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공자의 생애】
[유년기]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B.C. 551년(노 양공 22년) 자가 숙량이고 이름은 흘인 아버지(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림)와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또 24세에 어머니마져 여위어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남다른 향학열을 불태워 이미 15세 경에는 뜻을 세웠다. 노나라 대부 맹희자(孟희子)가 아들에게 17살인 공자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유언하는 정도였으니 공자의 학식이나 인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공자는 19세 때(B.C. 533년)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이(鯉)를 낳았다.
그러나 이미 멸망당한 송나라 현인의 가문의 후손에 지나지 않는 공자는 가난하고 신분도 미천했다.
그래서 결혼한 해에 노나라 귀족인 계씨의 위리(委吏--창고직이)와 직리(職吏: 목장 관리) 등 우선 천직(賤職)을 맡아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 일들을 하자 일 처리가 공평하고 가축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승진하여 사공(司空: 공사 감독관)이 되었다.
[청년기]
야망에 불타던 공자는 여러 나라에 유세하려고 관리를 사직한 뒤,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나라를 돌아다녔으나 받아주는 나라가 없고 곤궁에 빠지기만 하자 고국에 되돌아왔다.
남궁경숙이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청해 임금의 후원으로 공자는 남궁경숙과 주나라 서울인 낙읍에 가서 문물을 견학하게 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이때 공자가 노자를 만나기도 했다고 적혀있으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낙읍 방문을 마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공자는 그 명망이 더욱 높아져 사방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30세 때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이 안자(晏子: 제나라의 현명한 대부 안영(晏영))와 노나라에 왔다가 공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 정치를 물어본 일도 있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三桓氏: 노나라 16대 왕인 환공의 후손으로 노나라 정권을 장악하던 세도가)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노나라 임금인 소공은 삼환씨의 하나인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이것이 삼환의 난이라는 사건이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에 간 공자는 경공을 만나 또 정치를 논하고 경공의 탄복을 받아 임용이 검토되었으나 유가(儒家)의 예의가 번거롭고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제나라 재상 안자(晏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공자는 그때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음악의 이름)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술이편).
제나라에서의 임용 실패에 실망한 공자가 2년만에 다시 노나라로 귀국한 뒤에는 시/ 서/ 예/ 악 등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데 힘을 쏟았다.
[장년기]
그때에도 노나라의 정치가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임금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배신(陪臣: 제후의 대부) 양호(陽虎 = 또는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난 뒤인 51세 때(B.C. 501년) 공자는 중도(中都) 땅의 재(宰: 지방 장관)가 되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협곡에서 회맹하였다. 이 때 경공은 무력으로 정공을 위협했으나 공자는 그의 야비한 처사를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에서 이전에 빼앗았던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다음 해(B.C. 499년, 53세 때) 사공(건설부 장관)이 되었고 55세 때인 B,C. 497년 대사구(大司寇: 사법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곧 삼환씨의 세력 근거지인 세 도성을 허물기로 하였다. 이는 바로 삼환씨의 세력을 꺾어 노나라 공실(제후인 임금 가문)의 권위와 실권을 회복시키고자 한 조처였다. 이 일은 맹손씨 가신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잡아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질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에 따라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좋아하여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임금인 정공(定公)과 계환자 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음락(淫樂)에 빠져버리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렸다.
[주유천하]
이듬해인 B,C. 496년 공자는 제자인 자로/ 자공/ 안회 등과 함께 천하 유력(游歷)의 길에 올랐다. 이것이 유명한 주유천하이다.
그러나 제(齊)/ 송(宋)/ 위(衛)/ 진(陳)/ 채(蔡)/ (曹) 등에 대한 이 유력에서도 역시 각국의 제후들이 서로 공벌하기에만 급급하여 그의 이상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기를 받는 등 뜻을 펼 만한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공자는 여행 중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匡)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채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자기의 이상 정치인 인(仁)을 기본 덕목으로 하는 도덕 정치, 즉 덕치 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덕치는 임금이 자기의 인격을 수양하고 극기하는 자세로 정치에 임해서는, 형벌에 의하지 않고 백성들의 본성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펼치는 인정(仁政)를 말한다. 이처럼 13년 동안이나 자기의 도덕정치를 채택할 임금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당시의 중국 천하는 이미 춘추 시대 후반기로써 전국시대(BC 403 ~221)의 진입기에 다달아 있었는데 부국강병책에 의해 천하의 패자가 되어 힘을 통한 권세를 확보하려는 것을 목표로 한 제후국들은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유지와 공벌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공자의 덕치주의 따위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하여 배척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간난신고(艱難辛苦: 극심한 고생)만을 하다가 B,C. 484년에 귀국하고 말았다.
[만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서·역·예·악·춘추를 재편찬하여 이를 정식 교재로 채택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조처는 후진들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전념하는 그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즉 그의 외아들 이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B.C. 483년, 공자 69세). 이가 죽은 다음해인 B.C. 482년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이때 그는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논어 선진편-8)!"하고 탄식하며 절망에 잠기기도 했다.
그의 제자로 공문 십철의 한 사람인 자로가 죽은 것도 그 얼마 후의 일이다. 공자는 자로가 잡혀 죽은 지 6개월 후인 B,C.479년 74세로 별세했다.
공자는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 보고 스스로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그의 내면적 일생이기도 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뜻을 세웠고, 40살에 현혹되지 않았고, 50살에 천명을 알았고, 60살에 진리를 이해했으며, 70살에 이르러 마음이 닿는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吾十五有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자가 주창하는 여러 가지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공자 사상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仁)과 예(禮)라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 예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합니다.
[인(仁)]
인(仁)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인 태도에 관한 유가의 근본 자세라 할 것입니다. 공자는 처음에 인을 효제(孝悌)가 표현된 것이라는 태도를 가집니다. 즉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동기에 대한 우애가 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기반으로 해서 이를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자기에게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로, 자기 가족에 대한 가족애(부부애, 우애, 부모자녀간의 사랑 등)로 부터 시작하여 자기 일가친척에 대한 친족애, 동족애 등등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확대되는 사랑의 개념입니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공자의 인의 사상을 본래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남의 불행을 좌시하지 못하는 동정심'의 발로로 받아들여 그것을 완성하여 정치에 미치는 왕도론(王道論)을 말하였습니다.
"한대(漢代)부터 시작한 이 사상은 그대로 후세까지 유지되지만 주자학(朱子學)은 또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가하였다. 즉, '인은 성(性)이며 사랑은 정(情)이다'라고 현실적인 애정과는 구별하여, 정을 낳게 하는 본성(本性)으로서의 고차적(高次的)인 입장에서 고찰하여 '인이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理)다'라고 하였다. 인은 여기에서 이념적인 성격을 강화해서 체계적인 유교 윤리철학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넓은 뜻에서는 (인은) 유교 윤리의 모두를 포괄하는 왕좌에 앉았다[두산세계대백과] 인 항목에서].."
[예(禮)]
인은 상당히 현세적이고 상대적인 사랑의 개념이긴 하지만 그래도 순연한 정신적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천성적으로 인자한 마음을 가집니다. 맹자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물에 빠질 위험이 있는 어린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측은지심; 곧 인의 단서입니다)을 가지는 것은 그 어린이를 구해주므로써 친구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함도 아니요, 어린이의 비명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닙니다.
유가는 이처럼 인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존숭하면서도 철저한 정신적 윤리를 지향하지는 못했습니다(사실 모든 사상이 그러하긴 합니다). 인 만으로는 그들의 이상인 태평한 사회를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인 이외에 이를 육체적: 형식적으로 체제화시킨 예의 개념으로 보완하려 합니다.
공자는 인과 예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수제자인 안회가 인을 묻자 공자는 "인이란 자신을 이기고(극기: 克己) 예로 되돌아가는 것(복례: 復禮)이다.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로 되돌아간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즉 자기의 삿된 욕망의 분출을 눌러 이기고 예(禮) 본래의 원칙에 되돌아가 그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면서 철저한 예의 실천을 주장합니다.
《맹자(孟子)》
맹자는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로 유가에서 공자(孔子 B.C. 552 ~ 479)를 성인(聖人)이라고 존숭하는데 대해
그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의미에서 아성(亞聖)이라고 불리는 대사상가이다.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 자거(子車/ 또는 子居)라고 한다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산동성 추(鄒)나라 태생.
B.C. 371 ~289?
일찌기 아버지를 여위였으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모(賢母)의 훈육에 의해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썼다. 맹모(孟母)라 통칭되
는 그의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나 단기지교(斷機之敎)는 유명하다.
그의 고국인 추나라가 노(魯)나라의 옆에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공자의 사상을 접하게 되어 흠모했으나 당시 이미 공자가
사망한 훨씬 뒤였으므로 직접 배울 기회가 없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들으면서 사숙(私淑)했다.
당시는 말기에 이른 주나라가 국력이 쇠미해 가자 제후국들이 서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를 획책하던
혼란한 시기였다. 진(秦)나라는 법가인 상앙(商앙 B.C. ? ~ 338 )을 등용하여 변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병가인 오기(吳起 B.C. 440 ~ 381)를 초빙해 군비 확장에 힘쓰는 등 모든 나라가 서로 공벌(攻伐)에 의한 합종연횡책 등 패도(覇道) 정치가 판을 쳐, 영리한 것이 현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정의로움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유가치하게 평가되는 형편이어서 덕치는 안중에도 없었다.
학업을 마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위(魏)/ 제(齊)/ 송(宋)/ 노(魯) 등의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다. 특히
유명한 것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 재위; B.C. 319 ~ 301)을 만나 제나라 위왕(威王 재위; B.C. 356 ~ 319) 때부터
설치된 직하사(稷下士)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일이다. 또 위나라(魏: 뒤에 서울을 대량으로 옮겨 양(梁)나라로도 불렸음)의
혜왕(惠王 재위; B.C. 371 ~ 335)의 초빙을 받아 정치에 관해 유세한 일도 있는데 이러한 경위는 사서(四書)인 [맹자(孟子)]
에 기록되어 있다.
[근본 사상]
인간의 심성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내세우며 이에 따라 인간에게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자기의 악함에 대해 수치심을, 타인의 악함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는 마음(수오지심)/ 이익이 있어도
이를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 참됨과 그릇됨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의 사단(四端)이 있고 그 사단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이 발현된다는 인의설(仁義說)을 주장한다.
맹자는 인간에게 악(惡)을 저지르려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 본성은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고취하려고 했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
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상]
맹자의 정치 사상은 공자의 존주론(尊周論: 주나라의 문화와 제도 등을 존중하는 사상)을 더 발전시킨 민본주의인 왕도정치(王道政治)로, 성선설과 인의설에 입각한 도덕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무리 군주라 하더라도 덕을 잃고 불인(不仁)하면 대체할 수 있다는 역성(易姓) 혁명론을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주나라 문왕이 실시했었다는 정전법(井田法)의 시행을 주장했다. 즉 900묘(묘)의 토지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8가(家)의 농민에게 주고 중앙의 100묘는 공동 경작시켜 조세로 납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뒤에 균전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들은 제후들이 보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으므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여 만년에는 고제자인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을 지도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경(詩經)/ 서경(書經) 및 공자의 사상을 조술하는데 전념했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맹자] 7편(각각 상/ 하로 되어 총14편)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그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당나라 때의 거유인 한유(韓愈 768 ~ 824)가 격찬하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주자(朱子 1130 ~ 1200)가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입시킨 뒤로 [맹자]는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장자(장자)] 내편과 함께 중국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서지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저서로 당시의 시대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중국 최초의 자서전적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