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아이 증후군
정명숙
봄이 오면 친정집 울타리엔 노란 산수유꽃과 자주색의 작은 구기자꽃과 하얀 찔래꽃이 차례대로 꽃을 피웠다. 몇 해 전 아버지는 울타리를 보수하려고 풀숲에서 잔 나무가지들을 베어다가 칡넝쿨로 엮어 고랑을 파고 흙으로 덮어 울타리를 새로 만들었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자 가녀리고 이름도 없는 나무가지에서 하나둘씩 작은 잎들을 틔우기 시작했다. 마치 백년동안 잠자던 숲속의 공주가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마법이 풀려 깨어나듯 울타리에서도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산수유나무와 구기자나무와 찔레나무가 차례대로 이름이 붙여지고 우리 식구가 되었다.
우리집 울타리에서 제일 먼저 산수유나무에서 꽃망울을 터트렸다. 봄에 피는 진달래꽃, 개나리꽃들처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었다. 산수유꽃은 자세히 보아주지 않으면 말없이 스쳐 지나가듯 피었다가 또 언제 피었냐 싶게 눈처럼 녹아 사라져 버리는 꽃이었다. 샘가에서 허드렛 일하던 언니가 허리 쉼을 쉬려고 일어나 먼 곳을 쳐다볼 때 어쩌다 눈에 들어와 “아!”하고 그제서야 자세히 살펴보게 되는 꽃이다. 다른 꽃들과 섞여 피어있으면 피었는지 안 피었는지조차 구분이 안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유꽃에서는 청상과부였던 외할머니가 피우고 놔둔 담뱃대에서 나는 고약한 아픔이 베어있었다.
어느 해던가 꽃샘추위가 유난히 심했던 봄날이었다. 산수유나무는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스스로도 노란꽃을 피워낸 것이 감격스러웠는지 어쩔줄 몰라했다. 누군가가 그런 자신을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노란 꽃잎을 바람에 흔들며 “나, 잘했지.” 소리쳤다. 그런데 “그래, 잘했어”라는 대답은 커녕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에 다시는 꽃을 피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 밀려왔었다. 그냥 “잘했다” 한마디면 되었는데 라고 애써 변명을 해봐도 산수유꽃은 끝내 힘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사위어져 갔다.
메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노란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 집에도 봄이 왔다. 아직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찬바람이 가득한데도 노란색 습자지같은 여리디 여린 꽃을 방울방울 피워냈다. 나뭇가지들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산수유꽃이 피었다 지는지도 모르는 채 봄을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보게 되었다. 산수유꽃을 닮은 나를 보게 되었다. 엄격하고 엄했던 아버지는 여덟 명의 자식들을 당신이 짜놓은 틀에 맞춰놓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나는 친정 아버지께 길들여진 대로 나보다는 남들이 좋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윗 사람에게 공손하고, 윗사람들의 지시에 순종하고, 아랫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색깔과 재능을 숨겨둔 채로 있는 듯 없는 듯한 무늬 같은 혹은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내가 산수유꽃에 마음이 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봄 내음이 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친정집 울타리엔 노란 산수유꽃이 피었건만,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내 속에 있는 색깔과 끼를 퍼내지 못하고 남들의 눈과 평가에 벌벌 떨며 사는 착한아이 증후군이 퍼렁물처럼 가시지 않는 상처로 남아서 아프다. 그래서 청상과부였던 외할머니가 피우고 놔둔 담배대에서 나는 고약한 아픔이 나에게서도 난다.
스페어 키
정 명 숙
토요일이면 자전거를 타고 서천 변으로 나간다.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서천 변에서 시작해서 동천 변을 도는 코스로 자전거를 탄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서천 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일은 무기력하고 나태한 중년의 삶을 거친 물살을 거스르며 오르는 연어처럼 펄떡이게 한다.
어릴 적 오빠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이면 부모님께서는 벌교장에서 삼천리자전거를 사 오셨다. 오빠가 둘 있는 우리 집은 삼천리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서서 달빛에 반짝반짝 윤을 냈다. 마당이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벌교장날 사 온 삼천리자전거는 우리집 마당을 꽉 채우고도 남아었다.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도, 어머니의 마음도, 어린 조무래기들의 마음도 그때만큼 벅차오른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는 산골의 3월의 밤은 방문을 여닫을 때마다 찬바람이 방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언제나 문단속을 철저히 하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어린 자식들에게 포도알이 굴러다니는지 흥분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방문을 여닫느라 찬바람이 방안 가득 찼는데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그치지도, 투박한 손으로 우리들의 등짝을 때리지도 않으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없이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때만큼은 자식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이 우리들처럼 뜨겁고 간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자라서 중학생이 되었다. 십여리나 되는 통학 길과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자전거를 사 주시려나 하는 마음으로 겨울방학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짬짬이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 키가 작았던 나는 자전거 안장에 앉으면 발판이 발끝에 닿지가 않아 자전거 안장에서 엉덩이를 들고 발판을 돌리느라 떡방아를 찧듯 왼쪽 엉덩이와 오른쪽 엉덩이가 서로 어긋나게 삐죽삐죽 거리느라 볼품사나웠다. 친구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곧잘 탔다. 그런데 나는 자전거 타기가 둔하고 서툴고 느리기만 했다. 친구들처럼 잘 타고 싶은 생각에 자전거를 가지고 내리막길에 섰다. 빠른 속도를 맛보면 뱃심(용기)이 생긴다고들 했다. 자전거의 패달을 힘껏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전거는 탄력을 받아 거침없이 내리막길로 손살같이 달려갔다. 나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친 속도감에 놀라
자전거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잡아버렸다. 거칠게 속도를 내던 자전거와 내가 갑자기 하늘로 부웅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한 참 후에 깨어나 보니 물이 고인 웅덩이에 나와 자전거가 형편없는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 후로 키 작은 아이는 3년 동안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걸어서 통학을 했다.
늦둥이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엄마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오 십세가 된 엄마는 막막했다. 그래서 어릴 적 자전거를 배우다가 그만둔 사연을 이야기해줬다. 아들은 대뜸 “실패했으니까 다시 배워야지”한다. 나이가 많은 엄마가 자전거를 배우면 안 되는 수십 가지 이유를 늘어놓았다.
“아이들한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다시 일어서라며, 그럼 엄마도 다시 일어서야지.” 어쩔수가 없었다. 자건거를 차에 싣고 서천변 인라인 스케이트 장으로 향했다. 아들은 무서운 강사님, 엄마는 겁많은 학생이 되었다. 몇날 며칠을 연습을 했다. 아들도 점차 고개를 저을쯤 둔하고 서툴고 느린 자전거 타기가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놀란 아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에 어릴 적 거친 속도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만 브레이크를 힘껏 잡아 버렸다. 나와 자전거가 하늘로 부~웅 떠올랐다. 땅에 떨어지면서 안경이 부러지고 엄지손가락 근육과 이마와 눈썹 주위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말했다. “이제 자전거 안타도 돼.” 제 딴에도 많이 놀랐나 보다. 크게 넘어져 보니 정말 뱃심(용기)이 생겼다. 오늘도 아들이랑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 밟으며 서천 변에서 동천 변으로, 광양읍에서 순천시 신대까지 자전거 도로 위를 힘차게 패달을 밟는다. 거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간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는 나무도 풀도, 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면서 알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며 보았던 풀들을, 나무들을, 꽃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래동안 힘이 없고 재미 없고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시들어가는 삶들이 다시 설레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 학교 가는 오빠들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뒤따라 달렸던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서천 변을 달리는 나에게 자전거는 새로운 인생의 스페어 키가 되어 주었다.
첫댓글 정명숙 회원님, 작품 제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