필은 칼럼이 된다. 체험의 장면은 유리병 뚜껑을 건네는 어머니의 손 하나뿐이고, "해상도가 아니라 초점이 사랑을 결정한다" 같은 경구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한 가지 통찰을 한 가지 비유로 포장하는 오늘의 짧은 에세이 문법이 수필 공모전에 들어왔다는 신호다. 장려상의 자리가 적절하다.
최현경 「다시, 고사리 앞에서」 - 여덟 편 가운데 고통이 가장 날것이다. 알츠하이머와 부정망상을 앓는 아버지, 오랜 우울로 쓰러진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신 자식의 죄책감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평창의 산 너머에서 들려오던 "현경아—"를 길 잃은 사람을 찾는 소리가 아니라 서로 그곳에 있음을 확인하는 약속으로 읽은 대목, 고사리는 캐는 것이 아니라 끊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모와의 끊김에 잇는 착상이 좋다. 다만 수몰된 아홉 마을 이야기와 나리꽃, 연못 수면을 문장에 빗댄 비유는 주제와 느슨하게 붙어 장식에 머문다. 주먹을 날려 보고 싶다는 의지 표명과 "톡" 소리를 다시 시작의 말로 듣는 결말은 치유 서사의 정해진 착지처럼 보인다. 부모님이 한 번 먹을 만큼만 고사리를 끊으시던 그 절제를 화자의 돌봄 윤리와 대비했다면 훨씬 깊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7.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
여덟 편을 겹쳐 놓으면 다섯 가지 흐름이 드러난다.
첫째는 서사화와 장면화다. 노경수와 정수우의 글은 대화와 장면, 극적 전개로 움직인다. "~했다"를 줄줄이 잇는 과거형 회고에서 벗어나려는 이 흐름은 분명한 발전이다. 수필이 오래 들어 온 신변잡기라는 비판에 대한 실질적인 응답이기도 하다.
둘째는 서정의 시화(詩化)와 사실성의 이완이다. 정현우의 「상속」에서 가장 뚜렷하고, 대상작의 정체가 흐린 '당신'에서도 나타난다. 이미지의 밀도는 높아졌으나 시간과 대상이 모호해지면서, '이것은 나의 실제 삶'이라는 수필의 근본 약속이 느슨해진다. 이것은 발전이라기보다 변화이며, 경계해야 할 변화다.
셋째는 사색 수필의 귀환이다. 대상작은 사물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생각하는 중수필의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렸다. 오랫동안 체험 회고에 밀려 있던 사유의 수필이 최고상을 받았다는 것은 이번 심사의 가장 의미 있는 선택이다.
넷째는 소재의 현대화와 골격의 보수성이다. 증강현실, 컴퓨터비전, 라이다처럼 소재의 지평은 넓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사물이나 장소를 만나고, 회상하고, 깨달음을 진술한다'는 같은 뼈대 위에 서 있다. 표면은 새로워졌으나 사고의 형식은 그대로다. 진짜 새로움은 소재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에서 와야 한다.
다섯째는 주제의 쏠림이다. 첫사랑의 상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외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부음, 늙어 가는 어머니의 손, 치매를 앓는 부모. 여덟 편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과의 현재진행형 관계를 다룬 글은 「곰팡이의 은거」 하나뿐이다. 대상작이 애도를 관조로 넘어섰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하지만 공동체와 노동, 사회의 풍경, 그리고 웃음을 다룬 수필이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응모 문화의 빈자리를 그대로 보여 준다. 여기에 결말에서 의미를 직접 해설하는 고질이 신구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남아 있다는 점도 덧붙여 둔다.
8. 발전인가, 변화인가
필자는 이 물음에 하나의 답을 내리기보다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법의 측면에서는 발전이고, 장르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변화다. 순기능은 분명하다. 장면 구성력과 문장의 밀도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시인과 시나리오 작가, 생활인과 이십 대 공학도가 수필의 문을 두드린다. 수필이 닫힌 동인의 장르가 아니라 열린 산문의 광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수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수필의 오래된 본령인 사색의 전통을 가장 높이 되살렸다는 사실은 그 전통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염려할 점도 분명하다. 첫째, 수필이 다른 장르 작가들의 부업이 될 수 있다. 상금이 큰 공모전에서 시와 소설의 감각으로 쓴 산문이 우위를 점하면 수필 고유의 미학인 체험의 진실성과 자기 성찰의 지성, 담담한 어조를 평가할 언어 자체가 약해진다. 둘째, 허구가 섞여도 검증할 수 없다는 문제가 커진다. 소설적 구성과 시적 모호함이 강해질수록 '이것은 실제인가'라는 물음이 무의미해지고, 그 순간 수필은 짧은 자전소설이나 산문시가 된다. 셋째, 상실과 애도의 공식이 굳어진다. 수상작은 다음 해 응모자들의 교본이 되므로 슬픔의 강도가 작품성으로 오인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아픈 물음은 바깥이 아니라 안을 향한다. 김진섭과 이양하의 사색, 피천득의 담담한 서정은 본래 우리 수필의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해낸 사람이 왜 수필 문단 바깥에서 나왔는가. 수필 문단이 체험 회고의 관습에 안주하는 사이, 사물을 붙들고 끝까지 생각하는 힘과 장면으로 말하는 힘을 잃어 온 것은 아닌가. 이번 수상 목록이 던지는 물음은 '장르가 변하고 있다'가 아니라 '장르의 본령을 누가 지키고 있는가'이다.
9. 심사의 주관과 공정성
보도에 따르면 이번 심사는 예심과 본심, 결심의 세 단계로 진행되었고, 결심에는 부문별로 작가와 교수 등 전문가 세 명이 참여했다. 전체 심사위원장인 정경량 목원대 명예교수는 작품의 문학적 수준을 기준으로 삼았고 수상자에 합의할 때까지 토의했다고 밝혔다. 수필 부문 최종 심사는 전 대전 대신고 교장인 수필가 박영진, 『선수필』 주간 정하정, 2018년 세명일보 신춘문예로 나온 수필가 노은희 세 사람이 맡았다.
먼저 인정할 것이 있다. 이름 없는 생활인이 대상을 받고 등단 경력이 화려한 시인이 그 아래에 섰다는 것은 적어도 이름값이 심사를 좌우하지 않았다는 정황이다. 블라인드 심사가 제 몫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심사위원의 주관은 없앨 수 없고 없애서도 안 된다. 문학 심사는 결국 안목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주관을 제거하는 데서가 아니라 주관을 드러내고 견제하는 데서 확보된다. 필자는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장르 고유의 평가 항목을 명문화해야 한다. "문학적 수준"은 너무 넓은 잣대다. 수필 부문이라면 체험의 진실성, 자기성찰의 깊이, 사유의 독창성, 문장, 구성처럼 수필만의 항목을 공모 단계에서 밝혀야 한다. 그래야 시적 모호성이 수필에서 장점인지 결함인지를 심사위원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기준이 판정하게 된다. 정현우의 「상속」이 받은 평가는 바로 이 기준의 공백을 보여 준다.
둘째, 수필 부문 결심에는 수필 창작과 비평을 주업으로 해 온 사람이 적어도 과반을 차지해야 한다. 이번 결심은 세 사람 모두 수필가였으니 이 원칙을 온전히 지켰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더 무거운 물음을 남긴다. 시적 모호함이 짙은 「상속」을 최우수상에 올린 것이 다른 장르의 심사위원이 아니라 수필가들 자신이었다면, 수필이 시의 감각 쪽으로 기우는 흐름은 바깥에서 밀려온 것이 아니라 이미 수필 문단 안에서 승인되고 있다는 뜻이다. 심사위원을 수필가로 채우는 것만으로는 수필의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 첫째로 든 평가 기준의 명문화가 더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것을 이번 심사가 보여 준다.
셋째, 블라인드 원칙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약력이 원고와 언제 분리되는지, 결심까지 이름이 가려지는지를 공지하면, 이번처럼 무명의 대상이 나왔을 때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제도의 결과임을 누구나 믿을 수 있다.
넷째, 심사위원 이름과 심사평 전문을 공개해야 한다. 합의로 정했다면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왜 이 작품이 저 작품보다 앞섰는지를 심사평에 밝혀야 한다. 수상작 못지않게 심사평이 다음 해 응모자들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심사위원을 해마다 바꾸어야 한다. 같은 성향이 되풀이되면 상의 빛깔이 굳어지고, 응모자들은 그 빛깔에 맞추어 쓰기 시작한다. 수상작이 한 주제로 쏠리는 현상도 이런 되먹임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10. 미래의 자리에서 바라본 수필
이번 수상작들을 미래의 눈으로 다시 읽으면, 수필 앞에 세 갈래 길이 보인다. 하나는 산문시로 가는 길이다. 이미지의 밀도와 서정의 강도를 앞세우고 사실의 경계를 흐리는 길이다. 또 하나는 짧은 자전소설로 가는 길이다. 장면과 대화와 극적 전개로 이야기의 힘을 키우는 길이다. 마지막은 본령을 깊게 하는 길이다. 체험의 진실성이라는 약속을 지키면서, 그 위에 새로운 기법과 새로운 지식을 얹는 길이다. 필자는 수필의 내일이 세 번째 길에 있다고 믿는다.
첫째, 그 믿음에는 시대적 근거가 있다. 이제 매끄러운 문장은 기계도 쓴다. 이미지가 촘촘하고 수미상관이 정확하며 결말이 감동적인 글은 머지않아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수필에 남는 고유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 실제로 살아 낸 삶과, 그 삶을 통과해 온 단 하나의 시선이다. 수필이 오랫동안 지켜 온 '이것은 나의 삶'이라는 약속은 낡은 규범이 아니라, 앞으로 수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자산이 된다. 시적 모호성으로 그 약속을 흐리는 일은 지금은 세련되어 보이지만, 미래에는 수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내려놓는 일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장려상의 천동현이 로봇에게 보는 법을 가르치다가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 이야기는, 기계의 시대에 수필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둘째, 수필의 소재 지평은 앞으로 직업과 지식의 영역으로 크게 넓어질 것이다. 토목을 공부한 생활인의 곤충 관찰과 어원 탐구, 문화재를 스캔하는 콘텐츠 작가의 현장, 자율주행 로봇을 다루는 공학도의 책상이 모두 이번 수상작 안에 있다. 문단의 바깥에서 온 이 낯선 체험들이 수필을 신변잡기에서 건져 낼 것이다. 수필 문단은 이들을 경계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체험을 수필의 문법으로 단련시키는 일을 맡아야 한다.
셋째, 형식은 짧아지고 날카로워질 것이다. 독자는 긴 회고를 끝까지 따라가 주지 않는다. 극적인 상황으로 곧장 들어가 내면을 거쳐 여운으로 닫는 짧고 강한 수필, 필자가 상황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실험해 온 형식이 그 요구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수상작 가운데 정수우의 현재형 장면 서술과 대상작의 이미지 반전 결말은 그 방향을 미리 보여 준다.
넷째, 수필 문단에는 두 가지 숙제가 남는다. 하나는 비평의 언어다. 수필을 시나 소설의 잣대가 아니라 수필의 잣대로 평가할 언어, 곧 체험의 진실성과 사유의 깊이와 절제를 정밀하게 말할 비평 언어를 세워야 한다. 그 언어가 없으면 수필가가 심사를 맡아도 결국 다른 장르의 기준을 빌려 쓰게 된다. 다른 하나는 교육이다. 수필 창작 교육은 체험을 회고하는 법만이 아니라, 사물을 끝까지 생각하는 법과 장면으로 말하는 법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이번 대상작과 우수상 「돌 보는 마음」이 각각 그 두 가지의 좋은 교재가 될 것이다.
11. 맺으며
수필은 늘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 말은 수필의 문을 넓혔지만, 동시에 수필의 격을 낮추는 데에도 쓰였다. 이번 수상작들은 그 말의 두 얼굴을 함께 보여 준다. 누구나 쓸 수 있기에 생활인이 대상을 받았고,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여겨 온 탓에 수필 문단은 그 생활인에게 본령의 자리를 내주었다.
「누런 수의」의 화자는 옷장 앞에서 수의 대신 "수많은 배냇저고리들"을 본다. 벗어 둔 허물이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의 첫 옷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오늘 우리 수필도 그와 같다. 과거형 회고와 교훈적 결말이라는 낡은 허물을 벗을 때가 되었다. 그러나 벗어야 할 것은 허물이지 몸이 아니다. 체험의 진실성, 사물을 통한 사유, 담담한 절제라는 수필의 몸을 지킨 채 허물을 벗을 수 있다면, 지금의 변화는 수필의 새 배냇저고리가 될 것이다.
피천득의 이름을 건 상이 다음 해에도 그 이름에 값하기를 바란다. 수필이 시의 연습장도 소설의 습작장도 아닌, 한 사람의 삶이 가장 정직하게 말하는 자리로 남기를 바란다. 그것은 심사위원만의 몫이 아니라, 사십 년 이 장르를 지켜 온 필자를 포함한 수필 문단 모두의 몫이다.
참고: 심사 과정과 대상 수상작 정보는 시상식 보도(스마트투데이)를 따랐으며, 작품 인용은 『제3회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의거했다. (6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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