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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저-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
출- 창비
독-2016.7. 16~17
·어른이 아이 마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 시절을 포장하거나, 착각하거나, 잊어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 ‘책 육아,라는 말이 유행이다. 책 읽고 똑똑해지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을 이해한다. 아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느낄 때 아이는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갖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대상은 그림책이 아니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이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어른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이 어떻게 현실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아이의 삶을 살아 내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할 때 쉽게 사랑할 수 있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사랑해야 할 아이가 꼭 현실의 아이만은 아니다. 내 마음 속의 아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현실의 아이에게도 사랑이 흐를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분 가운데 누구라도 그림책을 보는 아이가 전과 다르게 보이고, 아이 마음에 조금 더 공감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머리말
· 아이가 인형놀이를 하면 방 좀 어지럽히지 말라 하지만 그림책을 늘어놓고 볼 때는 흐뭇해한다.
·무엇보다 그림책이 소중한 이유는 그 속에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마음을 진실하게 담고 있는 그림책에 빠져든다. 부보 깊은 곳에도 채 자라지 못한 아이가 숨어 있어 그림책을 접할 때면 그 아이가 깨어나곤 한다.
·세 돌 이전 유아는 그림책을 놀이 도구로 활용한 편이 좋다. 자신이 재료를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책을 가지고 놀 때도 부모는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그림책을 작고 놀고 싶은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한두 개의 그림을 갖고 이야기를 만들어 놀아도 좋고, 운율을 넣어 읽어 주거나 의성어, 의태어를 사용하여 말놀이를 해도 좋다. 가급적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며 아이가 원하는 방식을 고르도록 한다면 최선이다.
·아이들의 손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마이너스 손이다.
부모들은 아이와 함게 그림책으로 놀아 주기보다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지문을 그대로 읽어 줄 필요도 없다. 그림에 맞춰 부모가 지어낸 입말이면 충분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쪽을 펼치면 그곳만 반복해서 읽을 수도 있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섞어 가며 말놀이도 한다. 매번 다르게 읽어도 좋고, 아이가 반복을 원하면 조금 변주해 가며 되풀이해도 좋다. 부모가 주도하려 하지 말고 아이에게 권한을 넘기가 그림책 읽기란 결국 함께 노는 놀이고 그림책은 재밌게 놀기 위한 하나의 도구다.
·부모들에게 그림책은 자신이 할 말을 아이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교육 수단일 뿐이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이야기도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이 사랑할 때만이 아이들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림책이 교육 수단이 아니라 아이들이 순수하게 즐길 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지나서였다. 아이들이 스스로 발견하고 느끼도록 주인 자리를 아이에게 내주는 책과 어른이 주인이 되어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책은 분명 다르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려면 흥미가 있고 즐거워야 한다. 두뇌는 그런 족건에서 잘 발달한다.
어떤 그림책이 좋은 책일까?
아이들 눈빛이 반짝이도록 만드는 그림책이다. 아이들의 감식안을 믿어도 좋다. 눈이 가고 손이 자주 가는 그림책이 좋은 그림책이다. 아직 그 이상의 선택 기준이 내게는 없다.
그림책에서 글은 그림책이 담고 있는 내용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뒹굴뒹굴 짝짝> 백연희 작.은 아이와 볼 때면 부모가 즐겁다. 아이들의 귀여운 몸짓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 이뤄진다. 재미나 기분 좋은 느낌을 통해 반복을 스스로 찾고 즐기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재미란 어른의 재미가 아니다 아이 수준의 재미다. 부모도 아이와 함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마음까지 따뜻한 좋은 그림책이다.
한 때 세밀화가 유행했다. 실사 그림은 지나치게 많은 감정과 자극을 주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는데 방해될 수 있다. 이야기 줄기를 쉽게 따라가려면 대상을 축약해서 그리는 것이 유리하다.
진짜 맛있는 음식은 평범한 사람도 미식가도 모두 만족한다. 그 맛이 오래 생각나고 매번 맛볼 때마다 또 다른 맛을 느낀다. 좋은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더 많이 알면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아이들은 친숙한 방식으로 그려진 단순한 그림. 자신에게 친숙한 단순 그림에 더 집착을 보인다.
어떤 그림책은 그림이 지나치게 꽉 차 있다. 작가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다. 이런 그림을 마주친 아이들은 엄청난 양의 시각 정보에 압도된다. 세부까지 정성 들여 완성한 그림에 아이들은 감탄하지 않는다. 조금 투박하더라도 만만해 보이고 친숙한 그림을 더 좋아한다. 비어 있는 공간은 작가가 방치한 공간이 아니다. 아이가 상상을 통해 끼어 들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그림책은 작가가 완벽하게 구성한 이야기에 아이가 상상하고 부모와 이야기 나누며 재구성하는 책이다. 아이들에게 독서란 이야기 속에 뛰어드는 경험이다. 아지 자신감 없는 아이들은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 쉽게 빠져들 수 있다. 그림ㅊ액의 여백이 중요한 이유다.
졸라맨처럼 인물 팔다리를 가는 선으로 그린다. 얼굴과 몸통은 통통하게 그려 표정과 움직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그림을 좋아한다.
배경은 사진으로 주인공은 이차원 적인 캐릭터로 그려 낸 모 윌렘스는 아이들이 어떤 종류의 그림을 좋아하는 지 안다.
-읽을 때 읽어주는 부모와 듣는 아이가 전혀 다른 경험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앟다.그대 부모가 할이 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스로의 느낌을 즐기는 것. 또 하나는 아이 느낌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안 보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출생 후 2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보이지 않아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물의 영속성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영속성은 아이의 발달에 중요하다. 엄마가 안 보여도 어딘가 있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엄마가 안 보이는 새로운 세계도 겁 없이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 놀이가 까꿍 놀이인데 처음 만난 유아가 친해지는 데 그만한 놀이는 없다.
<달님 안녕>을 좋아하는 이유도 까꿍 놀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달님은 엄마를 의미한다. 동그라미는 엄마 젖가슴이다. 그림책에서 집 위로 달이 떠오르듯 엄마의 옷이 내려가면서 가슴이 조금씩 나올 대 아이는 곧 입으로 들어갈 모유를 생각하며 행복해진다. 구름이 가린 순간 아이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고양이는 사납게 울고...이때 말한다.
“잠시 보이지 않아도 달은 그 자리에 있어, 엄마도 잠시 안 보여도 늘 네 곁에 있잖아.”
<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
‘칼테곳 상을 받은 이 그림책에서 아기 고양이는 보름달을 보고 우유 접시를 떠올리며 맛있겠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우유 접시인 달에 닿으려고 펄쩍 뛰어오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한다. 연못에 비친 달을 보고 풍덩 뛰어들지만 우유는 없고 온몸이 물에 젖기만 한다 결국 슬프고 지쳐서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는 아기 고양이의 동그란 우유 접시에 우유가 가득 담겨 있다. 이 그림책은 우유 접시와 달이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위하는 것. 내 입장에서 상대를 위한다면 진짜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알게 된다. 아이를 아이 입장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싹싹싹> 하야시 아키코 작
아기는 음식을 흘린 동물을 야단치지 않는다. 그저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준다. 그림책을 보는 유아들에게 이 아기는 그야말로 영웅이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래어 아이는 이 책을 엄마와 보길 원한다.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데다 문장이 대다 <싹싹싹>으로 끝나니 저절로 리듬이 생긴다. 아이들은 반복을 편안해한다. 익숙해지기 전에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이다. 리듬감 있는 반복은 아이들을 안심하게 하고, 안심 속에서 아이들은 도전을 시작한다. 부모들은 아이를 재울 때 같은 노래를 반복 부른다. 아이 역시 같은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펼쳐 보면서도 늘 재밌어한다. 지겹기도 하련만 그런 기색이 없다. 반복은 뇌세포 간의 연결을 만드는 기본 방법이다. 뇌는 아직 연결이 불완전하다. 같은 자극을 반복으로 경험하는 순간, 뇌에서 의미 있는 연결이 이뤄진다.
· 난나 클라라 티드홀름의 <두드려 보아요>는 유아들이 어떻게 그림책을 작고 노는지 잘 알지 못했다면 만들 수 없는 책이다. 그림책의 한 면을 텅 비우고는 손잡이를 그려 넣어 문으로 만들었다. 그 면을 볼 때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리게 된다. 파랑, 빨강, 초록, 노랑, 하양 문을 차례로 열 때마다 방 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돌물들이 놀이도 하고 식사도 하고 잠잘 준비도 한다. 이제 아이도 그림책을 보며 할 일이 있다. 아이엑 할 일을 주는 것은 아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과 쿵!>
부모는 동물들이 먹는 흉내를 어설프게 내며 읽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으 그 모습에 까르르 넘어간다.
·처음 단어를 익히기 시작할 때 의성어와 사물의 명칭을 붙여서 가르치면 아이들은 훨씬 쉽게 어희를 확장할 수 있다. ‘붕붕 자동차’라 하면 자발적 모방이 이뤄지고 더 잘 기억한다. 새로눈 것을 배울 때는 뭐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가 있어야 자발적 학습이 가능하고 배움에 탄력이 붙는다. 글을 읽는데 급급한 어른은 그림을 자세히 안 보지만 글 모르는 아이들은 그림의 변화를 자세하게 본다. 이 책은 단순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장치를 갖고 있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두더지다. 다른 동물들은 제 몫을 다 먹고 배가 부르다고 물러나지만 두더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비가 오자 그제야 내려와 기린 목에 올라탄다. 비는 피하고 싶고 먹는 것은 멈추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의 상징이 두더지다. 그림책의 시작에더 두더지는 모험을 시작한다. 그것이 모험인지도 모르고, 땅을 파고 다니듯 땅 위의 사과도 뚫었을 뿐이다. 그러고는 마음껏 사과를 경험하고 느낀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두더지의 모습, 아이들도 꼭 그렇다. 큰 동물까지 나눠 먹어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아이들 꿈이다. 너무 맛나지만 먹으면 사라졌던 사과는 늘 아쉬웠다. 엄마 젖도 꼭 그랬다. 그에 비해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고 비가 오면 나를 감싸서 지켜 줄 사과, 아이들은 그런 사과가 갖고 싶다. 그런 사과 있다면 욕심 부리지 않아도 될 텐데. 함께 나누고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텐데. 결국 이 책은 아이들 꿈이다. 그것도 부모가 재미나게 읽어 주기에 더 즐거운 아이들 꿈이다.
<아기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요?>
아이들은 자기를 주인공이라 생각한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화면 구석에 숨은 아기 오리와 아기 오리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엄마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내가 사라지면 엄마도 오리 엄마처럼 나를 열심히 찾아다닐 거라 생각하며 안심할 수 있다. 그림책은 장마다 구석구석 아기 오리를 숨겨 두고 아이들이 아기 오리를 찾도록 유도한다.
부모는 공부가 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들이 붓고 강요하는 공부가 괴로울 뿐, 사람은 누구나 발전을 원하고 더 잘하게 될 때 즐거워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 엄마 오리가 아기 오리를 찾은 순간이 매력이다. 엄마는 아이를 찾느라 고생한 것, 마음 졸였는데 대해 아이를 야단치지 ㅇ낳는다. 다음에는 이야기하고 가라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얖 장 서서 연못을 헤엄쳐 간다. 늘 부모의 잔소리에 지친 아이들은 이 모습에 푹 빠져든다. 부모가 불안해서 아이의 모험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아이를 더 작고 무능하며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라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균형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어려운 말이지만 부모는 아이가 아니기에 균형을 잡으려 애써야 한다.
<우리끼리 가자> 유아들은 쪼르르 엄마에게 와서 별것 아닌 것을 묻고 다시 자기 놀이로 간다. 또 조금 놀다가 엄마를 찾는다. 아이들이 세상을 탐색하는 과정은 대개 이렇다. 엄마라는 원점을 중심으로 나갔다 들어 왔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움직이는 공간을 넓혀 간다. 세상은 조금씩만 변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자기 세계를 넓혀 갈 수 있다. 오늘 모험을 했기에 조금 더 자랐고 자면서 위안을 얻어 기운을 내고 싶다. 내일 아이는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또 세상에 나간다. 토끼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산양 할아버지를 보며 아이들은 박수한다. 새로운 모험을 하고 싶어 한다. 그 모험이 위험으로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기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느끼면 세상은 안전하고 자기는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본 도식을 형성한다. 그 도식이 있어야만 아이는 세상을 향한 모험을 지속할 수 있다. 모험을 피하는 아이들은 이런 도식이 없거나 흔들리는 아이다. 이 책을 부모와 읽으며 부모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 책을 읽고는 아이를 팔로 감싸 꼭 안아주자.
·아이들은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본능적으로 더 맣은 자극을 받으려는 바깥이란 공간은 실내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자극을 갖고 있다. 어떤 바람은 향기를 주고 처음 듣는 소리도 있다. 새로운 자극은 아이들을 흥분시킨다. 자연에서 이런저런 장난감을 스스로 발견하다. 조약돌과 나무토막, 꽃잎과 열매는 걷다 보면 발체 차이는 것들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대단한 역할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오늘날 자연은 우리 삶으로부터 몇 발자국 쫓겨나 버렸다.
<나무는 좋다>제니스 메이 어드리 글 시공주니어
나무는 놀이터이고, 뜨거운 해를 피해 쉴 수 있는 그늘이다. 높이 올라가 무서운 개를 피할 수도 있고 집을 둘러싼 거센 바람에서 집을 지켜 준다. 어느 곳에나 있는 나무는 어느 곳에서나 그 자리에 꼭 맞는 일을 한다. 도시 아파트 숲 속에 사는 아이에게 나무는 더 이상 가깝지 앟다. 이런 아이와 책을 천천히 넘기며 나무 기억을 떠올려 보자. 나무 잔가지로 하루 종일 운동장에 낙서 했던 기억, 그렇게 나무가 이야기 속에 들어오면 아이도 반응을 보인다.
<달은 어디에 떠 있니?> 정창훈 글, 웅진주니어
달은 때로는 강둑을 달리는 자전거를 비추는 초승달로, 밤이 되도록 북적이는 시골 장터를 비추는 보름달로, 어슴푸레 밝아 오는 골목을 쓸고 있는 청소부의 머리 위 그믐달로 모습을 달리 하며 그림책을 비춘다. 달은 입체가 되어 튀어 나온 듯 훤하게 빛난다. 서정적인 그림과 과학적인 설명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걸으며 위안하는 달과 과학 교과서의 달이 다른 존재가 아닌 하나임을 알게 해준다.
<리디아의 정원>
실직한 아빠가 사골 외삼촌댁에 리디아를 데려다 놓는다. 리디아는 외삼촌을 도와 빵을 만들면서도 틈이 나면 깨진 컵이나 찌글러진 그릇에 꽃씨를 심는다. 가게에 꽃이 만발하자 빵집 가득 손님이 들어찬다. 무표정한 외삼촌 얼굴도 발아진다. 삶의 매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다. 지금 작은 행복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무척
<안아 줘!>제즈 앨버로, 웅진 주니어
·아이가 뭘 하는지 매 순간 신경 써야 하고 울음소리라도 나면 당장 달려가야 하는 시기, 괴롭지만 행복한 시간이다. 나란 존재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한 생명체, 내 존재를 반갑게 그리워하는 생명체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경험. 흔들리며 살던 삶에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는 부모도 있다. 부담과 동력을 부모에게 준다. 발달심리학에서 이 시기를 분리- 개별화 시기라 한다. 분리해서 개별 존재로 성장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태어나 첫 6개월까지는 엄마와 자긴을 별개로 인식하지 못한다. 10개월 무렵이면 혼자 설 수 있고 돌이 되면 걷는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는 인생의 전환기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나며 자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다. 엄마한테서 돌립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엄마가 자기를 잡아 주기를 바라지만 잡았다가 곧 놓아주기를 바란다. 사랑과 안전만 확인받으면 자유롭고 싶다. 18개월부터 두 돌까지다. 아이는 불안해 부쩍 엄마를 찾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탐색을 시작한다. 보보도 엄마가 그립다... 자기를 안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아 줘”외친다. 동물들은 모여 안타깝게 보보를 쳐다보지만 안아 줄 수 없다. 그때 멀리서 엄마가 달려온다. 동물들은 엄마와 보보의 포옹을 축하해준다. 보보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엄마만 있다면 마음은 금세 흐림에서 맑음이 된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 보보가 있기에 행복하다. 아이는 이처럼 부모와 포옹(애착 형성)한 뒤 다른 동물과 포옹 한다.
<비 오는 날 소풍>
비 오는 상황도 어쩔 수 없지만 속상한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이럴 때 비 안 온 셈 치고 소풍을 간다.
<고 녀석 맛있겠다>미야니시 다쓰아
빨간 열매를 먹는 공룡과 빨간 열매를 먹는 공룡을 먹는 공룡을 먹는 티라노사우루스는 아이가 제 갈 길 가게 훈련시켜 보낸다. 이 책은 밑바탕에 믿음이 있다. 사랑의 끝에는 독립을 위한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믄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아이에겐 사람이 별처럼 쏟아진다.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랑이 있다면 삶은 살아 볼만하다.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 권윤덕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인정받는다.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부모 태도가 아이 마음을 자라게 한다. 심리학에서 ‘거울 역할 하기’-부모가 거울처럼 아이를 있는 그때로 인정할 때 아이 내면은 팽창한다. 가진 힘보다 더 많이 스스로를 믿는다. 그 믿음으로 도전을 시작한다. 또 자기 주변을 이상화한다. 주로 부모가 이상화 대상. 부모처럼 대단한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니 자기도 괜찮은 사람이라 믿으려 한다.
고양이가 자기를 따라한다. 그 모습이 참 재미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하는 행위는 다 무의미하다 여겼는데 왠지 힘이 난다. 아이는 거울처럼 자신을 따라 하는 고양이에게서 힘을 얻는다. 그래서 이젠 아이가 고양이를 따라 한다. 고양이의 강한 면을 이상화하고 배우려 한다. 깜깜한 어둠을 당당히 쳐다보고, 높은 곳을 겁내지 않고 올라가고, 몸과 마음을 부풀려 스스로에게 힘을 준다. 이제 밖으로 나가 친구와 어울려 새 세상을 연다. 왜 용기 없나고 탓해선 안 된다. 함께 있어 주는 시간, 보아 주고 보여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후기 만화를 발전시킨 양식의 그림은 현실 속에 깃든 환상을 보여 준다. 자신감 없는 아이를 변화시킨 건 자기를 봐 주고 인정해 준 고양이의 눈빛이다. 그 눈빛을 보고 힘을 낸 아이는 고양이의 긍정적인 점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글과 그림이 아름답다 보니 두려움 이기고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따뜻한 내용은 그저 덤으로 느껴진다.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 있고, 눈 없지만 사물을 느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부재 순간에 그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다. 아이들에게 눈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눈이다. 자기를 지켜보고 때로는 감시하는 눈이다. 이 그림책을 보며 자기에게도 눈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기 눈에 보이는 세상에 마음 주고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그저 상대가 필요한 것을 해주고, 내가 필요한 것을 얻는 정도의 관계로 산다. 서로 깊게 영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난 진짜 필요한 것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줄무늬가 생겼어요>
개성은 남들이 좋게 봐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이상해 보이거나, 남보다 뒤처지는 개성은 부모들에게 개성이 아니다. 그저 결함에 불과하다. 숨기거나 어서 바꿔야 한다. 카밀라는 강낭콩을 좋아한다고 솔직히 인정하가 원ㄹ해 모습으로 돌아온다. 남이 바라는 삶을 살다가는 내 모습 영원히 잃는다. 내가 바라는 삶을 살려 할 때 진정 내가 된다. 나를 있는 그래도 좋아할 수 있어야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 토끼 어딨어> 모 월렘스-그림책에 유머를 퍼뜨리는 모 월렘스만큼 진지하에 아이 발달을 이해하고 아이들 편에 서서 이야기하는 작가가 얼마 되지 않는다.
트랙시는 자다가 토끼 인형이 자기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것 아니라 만지고 싶지도 않다. 토끼 꼬리만 겨우 손가락으로 붙잡은 채 부모에게 온다. 자신의 토끼를 찾은 트릭시와 소냐는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이처럼 다르게 대한다.
인형 안에 채워 넣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인형과 함께 했던 시간, 인형을 보며 자신이 품은 생각들을 갖고 있어 인형은 특별하다.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아이 마음 뿌리는 불안에 있다. 늘 두렵다. ‘내가 다른 아이와 바뀐다면 부모는 날 어떻게 할까? 아이들은 유치원 가면서 처음 아이들과 섞인다. 여러 명 중 하나로 대우 받는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오직 유일한 존재로 여겨지던 시절이 막을 내린다. 자기가 중심이 아닌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모리스 센닥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에는 유난히 침대가 많이 나온다. 그는 폴란드에서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붐는 생계를 버느라 일하고 어릴 때부터 병약햇던 모르스 센닥은 거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그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힘은 침대에 누워 했던 수많은 상상으로부터 나왔다.
- 도망치는 두 마리 괴물을 엄마. 아빠를 상징한다. 괴물 같이 야단치는 엄마, 하지만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둔 엄마, 맥스는 엄마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합한다. 괴물은 아이 속에 숨어 있는 충동과 공격성이다. 괴물은 미성숙한 자아의 상징이다. 부모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괴물을 부인하고 억압할 때 아이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비록, 위험하지만 그것이 아이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괴물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선 우선 괴물의 시기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은 밤 부엌에서>모리스 센닥
꿈에서 미키는 밤새 빵을 만드는 뚱보 제빵사들을 만난다. 미기큰 빵반죽이 되어 빵속으로 들어가고, 빵 반죽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다닌다. 미키는 은하수에서 우유를 가져와 빵만들기를 돕는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연결이다. 꿈이기에 가능하다. 아이 소망이 꿈을 이글고, 유사한 발음과 감각으로 이야기 속 장치들이 끌려 나온다. 이러한 비논리성은 꿈의 특징이다.
<무지개 물고기>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오가면서 집안의 왕이었던 아이는 심각한 도전을 맞는다. 지금까지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거나 잘하는 것을 뽐내면 박수해주고 좋아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안 그렇다. 같이 노는 것은 재미있지만 아이들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 다르다. 내게 맞춰 주지도 않고 내가 잘난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경계한다. 물고기는 자기의 비늘 한 개만 남겨 두고 모두 나눠 준다. 아이들 중 한 명이 된다, 자기중심 사회에서 여러 명 중 한 명인 사회로 이전, 이것이 적응할 때 힘들어하는 이유다. 분리 불안은 관계 맺기 힘들고 그럴 때 부모에게 위안 받고 싶은데 그때 옆에 없으니 우는ㄴㄴ 것이다. 이런 관계의 어려움은 요즘 아이들이 시회화 초기에 거치는 필수 과정이다. 혼자서는 살수 없고, 함께 나누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 이 진실을 아이들 말투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고기가 중인공이 되어 들려준다. 수채화 느낌의 담백한 그림 위에 홀로그램까지 반짝이니 아이는 이 책에 쉽게 매혹된다. 이 책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바른 생활 교과서다.
<세 친구>
서너 살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친구와 같이 노는 듯 보이지만 대개는 같은 공간에서 각자 놀이를 한다. ‘병행 놀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아직 서로 주고받거나 힘을 합쳐서 노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놀이에 익숙해지려면 세상이 태어난 지 다섯 해는 지나야 한다. 함께 놀기 위해서는 끼어드는 기술이 필요하고 자기 방식이란 욕심을 일부 포기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내 것을 포기할 때 내가 더 즐거울 수 있다.
<미냐 위니> 밸러리 토머스. 비룡소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아이들은 엄마를 버릴 수 없어 엄마를 둘로 나눈다. 나쁜 엄마(마녀), 좋은 엄마로. 마녀라 이름 붙이니 까짓것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하다. 조금 편하게 상상도 해 보고 어떻게 다룰지 고민도 해 본다.
까만 집에 사는 위니는 마법을 써서 월버 강아지를 녹색으로 만든다. 녹색이 되닌 집에서는 구별하기 쉬워졌다. 하지만 야외에 가니 구별이 더 어렵다. 화가 난 위니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월버를 바꾼다. 위니는 편해졌지만 월버는 우스꽝스럽게 변한 자기 모습에 속상핟. 나무 위에 올라가 하루 종일 운다. 위니는 윌버를 좋아하기에 윌버가 슬픈 것이 싫다. 원래의 가만색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집을 바꾼다. 까만 집은 다양한 색깔을 띠고 월버는 이제 눈에 확 띄는 집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아이들은 고양이 윌버에 감정을 이입하여 자기에게 걸려 넘어지는 엄마를 통쾌해하기도 하고 엄마가 마음을 바꿔 자기를 인정해 줄 때 한없이 기뻐한다. 때론 마녀같지만 날 사랑하는 엄마, 마법도 부릴 수 있는 힘센 엄마가 내 편이다. 안심이다.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강한 엄마는 아이들의 바람이다. 엄마가 강하면 자기도 강하니까. 부모를 이상화하여 그 속에서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부모처럼 강하고 멋있는 어른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우리 엄마 아빠는 뭐도 잘한다고 자랑하는 아이들은 애써 부모를 포장한다. 그래야 자신이 안정 속에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무서운 도깨비가 떨어졌지만 엄마는 조금도 겁 안낸다. 빨래 통에 넣고 빨아 버린다. 어찌나 세게 빨았는지 도깨비는 얼굴조차 사라졌지만 아이들이 눈, 코, 입을 그려 주자 다시 살아난다. 저화위복으로 심술궂던 얼굴은 예쁘게 변했다. 이제 그 모습이 부러운 수많은 도깨비들이 구름처럼 나타나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나도 빨자 수세요.” 이런 난리판에도 엄마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좋아, 나에게 맡겨!” 무서운 도깨비를 제압하는 엄마에게 열광하고 아이들이 도깨비 얼굴을 새로 그려 넣어 예쁘게 바꾼다는 설정에 재밌어한다. 그림책 속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고 무서운 것도 없다. 그런 엄마와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자기도 힘이 쑥쑥 날 것만 같아.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와 같이 읽길 원한다. 안정감 느끼고 더 강해지고 더 자라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걱정투성이다. 그러나 걱정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수단일 때만 의미 있다.
<고릴라> 고릴라는 작가가 어렸을 때 아버지 모습이다. 인간 이전에 고릴라가 있었듯이 직ㅁ 부모 이전에 존재했던 보다 원초적 부모 모습이 고릴라다. 이 시대 부모들은 너무 바쁘다. 아이를 위해 해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바로 그 이유 대문에 아이와의 시간은 내지 못한다. 우리에 갇힌 침팬지는 ‘내가 갇혀 있는지 당신의 삶이 구속되어 있는지, 묻는다. 눈을 똑바로 뜨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릴라 속 아빠는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어 아이는 꿈속에서 아빠가 사준 고릴아 인형이 멋진 골고릴라로 변하게 해 아빠 옷을 입고 동물원을 함께 가고, 극장도 가고 저녁 식사를 한다. 마지막 입맞춤까지 온전히 데이트를 즐긴다. 아이들은 꿈을 꿔서라도 소망을 이루고 싶다. 아이는 그런 부모를 사랑하고 성장하고 싶다. 어른은 아이 옆에 그저 머무는 것, 그런데 그것마저도 하기 어려운 시대를 오늘의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아빠 재우기는 정말 힘들어>
왜 어른들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걸까? 잠자러 가기 싫은데 어서 자라고 하고 배동 안 고픈데 식사 때엔 밥을 먹으라 한다. 옷도 불편한 것만 입히고 장난감 갖고 놀면 정리 좀 하라고 한다. 그렇다고 불평 할 수 없다. “왜 엄마 ㅁ맘대로만 해 엄마가 이젠 내 말때로 해.”하면 “자꾸 그러면 혼날 줄 알아”위협 듣고 그저 화만 나고 마는 ‘생각 의자’에 앉아야 한다. 한 번 기회를 줘보가 부모가 아이가 되어보는 놀이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아빠를 재운다. 아빠는 자기 싫다고 조르고 달래오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잠을 안 잔다. 엄격하게 자야 한다고 아이가 꾸짖지만 듣지 않자 회유책으로 이야기를 읽어 준다. 아빠는 얼른 달려와 아이 무릎에 앉아 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데 “딱 하나만 더!”조른다. 계속 졸랐다가는 침대에 묶어 두겠다고 협박한다. 꼭 부모 모습 그대로다. 협박에 겁 먹은 아빠가 잠들자 “잠도 안 자고 계속 놀려는 아빠는 나를 아주 지치게 해요.”헌더, 아이가 잠에 들려하자 아빠가 살금살금 다가와 같이 자자고 조른다. 달래는 데 지펴 버린 아이는 결국 아빠와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이들은 평소 자기처럼 행동하는 아빠를 보며 웃는다. 자기 행동을 저절로 돌아본다. 백 마디 잔소리보다 힘이 있고 아프지 않다. 위로 받은 느낌이다. 더 놀고 싶고 더 이야기 듣고 싶고 부모와 같이 자고 싶은 자기 마음을 다 알고 있구나 싶어 아이는 위로 받는다.이 책은 아이들 마음 움직이는 두 가지 비결을 말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이해받았다고 느낄 때 변하려 한다. 그리고 재미난 놀이로 설명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자기를 재미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아이는 규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히려 부족한 것은 부모들 마음의 여유다. 색연필, 사인펜, 물감을 이용한 채색과 콜라주까지 다양한 기법이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들로 단순한 케릭터와 아이들에게 익숙한 미술 기법으로 그려 낸 구성은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현실을 이기는 힘, 상상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아이들은 권한도, 능력도 없기에 현실을 답답해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상에 기댄다. 상상은 아이의 소망을 이루게 해주고 불만을 견디게 한다. 상상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자신의 일상 속에서 상상을 경험한다. 때로는 상상이 일상보다 더 중요해 일상은 그저 상상의 소재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세 가지.
① 부모가 시키는 일 ②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놀이 ③ 부모 말 안 듣고 고집 부리기
현실이 답답한 아이들은 상상에 기대어 소망을 이루고 불만을 견딘다.(경선)
<구름빵>과 <장수탕 선녀님>-백희나
구름빵 주인공 형제는 러시아워 속의 도심을 배경으로 아빠에게 날아간다. <장수탕 선녀님> 주인공 덕지는 선녀를 만나는 곳이 목욕탕이다. 두 그림책의 공통점은 답답하고 막혀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목욕탕은 아이들에게 이중적 공간이다. 냉탕에서 수영도 하고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장난을 칠 수 있지만 결국 부모에게 잡혀 꼼짝없이 때를 밀어야 한다. 욕탕 내에 가득 찬 습기는 숨이 막히고 타일로 덮인 벽은 작은 틈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목욕탕이야말로 아이들이 느끼는 현실의 답답함을 은유하는 공간이다. 이 답답한 현실에서 덕지는 상상 세계로 넘어가 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선녀라 한다. 나뭇꾼과 선녀에서 모티브를 따온 선녀다, 하늘로 못가 할머니가 되었고 장수탕에서 산다. 정신 난간 할머니일지 모른다. 하지만 덕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다. 할머니와 신나게 논다. 부모조차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법인데 덕지는 할머니를 그대로 인정한다. 할머니가 먹고 싶어 하는 요구르트를 드리기 위해 숨 막4히고 눈물 나는 것을 참으려 때를 민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다. 그는 아이들 마음이 선함을 믿고 싶어 한다.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기에 할머니는 목욕탕으르 벗어나 선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다. 할머니는 덕지에게 받은 따뜻한 마음을 갚아 준다. 백희나 그림책의 매력은 그가 그려 내는 상상이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이 그림책은 실사 촬영을 통헤 그림 작업을 했다.
<눈사람 아저씨>-레이먼드 브릭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아이는 눈사람을 만든다. 제 키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고는 모자를 씌워 주고 목도리를 매 준다. 눈, 코, 입도 정성껏 만든다. 아이는 스스로 만든 작품에 뿌듯하다. 밥에는 잘 있을까? 추운데 괜찮을까?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문밖을 내다본 순간 놀라운 일이 시작된다. 눈사람이 모자를 벗고 아이에게 인사한다. 눈사람을 집 안으로 데려와 집 구경 시키고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준다. 눈사람은 호기심쟁이에다 장난꾸러기다. 아빠 옷 입어 보고, 두루마리 휴지로 장난한다. 밤참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이제 눈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손을 잡고 하늘을 난다. 에든버러 성을 구경하고 해안 부둣가에서 바다 일출을 보고 집에 온다. 낮에 만든 눈사람이 밤에는 마법이 풀린 듯 살아나고, 그 눈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아이들이 만드는 눈사람이 상징하는 대상은 자기 보다 못한 친구, 자기 자아의 약한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수동적이고 부족한 눈사람을 만들어 아이들은 역으로 자신의 유능함을 확인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그 시기에 자기에게 가장 절실한 존재를 담는다. 친구가 필요한 아이는 친구 눈사람을 엄마가 필요한 아이는 엄마 눈사람을 만든다. 레이먼드 브릭스에게 절실한 존재는 친밀한 아빠였다. 색연필만으로 그린 그림은 따뜻하면서도 섬세해 작은 그림이지만 인물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 글이 하나도 없지만 이 책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글이 없다 보니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르게 아이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것 역시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감기 걸린 날>-김동수
눈 많이 온 겨울 엄마가 오리털 파카를 사 준다. 자세히 보니 봉제선 밖으로 깃털 하나가 빠져나와 있다. 꿈에서 털이 없어 춥다는 오리를 만난다. 아이는 옷 속에서 깃털을 꺼내 심어준다. 썰매도 함께., 숨바꼭질도 함께한다. 아침에 감기 걸렸다. 엄마는 이불을 안 덮어서라 하지만 아이는 믿고 있다. 내 깃털을 오리에게 다 주어서. ‘나는 좋은데 오리들은 춥지 않을까’ 미안한 느낌. 따뜻한 기운이 올라온 순간의 아이들 마음을 보여 준다. 김동수 작가그림은 생략이 미덕이다. 엄마 얼굴은 안 나오고 몸만 그렸다. 그래서 주인공 아이에게 눈을 맟출 수 있다. 또 감정을 구구절절 드러내지 않고 사건을 담담히 묘사한다. 어린아이들의 일기를 보는 듯하다. 아이들은 글을 쓸 때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벌어진 일과 자기가 한 행동만 묘사한다.
아이들은 직관에 따라 움직인다. 부모들은 말로 설명하라 하지만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난처하다,. 그냥 하고 싶어 한 건데 이유를 생각하라니 머리만 복잡하다. 왜 생각이 없나하지만 아직 언어와 놀리 사고력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판단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판단은 선명하다. 좋은 것은 좋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는 핑계일 뿐이다. 말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이다. 화려한 말로 본질을 가리지 말고 아이들의 날것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엉이와 보름달>- 제인 율런
· 성장에는 마디가 있을까? 학자들은 정신세계는 눈이 쌓이듯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듯 단계별로 성장한다고 한다. 한참을 바닥을 기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한두 걸음 때더니 이내 걷기 시작한다. 특별히 가르치지 않은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는 것을 보면 한두 글자씩 알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유창하게 읽어 낸다. 어는 순간 아이들은 복잡한 줄거리를 이해하고 엄마에게 달라붙던 아이가 사춘기로 돌입한다.
- 책- 춤 추듯 아빠와 아이 모습을 그려 붕덩이 구경이 축제임을 상징한다. 추운 겨울 보름달이 떠오른 날, 아빠는 아이를 데리고 부엉이 구경을 떠난다. 부어이 구경에선 침묵이 중요하다. 시끄러운 곳엔 부엉이가 오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재잘댔을 아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빠를 따라 묵묵히 산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커먼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곳, 그곳에서 아빠는 부엉이 소리를 흉내 내며 부엉이를 부른다. 부엉이는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춥다. 아무말없이 걸어 부엉이와 마주 본다. 몇 분 후 부엉이는 떠나고 아이는 아빠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온다. 부엉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상징이다. 부엉이 큰 눈을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의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 깜깜한 밤에만 활동하고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속성 역시 지혜의 속성과 같다. 지혜란 쉽게 발견하기 어렵고 얻기 위해선 암측 송을 헤매는 과정이 필요하니까 이런 지혜를 다루기 위해서는 아이 내부에 그에 절맞은 용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부엉이를 만나러 가는 것은 지혜를 발견하고 삶을 긴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한는 통과의례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컸기에 부엉이 구경을 나갈 수 있었다. 추위를 견디고 무서움을 견디고 침묵을 견뎌야 한다. 아이는 자기 밝로 걸어 스스로 두려움을 이겨 내고 부엉이를 만나 눈 맟추고 인내와 지혜, 용기를 만난다. 부엉이처럼 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밤을 견뎌 낼 수 있다. 미리 손을 내미는 부모는 약한 부모다. 기다림이란 부모가 얼마나 갖기 힘든 미덕인가. 성숙한 부모는 아이의 몫을 아이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맡기고 지켜봐 주기,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부모의 사랑이다.
<주먹이>-서정오
아이들은 더 작은 존재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자기보다 더 작은 존재. 그래서 더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이야기를 보면서 위로 받는다. 쟤네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며 자신감을 갖고 작은 존재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아이가 느끼기에 작은 존재라면 작은 동물이다. 그래서 펭귄과 토끼, 생쥐와 오리는 아이들 책에 주인공이다. 엄지공주. 주먹풀 먹는 소 뱃속에 들어가 뱃속을 영행하고 쇠똥에 섞여 밖으로 나온다. 솔개가 먹잇감을 낚아채 하늘 위로 올라가다 독수리가 달려들어 강에 빠진다. 잉어엑 잡아먹혀 소리 지르는 주먹이를 아빠가 알아본다. 물속까지, 육해공 모험을 모두 마친 주먹이는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늘 모험을 꿈꾼다. 부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책 읽으면 자신은 주먹이보다 훨씬 크니 작은 모험쯤은 할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갖는다. 엄지공주는 부모를 떠나 모험하고 왕자와 결혼하지만 주먹이는 아빠에게 돌아온다. 가정과 가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문화는 주먹이를 낳았고, 모험을 성공시키면 계급 이동이 가능한 서구 문화는 엄지공주를 낳았다. 책을 읽고 아이가 주먹을 쥐면 용기가 생긴 증거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도전하라고 말해 놓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종이 봉지 공주>로버트 먼치. 비룡소
옛이야기의 남성 중심성은 왕자가 공주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공주는 그저 왕자가 잘 싸워 주길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만 잔다. 여성은 수용적이고 운명은 남자에게 달려 있다. 요즘 여자아이들이 만족할 수 없다. 공주가 입은 예쁜 드레스는 마음에 들지만 공주의 수동 태도는 공감이 안 된다. <종이 봉지 공>는 전통적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용에게 끌려가는 왕자를 공기가 구한다. 예쁜 드레스는 용이 다 불태웠기에 길에서 주운 종이 봉지 한 장만이 공주가 걸친 전부다. 공주는 우런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삶과 죽음 앞에서는 그런 것이 부차적이다. 용을 만나 한 번 불을 내뿜으면 50개 마을을 태우고 10초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용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기 힘을 자랑하다 용(남자)은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다 써 쓰러지고 왕자를 구해내지만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왕자의 말에 껍데기만 보는 왕자를 구한 것이 후회스럽다. 종이 봉지 공주는 신데렐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로 이어지는,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성성에 대한 거부다.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어떤 위기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프레드릭> 래오 리오니
한 번 어긋나면 큰일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그 길은 진짜 옳은 길이 아니다.애써 버티고 있는 허약한 생각일 수 있다. 개미와 베짱이는 성실을 강조. 프레드릭은 꿈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우리에게 쓸쓸함을 견뎌내기 위한 예술, 추억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경선) 먹을 양식이 있다고 반드시 미래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프레드릭과 다른 들쥐 식구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함께 있으며 균형을 이뤄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뜻한다. 균형이야 말로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열어 줄 열쇠다.
<라이카는 말했다>-이민희
라이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개 중 한 마리다.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우주로 날아간 최초 지구 생명체가 라이카다. 귀여운 강아지가 저 멀리 사라져 홀로 버려졌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자신이 버려진 느낌이다. 이 책은 이런 불안을 상상을 통해 달래준다. 뿌그별에 가서 지구별의 대표로 환영 받고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이때 희망을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뿌그별은 노란색이다. 현실에서 란이카는 지구에서 출발한 지 7시간도 안 되어 스트레스와 과열로 죽었지만 지금 당장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 아니다. 그러면 그림책이라고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해도 되나? 역사 사실과 먼 사극드라마를 보고 신데렐라 드라마를 보면서 굳이 아이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고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믿지도 않는다. 아이들도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꿈을 갖고 싶어 한다. 마지막 장에서 뿌그별의 외계인은 우리를 만나러 온다. 이제 외계인이 무섭거나 낯설지 않다. 이야기가 잘 통하리라 믿는다. 이 책은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나 잡아갈까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책이다. 그의 위로는 따뜻하고 그런 위로를 받은 우리 마음은 푸근해진다.
· 아이들이 축구선수가 꿈이라 할 때 축구 선수는 어른이 아니다. 지금 자기 얼굴과 키 그대로 축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상상한다.
<바람이 멈출 때>-실릿 졸로토
비가 올 것 같다는 부모 말에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언덕을 올라가면 산딸기가 있다는 말에 귀한 간식을 먹었다. 부모 말은 생활은 물론 생존에도 필수적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부모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 말을 무겁게 생각했다. 요즘 부모는 그저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가 얻는 정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선생님, 교사,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얻는다. 정보원으로서의 부모 역하를 포기하면 부모 말의 권위를 갖기란 어렵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손을 옆구리에 올린 채 앞을 바라보며 두더지는 화를 내고 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자아를 상징한다. 나도 보잘 것 없지만 내 똥을 쌀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들고 보여 줄 수 있다. 이렇게 똥은 자기를 자기가 만든 것을 상징한다. 내 머리에 똥을 싸고 달아난 사람의 머리네 나도 내 똥을 남기고 싶다. 그래서 나고 그와 똑같은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걸 보여 주고 싶다. 이 책은 아이들의 자아 선언이다. 내게 함부로 하면 나도 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주제는 복수와 자기실현이라는 무거운 내용을 다룬다. 재미있고 유쾌하게
<강아지 똥> 아이들 마음에 불안이 도사리고 자기를 욕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이 마음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아이가 실패하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서 강아지똥에게는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 주는 민들레꼿이 필요하다. 내면에는 강아지똥은 물로 민들레꽃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그러기에 손 잡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이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건네는 바로 그런 손길이다.
-그림: 비 오는 흙길,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떼를 쓴다. 하지만 아아가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면 민들레꽃처럼 성장해야 한다. 계속 강아지똥에 머물면 미래는 없다. 너무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현재 나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 머물려고 하면 미래는 오지 않는다. 강아지똥은 깨달았다. 내 존재가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성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강아지똥은 민들레꽃을 꼭 껴안는다. 강아지똥은 곧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민들레꽃이 되어 멀리, 저 멀리 날아갈 것이다.
<나와 너>-앤서니 브라운
· 만 3세면 엄마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달래는 능력이 있다. 그때까지 사랑받았다면 뚜fut하게 아이 마음 안에 나를 달래 주는 엄마가 만들어진다.
아기 곰의 부모는 곰과 놀아줄 마음이 없고 소녀의 부모는 시간이 없다. 세계 곳곳에서 곰은 엄마를 상징한다. 단군 신화에서도 곰은 사람으로 변해 단군의 어머니가 되었다. 아이들은 곰처럼 푹신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들고 싶어 한다. 곰 인형은 엄마를 떠오르게 하는 물건이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이 대상‘이라 한다. 나를 달래는 주체가 외부 엄마로부터 내부 자아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거쳐 가는 물건이 전이 대상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바로 넘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전이 대상이 존재하는데 어떤 아이는 길게, 어떤 아이는 아주 짧게만 필요로 한다. 곰인형은 가장 흔하게 관찰되는 전이 대상으로 아이는 곰 인형을 데리고 다니면서 엄마가 함께 있는 듯 안심하고, 곰 인형을 안고 엄마 흉내늘 내며 엄마를 내면화 한다. 엄마를 닮은 곰, 이제 그 곰이 아이 마음속에 들어가 아이 자신이 된다. 자기를 지키는 가장 소중한 자기, 곰은 그 상징이다. 또 다른 곰. 켈트 족, 게르만 족 민담에서 곰은 강력한 힘, 전사를 상징한다. 아이 내면의 길들여지지 않은 부분, 고집스럽고 폭발하는 힘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
야노슈의 <나는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다.>
엄마 잔소리에 짜증 난 한스는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워 곰으로 변한다.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거칠게 한다. 거리 차를 멈춘 후 아이들 놀이터로 만들고 멋진 스포츠카를 공짜로 구해 친구와 드라이브를 한다. 친구를 챙기고 어른을 도와준다. “우아, 넌 정말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구나!‘ 그 말에 한스는 ”하지만 난 한스이기도 해.“
아이들은 부모와 교사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애완동물이 아니다. 아이들에겐 야샹의 충동이 있다. 야생의 충동은 어른들에겐 휘험해 보이지만 아이가 어른의 인형이 아닌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힘이다. 야노슈의 곰은 강렬하다. 화날 때는 무섭고 때론 고집스럽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람의 감정에 설렌다. 이처럼 날것의 감정이 드러나기에 강렬하다. 곰은 아이 내면에 듫어 있은, 아이보다 더 큰 ‘감정’이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 엄청난 힘이 터져 나온다. 아이의 눈물처럼 우리를 움직이는 것도 없다. 아이가 웃는 소리에 우리 모두는 녹아내린다. 이런 감정 없어서야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린 아이 감정 무시하고 얼른 이성을 발달시키라고 채근한다. 엄마가 입은 옷(이성 상징)은 파란색, 곰 한스는 빨간색(감정을 상징)으로 그렸다. 자기감정을 실컷 표현한 한스가 고른 자동차른 파란색 자동차, 자동차를 타고 평화로운 들을 지나 사람을 돕고 친구를 챙긴다. 아이 감정 두려워 말자. 처음에는 깜짝 놀랄 수 있지만 곧 아이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 존 버닝햄>
아이와 강아지가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강하게 명령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도 기차에 타는 동물이 사정을 예기하자 다 태워준다. 큰 목소리로 이 대사를 반복하며 아이가 신나한다. 동물 친구가 늘어가고 기차는 가득 찬다. 아이는 긴장한다. 하지만 마지막은 해피엔딩, 모두 함께 놀 수 있다는 마무리에 아이들은 안심한다. 아이들이 기차를 좋아하는 이유를 프로이트는 기차는 남성 성기, 터널은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고 했다. 남자 아이는 기차를 보고 남성성을 확인하며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오디푸스적 욕망을 기차 놀이를 통해 실현한다. 아이들은 비교적 형태가 복잡한 승용차보다 단순한 형태의 버스나 기차 장난감을 선호한다. 더 멀리, 더 빨리 가고 싶은 아이에게 기차는 유능함의 상징이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치치는 화부 아저씨가 없을 때 냅다 달린다. 맘껏 떼를 부리는 아이들과 닮았다.자신은 힘을 과시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놀란다.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치치는 기분이 좋다. 자기 소망을 이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위기가 찾아온다. 치치는 길을 잘못 든데다 너무 빨리 달려 연료도 떨어져 먼춘다. 다행히 치치는 곧 자기를 데리러 온 기관사화 차장 아저씨를 만난다. 그들은 말썽 부린 것을 탓하지 않고 그저 멀쩡하다는 것에 기뻐서 춤을 춘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일까? 치치는 스스로 이제 말썽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험을 장려하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원형적 서사구조는 초기 그림책의 전형적 구조이다.
어른에게 기차는 일상을 떠나 자유를 얻고 싶은 욕망을 상징한다. 모두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이의 기차는 미래로 향한다. 이제 힘이 생겼으니 한번 해볼 수 있으리라 그런 내면의 에너지가 바로 기차다.
<숲 속으로>- 앤서니 브라운
소를 데리고 있으면서 계속 아프다고 하는 아이는 젖먹이 시절 아이가 겪었던 아픔을, 케이크를 달라고 하는 여자아이는 욕심을, 헨젤과 그레텔처럼 보이는 남매는 외로움을 빨간 외투가 떠오르는 빨간 모자의 늑대는 두려움의 감정을 은유한다. 아이는 숲을 통과하며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감정을 만나고 있다. 시련의 순간 우리는 무의식으로 들어가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만난다.
늘 안 된다는 말에 시달리고 상처받는 아이들, 상상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마지막 놀이터다. 아이들은 구름이다. 구름처럼 자유롭게 모양을 바꾸어 어른들의 포위를 빠져나갈 것이다.
<바다 건너 저쪽>
모래는 아이가 바다를 좋아하는 두 번쩨 이유다. 모래는 영원한 장난감이고 장남감의 원형 중 하나다. 아이들은 물과 모래만 있다면 몇 시간이고 놀 수 있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늘어나는 모래. 여름바다는 원초적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로 결합하여 만들어 낸 풍경이다.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과 바다가 공존한다. 바다는 모성을 상징한다. 바다는 엄마처럼 우리를 쉬게 하고 무언가를 창조하도록 유도한다. 바다에서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파도가 후려치고 간 뒤 조개껍데기를 남긴다. 고통이 무서워 도망치지 않는다면 고통은 나에게 선물을 남긴다. 아이는 바다의 선물을 가지고 신나게 논다. 바다와 아이는 하나가 된다. 바다는 감정을 상징한다. 알 수 없고 조종할 수 없지만 한번 움직이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 감정이다. 바다는 무의식의 상징이다. 무의식에는 온갖 욕망과 갈등이 버무려져 있다.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 못할까 두렵지만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헌 피할 수 없다. 감정과 세상은 아이를 흔들지만 아이는 거시서 배우고 나아간다.
<작은 배>-캐시 핸드슨, 보림
“우린 가라앉지 않아. 내배랑 나는.” 반복적이다. 그렇다. 시련은 아이 꿈을 꺾을 수 없다. 작다고 약한 존재는 아니다. 작고 가볍기에 가라앉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살아남는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감정은 우리를 흔들 수 있고, 내 마음속 갈등과 두려움이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그게 전부다. 잠시 흔들리고 잠시 가라앉는 것이 전부다. 힘든 순간은 지나가고 작은 배는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한 번에 다 이겨 내지(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결국 감정의 주인은 나다. 나의 주인이 감정은 아니다. 자기 마음을 담아 모험을 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인생이든 물이 담긴 욕조든 두려움을 이기고 도전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한바탕 놀이를 한 아이는 그림책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바닷가 바위도 파도에 깍여 나가는 법. 아이도 주변의 계속된 평가에 흔들리기 마련이다. 아이에게 흔들림은 존재의 불안을 유도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열등한 부분은 자기가 아니라고 부인하기 시작한다. 못난 부분을 인정하기는 달갑지 않다. 감춰두려 한다. 이렇게 버려두면 열등 부분은 더욱 자라지 못한다. 관심을 갖고 키워도 부족한데.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열등감은 커진다. 스스로도 나 같지 않다고 여겨 금기야는 내 몸에서 쫓아 버린다. 그림자도 나의 것이다. 내 약한 모습도 소중한 일부다.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 장 피에를 케를로크의<내 그림자에 오줌 싸지 마!>는 그림자의 이런 심리적 의미를 탐색한다. 발렝탕은 친구처럼 자기와 함께하는 그림자가 좋다. 위기가 닥친다. 급한 나머지 길에 오줌을 싼다. 창피하다. 내가 했지만 내가 아니라고 미루고 싶다. 이때부터 그림자는 발렝탕을 괴롭힌다. 쫓아오며 화 내고 정반대로 한다. 발렝탕이 팔을 들면 그림자는 물구나무를 선다. 그림자는 나의 창피한 모습이다. 미성숙한 모습. 나의 한심한 행동을 그림자의 짓으로 미루자 그림자는 나의 한심한 모습을 몽땅 보여 준다. 발렝탕은 겁나고 화나 여자 친구 그림자와 바꾼다. 망에 안 들어 발로 뻥 차서 산산조각나게 한다. 그림자는 제멋대로 변한다. 자전거가 되었다가 하늘 나는 돼지도 되고 못난이 마녀가 되어 빗자루에 태우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땅에 떨어지자 참을 수 없어 발렝탕은 바닥을 구르며 그림자와 다툰다. 발렝탕은 어름들보다 용기 있다. 자기의 약한 부분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꿈과 놀이를 통한 대응이지만 적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드려워서 외면할 때 그림자는 점점 자란다. 너무 커진 그림자가 나의 모든 것이 되고 만다. 내 약한 모습도 소중한 내 일부라고 깨닫는다. 부끄러운 모습이 내 모습이다. 그림자를 내 일부로 받아들여여 그림자는(그림자는 여리고 약한 내면을 의미한다.) 아무 힘도 쓰지 않는다.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면 부끄러울 것 같지만, 내 모습이라고 인정해야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수 있다.
어른 할아버지에게 아이 같은 모습은 약점이고 그것이 아이 그림자로 그려졌다. 약점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약점 덕에 할아버지는 손자를 이해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약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 그것 역시 자신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상대를 누른다고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상대와 내가 하나라고, 내 안에 상대가 있고 상대의 속에 내가 있음을 알아야 두려움을 이긴다. 엄마에게 야단 맞은 아이는 방에 들어가 그림자 졸이를 한다, 상상을 하고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이기려 노력한다. 세상을 자기 품에 넣으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란다. 어쩌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어른인지 모른다. 가면을 쓴 채 그림자가 있다는 것도 잊고 사는 부모들, 우리는 두려움도 모른 채 점점 더 두려운 존재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엠마>- 웬디 캐설만
일흔 두 살 먹은 할머니 엠마 이야기다. 생일날 가족들이 준, 산 너머 작은 마릉륵 릔 그림을 보고 예전에 살았던 마을을 직접 그리려고 한다. 그린 그림을 주책없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해서 감춘다. 꿈을 갖지 않기에 우리는 늙는 것이지, 늙어서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부모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책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저 늙고 힘이 없고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고, 뭐든 하고 싶은 사람이다.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쉽게 타인을 대상화하고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엠마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여전히 꿈을 꾸고 행복을 만들어 가고 싶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알려 준다.
<눈 오는 날>
삶이란 늘 때가 묻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남긴다. 그러기에 흰색은 늘 그리운 출발점이다.
<눈 오는 날의 생일>- 이와사키 치히로
생일 파티에서 작은 실수를 한다. 실수를 놀리는 친구들 창피해서 도망친 토토는 생일도 친구도 싫다. 토토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자신이 처음 태어난 그날처럼 이번 생일에도 눈이 왔으면. 눈을 기다리는 토토의 마음은 백지 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친구에게 미안한 맘, 놀림당해 창피한 마음을 다 지우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 눈이 오면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눈은 새로운 출발점이다. 살아온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은 창피함을 못 견딘다. 나이 먹은 어른들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지만 아이는 그런 체념과 수용이 어렵다. 오히려 마술적 해결책을 믿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취소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상처 입은 아이들은 눈처럼 모든 것을 덮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눈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은 솜처럼 가벼운, 그 우아한 낙하에 있다. 천천히 흔들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면 새의 깃털처럼, 이불솜처럼 포근할 것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다른 것은 좀 무서운데 눈은 전혀 겁나지 않는다.
<겨울 할머니>-필리스 루트
하늘에 사는 겨울 할머니는 봄여름을 보내는 동안 거위의 깃털을 모아 큰 깃털 이불을 만든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만들어 둔 커다란 이불을 힘껏 턴다. 이불에서 작은 가루가 떨어져 내리는게 그게 눈이다. 거위털과 이불이 주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분명 만지면 차갑고 선뜩한 눈이지만 멀리서 볼 때는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해 보이는 것이 눈의 신비다. 눈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아이들을 꿈꾸게 한다. 눈은 다른 어떤 자연물보다 뛰어난 만들기 재료이다. 공짜인 데다 가볍다, 뭉치고 모양을 만들고 다듬기가 쉽다. 조금 수고를 들이면 자기 키보다 더 큰 눈사람도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은 사소한 것을 만들더라도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 낮에 놀다가 마주친 것, 놀면서 아이가 만든 것은 모두 아이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그건 적어도 아이에겐 무생물이 아니다. 아이의 꿈에 등장하고 꿈에서는 자유를 얻어 맘껏 움직인다. 아이는 꿈을 통해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룬다. 눈은 그 꿈을 풍성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소재 중 하나다.
<첫눈> 박보미. 한솔수북
아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은 펄쩍 뛰어 봤자 1초도 안 돼 발이 땅에 닿고마는 중력의 공간이다.벗어날 수 없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뛰어 봤자 벼룩이다. 그러나 눈이 오는 순간만큼은 현실이 잠시 중력을 잃는다. 세상 모든 것이 가벼워진다. 더러운 것도 가려져 보이지 않고 복잡한 것도 하얀 눈 아래서는 단순해 보인다. 잠시지만 현실이 만만해지고 그 위에 뭐라도 그려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는 설렘에 가슴이 부풀어 로는다.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 보고 돌돌 뭉쳐도 보고 이내 굴려서 눈덩이도 만든다. 눈덩이는 굴릴수록 점점 커진다. 현실에서는 한 뼘 자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눈은 뭉치고 굴리면 쉽게 커진다. 눈사람은 더 커지고 싶고, 더 자라고 싶은 아이의 소망을 반영한다. 아울러 나도 뭔가 그럴듯하고 큰 걸 만들어 낼 수 있고 뻐기고 싶다. 엄마, 아빠가 날 만들어 냈듯이 나도 이렇게 큰 걸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아이는 말하고 싶다. 나도 엄마, 아빠처럼 능력이 있으니 무시하지 말라는 아이의 불안과 자존심, 그 표현이 바로 눈사람이다. 아이는 골목을 지나고, 논밭을 지나고, 밤기차가 지나는 어두운 길을 지나 눈덩이를 굴리며 하염없이 걸어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 숲 속으로 자기 키 만큼이나 커진 눈덩이를 굴려 가며 그리고 도착한 너른 공터. 그곳엔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자기보다 큰 눈덩이와 함께 모여 있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 도와 눈사람을 만든다. 그렇게 눈과 아이는 하나가 된다. 이 그림책으리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하늘에서 눈과 눈살함, 아이들이 함께 내려온다. 어쩌면 아이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자기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냈다는 자신감으로 부푼 아이들의 마음, 마음을 누르는 불안을 덜어 낸 아이들의 마음은 더없이 가볍다. 눈처럼 가벼워 저 하늘 위로 떠오를 듯만 싶다. 아이들이 눈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은 가벼워지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다. 왜 그것도 못하느냐는 말, 넌 아직 안 된다는 말에 눌리지 않고 싶다. 한번쯤은 뭐든 할 수 있고, 어는 곳에든 갈 수 있고, 어는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눈처럼 살고 싶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는 혀로 눈을 받아 먹는다. 아이들에게 눈은 먹고 싶을 만큼, 그래서 하나가 되고 싶은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다. 사랑의 결과는 부모에게 적지 않은 수고를 들게 하지만 그것조차 막ㄴ즌다면 아이은 또 어디서 그만큼 마음을 키울 수 있겠는가. 내 편인 듯 했던 친구도 때에 따라 변하고, 온전히 내 편인 줄 알았던 엄마조차 내 말을 안 들어줄 때가 많다.
<아기 여우와 털장갑>
차가운 겨울이지만 아이들은 뛰놀아야 한다. 녹아 버릴 것을 알지만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에 시작은 조금 가벼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도전을 격려해야 하는 부모에게 눈은 좋은 모델이 된다. 아이는 옳은 것, 좋은 것을 따라가지 않는다. 신나는 것, 매력적인 것에 용기를 낸다. 만만한 것, 도전해 볼 만한 것에 끌린다. 미래가 안 보이는 시대라고 다들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부모부터 미리 겁먹어서는 곤란하다. 가벼운 눈처럼, 포근한 느낌으로 아이의 도전을 자극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불안을 밀치며 앞으로 나간다.
<눈물 바다>서현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 자꾸 울면 꼼쥐가 잡아간다고도 한다. 울음을 멈추게 하려는 협박이다. 아이의 감정까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부모의 욕심이다. 감정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 순수하게 자기 것인데 아이의 감정은 편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이가 울면 부모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음은 분명 도움이 된다. 약간의 울음은 슬픔을 가중하지만 크게 울고 나면 슬픔이 씻겨 나간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라 교육받았기에 어른이 되면 슬퍼도 제대로 울지 못한다.그저 찔끔 눈물을 흘리거나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달랜다. 그러고 보면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을 질투하는지. ‘나는 마음껏 내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는데 너는 어찌 그렇게 네 마음대로 하니?’ 내 마음속의 이해받지 못한 어린아이가 현실의 내 아이를 질투한다. 눈물바다는 그림책의 얼개가 아이의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작가의 첫그림책인 이 책읁 작가 자신의 슬픔을 다루어 온 오랜 시간을 통해 그려 낼 수 있었으리가 슬픈 아이를 만났을 때 우선 필요한 것은 위로의 눈빛이다. 속상해 보인다고 토닥이고 그럴 만다고 인정해 주는 마음이다. 그러면 아이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왜 짜증이 났는지를 말한다. 그 말은 아이 입장에서 바라본 현실이다. 그러가 그 이야기를 그저 들어 줘야 한다. 이 순간 아이에겐 그 현실이 소중하니까. 눈물바다의 주인공이 빨랫줄에 부모와 선생님을 말리듯 아이도 자신이 화가 났던 대상에게 긍정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현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실컷 울고 난 아이는 자기 울음이 만들어 낸 결과에 놀란다. 벽에 걸린 액자에는 눈물이 고여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창밖의 태양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아이 눈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지만 눈빛은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잔소리의 지겨움이 없다. 그저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림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슬픔도 힘이 된다. 그 슬픔을 공감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몰리 뱅
아이들이 생각하는 세계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다. 그 세계는 중심에 가까울수록 크기가 커지는 왜곡된 세상이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의 생각과 바람은 작게만 느껴진다. 어쩔 때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는 갈등이 일어나도 그것이 동등한 두 사람 사이의 의견 차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훨씬 중요한 자기 생각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사람의 생각이 부딫힌다고 느낀다. 이 상황에서 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아이는 얼른 이해가 안 된다. 화 날 수 밖에 화난 소피는 발 구르고 소리 지른다. 마음 같아선 뭐든 부숴 버리고 다 날려 버리고 싶다. 화난 아이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대단한 에너지를 낸다. 하지만 소피는 진짜로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밖으로 달려 나가 달리고 달린다. 그러다 지치자 훌쩍이며 혼자 운다. 폭발은 이제 끝났다. 마음이 가라앉고 조금 허전하다. 그러면 주변을 살핀다. 나무와 바위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그러고는 커다란 밤나무 위로 올라가 바람을 맞고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잔잔한 세상이 소피 마음을 채워주며 달래 준다. 화가 풀린 소피는 이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집으로 돌아온다. 소피를 기다리던 식구들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소피를 반기고 함께 퍼즐을 맞춘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돌아왔다. 아이들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화를 내는 것은 잘못 아니다. 화 내고 화 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화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고 서럽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아이의 몫이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시간을 주면 대부분 아이는 스스로 깨닫는다. 오히려 왜 화를 내느냐고 야단을 칠 때 아이는 배우지 못한다. 자기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다는 피해의식과 억울함에 휩싸인다. 그렇다고 마냥 달래 줄 필요도 없다. 달래 주면 아이는 화룰 풀기 위해 늘 누군가에게 의존하려 든다. 아이의 화가 풀리는 데는 그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피 가족은 소피가 화 나 집밖으로 나갈 때 가만두었다. 이미 소피는 자기 혼자 화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피가 들어오자 반갑게 맞아 준다. 스스로 화를 푼 것은 대견한 일이고 후련한 일이기에. 부모가 거기에 한마디 가르침을 굳이 얹을 필요는 없다. 허전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것. 그 포근한 사랑이 화의 마지막 불씨를 없애는 가장 강력한 소화전이다. 몰리 뱅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붉은 색의 외곽선을 쓰고 화가 풀리면 차츰 주황색, 노란색으로 변한다. 소피의 주변에 있는 나무나 바위 같은 자연도 소피가 화났을 때는 붉은색이었다가 감정 상태에 따라 초록색과 하늘색으로 변해 간다. 아이가 느끼는 자연은 결국 아이의 감정 상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읽으며 화 푸는 법을 배운다. 소피는 화 풀려고 뛰고 소리 지른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화를 푸는 좋은 방법이다. 소피가 나보다 훨씬 큰 자연 속에 머물 때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또 감정이란 얼마나 순간적인지 느끼게 된다. 나도 위대한 존재에 기댈 때 우리의 마음속엔 평화가 온다. 그리고 또 어떤 방법이 있을까? 부모가 자기 나름의 화를 푸는 방법을 이야기해주자. 그 시간이 아이의 인생에는 더없이 소중한 배움 시간이다.
<늑대가 나는 날>
아이들은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설명은 논리적일 수 없다. 아이의 상상은 저 멀리 뛰어가기에 그에 걸맞은 논리를 갖추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만든 논리를 보면 자기가 이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얼기설기 이어 붙여 어설픈 생각에 그친다. 이런 논리는 어른이 듣기에는 황당할지 몰라도 아이에게는 최선이다. 아이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려 든다. 그래야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에. <늑대가 나는 날>은 아이들 특유의 사고를 그림을 통해 보여 준다 수체 물감으로 굵고 거칠게 그려 섬세함이나 단정함은 없다. 아이 그림처럼 투박하지만 그 강렬함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데, 한편으로는 불안한 아이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저려 온다. 볼수록 신기한 그림이다. 이야기 시작부터 아이는 혼자다. 작가는 아이가 왜 혼자인지 말하지 않는다. 부모는 일 나가고 골목에는 친구가 없다. 골목 주인은 자동차, 위험한 어른들이다. 이렇게 혼자여야 하기에 아이는 외롭다. 아니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