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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에서의 부처님의 질문의 요지 ;
일체중생이 윤회를 계속하는 까닭은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성품이 맑고 밝은 본체임을 알지 못한 체 온갖 허망한 생각들을 제 마음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이 있는 곳을 알아야 토벌할 수 있는 것처럼 그 허망한 마음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항복시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묻노니 지금 네 마음이 있는 곳을 아느냐?
능엄경에서 제시한 수행법 ;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 ; 이근(耳根)을 통하여 문성(聞性)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망심(妄心)을 유발하는 모든 경계를 해제하는 반문자성(反聞自性)의 방법
o 귀로 들려오는 일체의 소리들을 들으며 무슨 소리인지 분별하고 아는 성품(문성聞性)을 관조(觀照 온 마음을 귀에 집중)하는 수행방법으로
능엄경의 '원통품'에 등장하는 아라한들과 보살들이 각자의 수행방법을 말한 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그러한 수행법들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힌 뒤 제시한 최상의 수행법임
대세지보살의 염불원통법 ; 육근(六根)을 모두 포섭(包攝)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에 대한 정념(淨念 일념(一念))에 드는 방법
제2권의 요지 ;
물질과 나 몸과 마음 본질과 작용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오음(色·愛·想·行·識)은 모두 자연도 인연도 아닌 허망한 것임을 밝혀가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의 본성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함
阿難白佛言:“世尊!誠如法王所說,覺緣遍十方界,湛然常住性非生滅,與先梵志娑毘迦羅所談冥 諦,
아난백불언:“세존!성여법왕소설,각연편십방계,담연상주성비생멸,여선범지사비가라소담명 체,
及投灰等諸外道種說有 眞我遍滿十方,有何差別?
급투회등제외도종설유진아편만십방,유하차별?
世尊亦曾於楞伽山,爲大惠等敷演斯義,彼外道等常說自然,我說因緣非彼境界。我今觀此覺性自然非
세존역증어 릉가산,위대혜등부연사의,피외도등상설자연,아설인연비피경계。아금관차각성자연비
生非滅,遠離一切虛妄顚倒,似非因緣與彼自然,云何開示不入群邪,獲眞實心妙覺明性?”
생비멸,원리일절허망전도,사비인연여피자연,운하개시불입군사,획진실심묘각명성?”
佛告阿難:“我今如是開示方便,眞實告汝,汝猶未悟,惑爲自然。阿難!若必自然,自須甄明有自然
불고아난:“아금여시개시방편,진실고여,여유미오,혹위자연。아난!약필자연,자수견명유자연
體。汝且觀此妙明見中,以何爲自?此見爲復以明爲自?以暗爲自?以空爲自?以塞爲自?阿難!若明
체。여차관차묘명견중,이하위자?차견위부이명위자?이암위자?이공위자?이새위자?아난!약명
爲自,應不見暗;若復以空爲自體者,應不見塞。如是乃至諸暗等相以爲自者,則於明時見性斷滅,云
위자,응불견암;약부이공위자체자,응불견새。여시내지제암등상이위자자,칙어명시견성단멸,운
何見明?”
하견명?”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覺緣: 각연]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梵志)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眞我: 진나]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에게 이 뜻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설하나 내가 말한 인연은 저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살펴보니 깨달음의 성품은 자연으로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멀리 일체 허망한 뒤바뀜을 벗어났으므로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야만 온갖 사견(邪見)에 들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성품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줬는데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과 헷갈리는 것이냐.
아난아, 만일 틀림없이 자연이라면 ‘저절로[自]’가 반드시 분명하여 자연의 체[自然體]가 있어야 한다.
...이 묘하고 밝게 보는 작용에서 무엇으로 자체(自體)를 삼겠느냐.
이 보는 작용을 밝음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어둠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빈곳[空: 공]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막힘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또 만일 빈곳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갖 어둠 등의 모양을 자체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여 없을 텐데 어떻게 밝음을 보겠느냐.”
阿難言:“必此妙見性非自然。我今發明是因緣性,心猶未明,諮詢如來是義云何合因緣性?”
아난언:“필차묘견성비자연。아금발명시인연성,심유미명,자순여래시의운하합인연성?”
佛言:“汝言因緣,吾復問汝。汝今同見,見性現前,此見爲復因明有見?因暗有見?因空有見?因塞
불언:“여언인연,오부문여。여금동견,견성현전,차견위부인명유견?인암유견?인공유견?인새
有見?阿難!若因明有,應不見暗;如因暗有,應不見明。如是乃至因空、因塞,同於明暗。復次,阿
유견?아난!약인명유,응불견암;여인암유,응불견명。여시내지인공、인새,동어명암。부차,아
難!此見又復緣明有見?緣暗有見?緣空有見?緣塞有見?
난!차견우부연명유견?연암유견?연공유견?연새유견?
阿難!若緣空有,應不見塞;若緣塞有,應不見空。如是乃至緣明、緣暗,同於空塞。當知如是精覺妙
아난!약연공유,응불견새;약연새유,응불견공。여시내지연명、연암,동어공새。당지여시정각묘
明非因非緣,亦非自然非不自然,無非不非無是非是,離一切相卽一切法。汝今云何於中措心,以諸世
명비인비연,역비자연비부자연,무비불비무시비시,리일절상즉일절법。여금운하어중조심,이제세
閒戲論名相而得分別?如以手掌撮摩虛空,只益自勞!虛空云何隨汝執捉?”
한희론명상이득분별?여이수장촬마허공,지익자로!허공운하수여집착?”
아난이 말했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이제 인연으로 생긴다고 밝히려 하나 제 마음은 오히려 아직 분명하지 못해서 여래께 묻습니다.
이 뜻은 어떻게 해야 인연의 성품[因緣性: 인연성]에 부합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노라.
너는 지금 보는 작용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하니
이 보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만일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곳과 막힘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예와 같다.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은 또 밝음을 연(緣)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만일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빈곳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밝음과 어둠을 연하는 경우도 빈곳과 막힘의 예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無非不非: 무비불비],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가운데[無是非是: 무시비시], 일체의 모양을 떠나서 일체의 법과 일치하느니라.
너는 어째서 이 가운데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하는 온갖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이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듯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인데,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阿難白佛言:“世尊!必妙覺性非因非緣。世尊云何常與比丘,宣說見性具四種緣,所謂因空、因明、因心、因眼。是義云何?”
아난백불언:“세존!필묘각성비인비연。세존운하상여비구,선설견성구사종연,소위인공、인명、인심、인안。시의운하?”
佛言:“阿難!我說世閒諸因緣相,非第一義。阿難!吾復問汝。諸世閒人說我能見。云何名見?云何不見?
불언:“아난!아설세한제인연상,비제일의。아난!오부문여。제세한인설아능견。운하명견?운하불견?
阿難言:“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아난언:“세인인어일、월、등광견종종상,명지위견;약부무차삼종광명,칙불능견。”
“阿難!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阿難!若在暗時,不見明故名
“아난!약무명시명불견자,응불견암;약필견암,차단무명운하무견?아난!약재암시,불견명고명
爲不見;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如是二相俱名不見。若復二相自相𣣋奪,非汝見性於中暫無,
위불견;금재명시불견암상,환명불견。여시이상구명불견。약부이상자상능탈,비여견성어중잠무,
如是則知二俱名見,云何不見?
여시칙지이구명견,운하불견?
是故阿難!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見暗之時,見非是暗;見空之時,見非是空;見塞之時,
시고아난!여금당지,견명지시,견비시명;견암지시,견비시암;견공지시,견비시공;견새지시,
見非是塞,四義成就。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見猶離見,見不能及。云何復說因緣、自然及
견비시새,사의성취。여부응지,견견지시,견비시견;견유리견,견불능급。운하부설인연、자연급
和合相?汝等聲聞狹劣無識,不能通達淸淨實相,吾今誨汝,當善思惟,無得疲怠妙菩提路。”
화합상?여등성문협렬무식,불능통달청정실상,오금회여,당선사유,무득피태묘보제로。”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비구들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에 네 가지 연(緣)을 갖췄으니, 이른바 빈곳을 인연하고 밝음을 인연하고 마음을 인연하고 눈을 인연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을 뿐,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 제일의]을 설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또 네게 묻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보이면 보는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밝음이 없을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분명 어둠을 본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을 뿐이지, 어째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어둠 속에 있을 때 밝음을 못 본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밝은 데 있으면서 어두운 모양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두 모양을 함께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빼앗아 바뀔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밝음과 어둠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분명히 알라. 밝음과 어둠을 둘 다 보는 것인데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곳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빈곳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네가 물은 네 가지 뜻이다.
너는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는 정기를 볼 때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느냐.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모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곰곰이 잘 생각하여 묘한 보리의 길[妙菩提路: 묘보라로]에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 팔만대장경 -대불정만행수능엄경 불교사전
청암스님
첫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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