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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변증법 세미나(1. 24.) 자료입니다.
관념론과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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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바로 눈앞에서 손에 잡히는 식탁이나 그 위의 군침 돌게 하는 밥이나 된장찌개 따위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그림자라거나 감각복합 혹은 의식의 구성물이라고 심각하게 주장한다면, 건전한 감각과 상식에 의존하는 우리는 대체로 그 친구가 실성한 것 아닌지 불안해 할 수 있다. 과학과 산업은 관념론을 철학교과서 속에 가두어 버렸고, 오늘날 유물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별도의 철학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불필요한 일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만 해도 레닌은 치열한 정치투쟁의 와중에, 관념론과 유물론의 경계선을 흐리는 관념론의 다양한 변종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논박을 가한다. 이는 냉철한 현실인식을 방해하는 이데올로기적 혼선을 걷어내려는 정치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레닌은 요소복합, 원리적 동격, 잠재적 중심항, 투입작용 등의 개념들로 이루어진 마하주의 교의가 칸트로부터 버클리로 후퇴하는 철학적 몽매주의, 불가지론, 유아론 등으로 귀결된다고 비판한다.(유물론96) 세계를 우리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이들 마하주의에 맞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유물론을 옹호한다. “감각은 뇌수, 신경, 망막 등에 다시 말하면 일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물질에 의존한다. 물질의 현존은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다. 물질이 제1차적인 것이다. 감각, 사유, 의식은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물질의 최고산물이다. 이것이 유물론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특히 맑스, 엥겔스의 견해이다.”(유물론56) 물질의 현존이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자연과학은 지구가, 옛날에 인간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할 수 없었던 그런 상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단호히 주장한다. 유기물은 그 후에 나타난 현상이며, 오랜 진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감각능력이 있는 물질도, 어떤 ‘감각복합’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베나리우스의 교의에 따라 환경과 소위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어떤 자아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유물론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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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유물론을 옹호하기 위해 레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자연과학적 상식을 끌어들이는 가운데, “우리의 의식과 독립해 있고 의식에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의 현존”(유물론274)이라는 난제를 유물론의 근본전제로 제시한다. 이러한 공식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혼란스러운 정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다시 말하면, 인간의 표상 가운데 주관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이나 인류에 의존하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는가?”(유물론128) 이 경우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올바른 반영이라기보다 실재 자체로 읽을 수 있다. 자연과학이 밝힌 바처럼, 인류가 없던 시기에도 지구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 내지 올바른 반영은 자연과학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에 의존한다. 내가 들고 있는 돌멩이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떡이 아니라 돌멩이다”라는 적합한 반영은 나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돌멩이 자체가 ‘나는 진리다’라고 외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돌멩이다”라는 반영물을 놓고 참인지 아닌지 따지고, 좀 더 복잡한 사태에 대한 반영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수정 보완 폐기되어야 할 것인지를 따져야 의미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나 감각 역시 물질의 최고 산물로서 여타 물질들에 작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최고 산물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실재라는 말은 존재 차원에서 현실성이 없다. 논의를 인식 차원에 국한해서 살펴보더라도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실제의 인식과정에서는 인식주체가 활용하는 인식수단들이 역사적 사회적 혹은 객체적 요소들로서 주체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객체들의 영향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겪고 있으며, 역으로 인식의 대상들 역시 주체의 의식과 이에 따른 활동을 통해 가변적 상황에 처해 있다. 물질의 1차성 내지 우선성은 이러한 조건에 대한 반성과 동떨어져 있다. 즉 그것은 인식과정 상의 무반성적 직접적 경험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무엇보다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원론적 논박으로서 의미 있다. 그 긍정적인 실천효과는 주관적 의도⋅욕망⋅이상⋅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실제 대상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구성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데에 있다. 반대로 인식의 조건과 영향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는 독단론을 키워낼 수도 있다. 즉 실재를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특정 인식⋅주장⋅이데올로기가 권력관계에 따라 절대적 지위를 누리며 반론들에 주관주의의 낙인찍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물론의 근본전제’를 주체와 객체의 복합적 상호관계에 대한 사고를 차단하는 논거로 써먹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개념의 상호이행”(철학150)이라는 ‘변증법의 본질’은 인식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도 발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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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헤겔의 방법을 받아들이면서도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방법은 사유가 구체적인 것을 점취하고, 이를 정신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결코 구체적인 것의 생성 과정 자체는 아니다.”(요강71) 맑스의 다음 테제는 흔히 유물론의 기본전제로 받아들여진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요강478) 별 문제 없어 보이는 테제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다. 우선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제거할 수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핵심요인으로서 의식을 빼먹을 수 없으며,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과 그 산물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위의 테제는 인간의 의식을 포함하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존재 속의 의식에는 자신의 의식도 부분적으로 포함되며, 이 점에서 의식과 존재의 관계에서 대립관계나 이분법 혹은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월성을 절대화할 수 없고, 의식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부분적 재귀구조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적 재귀구조에 대한 인정이 물질적 혹은 객관적 조건을 실제의 중요성에 맞지 않게 도외시하고, 주체의 의식을 절대화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유물론은 관념론적 환상을 깨고 의식과 존재의 실제 관계를 그 실제에 가깝게 인식하고자 하는 과학적 충동에 따른다. 따라서 그것은 의식의 역할을 실제와 무관하게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부풀리는 데에 반대한다. 부분적 재귀구조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의식과 아울러 주체를 사회적 구조나 제반 조건들 혹은 지배관계 등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객체로 파악할 필요 없이, 사회적 존재에 그 일부로서 영향을 주고 이로써 또한 자신도 바꿔갈 수 있는 진정한 주체로서 파악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선성이라는 유물론적 테제를 변혁주체에 대한 사망선고와 맞바꾸는 것은 맑스의 의도와 무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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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 대한 비판은 변증법의 구조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도르노는 ‘진리는 전체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정신의 산물로 파악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으로 귀결되는데, 주체의 유한성과 대상의 무한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의 상식에 근거해 보면 그러한 동일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이 궁극적으로 닫힌 변증법이라고 보며, 반면에 유물변증법은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는 관점에서 열린 변증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입문49) 그는 개별 인식에서 의식과 대상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견지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인식주체와 객체의 동일성과 조화로 귀결되는 점이야말로 헤겔 철학 최고수준의 모순이라고 지적한다.(입문26) 물론 헤겔의 변증법은 그러한 모순 구조를 지니지만 궁극적으로 관념론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모든 개별 계기들에서는 사유가 동일성 속의 비동일성의 계기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이 경우 바로 이러한 변증법 유형이 관념론적 유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사실상 존재에 대한 사유의 우선성을 주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입문151)
이 경우 아도르노는 동일성과 조화로 귀결되는 헤겔 철학의 긍정적 측면보다 모순을 강조하는 비판적 측면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헤겔 철학을 움직이는 힘은 실제로 부정의 힘, 그러니까 모든 개별 계기 속의 비판적 힘이며, 그에 비할 때 헤겔의 유명한 긍정적 계기는 −그러니까 총체로서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계기는− 그 부정적 계기에 비할 때 힘이나 역량의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뒤처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입문133) 반면에 엥겔스는 비판적 요소보다 긍정적 요소가 헤겔 철학에서 더 큰 비중을 지닌다고 평가한다. 또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과 체계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방법에 강세를 두는 쪽이 헤겔 좌파로, 체계를 강조하는 쪽이 헤겔 우파로 발전해 갔다고 보았다. 이 경우 체계가 방법과 동떨어진 채 형성될 수는 없었을 터인데, 양자의 모순관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비해 아도르노의 설명은 좀 더 납득하기 편하다. 헤겔의 체계는 변증법적 인식방법의 산물인 점에서 체계와 방법을 단순히 대립하는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체계의 특이한 의미를 인정하면서 그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헤겔의 체계에 대한 아도르노와 엥겔스의 평가에서는, 헤겔 철학이 비판적이냐 현실 옹호적이냐를 일괄해서 판단하기보다 헤겔 철학의 양 측면으로부터 어느 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더 중요하고, 이는 받아들이는 자의 실천적 관심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헤겔의 비판적 측면을 적극 받아들이는 것 못지않게 엥겔스도 헤겔 철학의 혁명적 의미를 강조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 있다. “헤겔철학(…)의 진정한 의의와 혁명적 성격은 다름 아닌 헤겔철학이 인간의 사유 및 활동의 결과가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종국적 의의를 가진다고 보는 온갖 견해를 영원히 청산해 버린 데 있다.”(고전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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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유물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변증법 자체에 내재하는 관념론적 요소를 인정한다. “물론 변증법적 사유가 지향하는 객체가 자체로서 아무 성질도 지니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데에, 우리가 그것에 범주적 그물을 뒤집어씌움으로써 비로소 그 규정들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체 내적으로도 이미 어떤 규정된 것이라는 데에, 달리 말해 어떤 대상도 그것이 우리에게 특정한 것으로 대립하는 한 자체 내에 또한 사유를, 자체 내에 주체를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데에 변증법의 결정적 계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변증법 자체 속에는 관념론의 한 계기가, 즉 매개된 것으로서의 주관성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세계를 자신에 근거해 파악하거나 산출한다는 관념론의 요구 전체를 아무리 비판적으로 혹은 회의적으로 대한다 해도 고수해야 하는 것입니다.”(입문320-321) 그러면서도 아도르노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관념론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기서 언급된 주관적 계기가 단지 하나의 계기이며, 절대화될 수 없고 즉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주체가 객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매개된 것이고, 역으로 객체 또한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입문321)
반면에 아도르노는 어떤 제일원리, 절대적 근원적 원칙을 내세우는 경우에 일반적으로 관념론이 등장한다고 본다. “내가 그와 같은 부류의 근원적 원칙, 그처럼 궁극적인 것을 진술하자마자, 사실상 그 속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정신의 요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궁극적인 것은 언제나 정신이 생각한 것이며, 그런 한에서 독단론적 유물론, 즉 비-변증법적 유물론에서조차, 그것이 순수한 사고에 근거해 그러한 절대적 근원의 원칙을 갖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 어떤 관념론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입문188) 이런 점에서도 헤겔의 체계는 관념론과 어울리지 않는 면을 지닌다. 그의 체계는 어떤 절대적 제일원리로부터 전체가 펼쳐지는 것이 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입문59) 아도르노는 ‘뒤집혀진 유물론’이라는 표현 대신 “헤겔은 관념론적이면서 동시에 관념론적이지 않기도 한 한에서 최상의 의미에서 여전히 변증법적”(입문189)이라고 규정한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반-체계적 사유를 표방하지만 변증법적 체계의 현실적 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의 체계화는 바로 현실이 이루는 체계의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변증법 철학은 세계가 자체 내적으로 특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는 듯이 거동하고, 바로 그 때문에 유일하게 관심거리가 되는 것, 즉 바로 이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강압을 간과하는 훨씬 더 무해한 이론들보다 훨씬 더 현실주의적이며, 단순한 개념의 구성물과는 무한히 더 거리가 있습니다.”(입문142-143) 나아가 아도르노는 세계를 체계로서 옹호하려 함으로써 보수적인 것으로 보였던 이론이 그 체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사회주의의 혁명적 구상을 위한 전제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변증법의 두 형태, 즉 헤겔 변증법과 맑스 변증법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추적하는 과제를 제기한다.(입문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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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나 레닌이 헤겔의 유물론적 측면을 최대한 드러내려 하는 것과 반대로, 콜레티는 변증법 자체를 관념론으로 몰아간다. 그는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 본질을 흥미롭게 밝힌다. 그에 따르면 “헤겔사상의 중심적 테마는 관념론과 철학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관념론’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헤겔은 극히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관념론이란 유한한 사물들과 유한한 세계가 참된 실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 관념론이 참된 존재자로 간주하는 것은 무한자, 즉 정신이나 신이다.” 헤겔이 관념론을 철저하게 관철시키는 수단을 콜레티는 ‘물질의 변증법’이라고 칭한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헤겔에 있어서 물질은 부정되지 않는다. 물질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의해 긍정된다. 따라서 헤겔은 그것을 배제하지 않고 포괄한다. 그러나 ‘정신에 있어서…외적인 사물은 소위 실재적인 현존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자아에서는 그러한 외적인 사물은 지양된 것으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 대해서 존재하며, 내 안에서 관념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긍정이 사실상은 하나의 부정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즉 물질은 사유 안에 있을 때에만 ‘본질적’인 것이다라고 선언됨으로써 물질이 개념을 벗어나 있거나 개념 이전에 있을 때 어떤 실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당연히 배제된다.”(콜레티21) 콜레티는 이 물질의 변증이 지향하는 궁극 목적은 신의 실현이라고 본다.(콜레티30-31)
나아가 콜레티는 이러한 물질의 변증법의 모든 근본명제를 헤겔이 발견했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 원문으로부터 이러한 명제들을 베낀 데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저자들은 그것들을 베끼는 과정에서 ‘이미 헤겔의 원문에는’ 유물론적 입장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바, 이는 분명 해석상의 오류였다고 나는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백 여 년에 걸친 이론적 맑스주의의 역사의 근저에는 이러한 오류가 깃들어 있었다.”(콜레티31) 또한 콜레티는 엥겔스가 범한 오류를 무엇보다 헤겔의 총체성이 ‘무한자’, ‘이성’, ‘기독교적 로고스’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콜레티51) “결론적으로 말해 엥겔스와 그 이후의 모든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유물론’의 최고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 제시하는 것은 ‘절대적 관념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절대자의 적극적 전개’는 유물론적 객관성이란 의미로 오해되고 있다. 유한자가 ‘관념적’인 것이 되고 자신을 제거하는 과정인 ‘물질의 변증법’이 단순한 사실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제과정과 변화에 대한 관찰과 ‘과학적 검증’과 혼동되고 있다.”(콜레티54) 이런 오류를 피하고 유물론을 고수하는 방안으로서 콜레티는 칸트로 돌아갈 것을 권장한다. “칸트는 (…) ‘실재적’ 조건과 ‘논리적’ 조건을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그는 사유가 ‘총체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러한 총체성을(이것은 단지 ‘사유’의 총체성일 뿐이므로) 단지 ‘실재적’ 과정의 ‘한’ 요소 또는 일부라고만 생각한다.”(콜레티124)
엥겔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바로세운 것이 ‘베끼기’와 ‘오해’로 규정될 수 있다는 데에 놀랄 수밖에 없다. 왜 무한자가 물질이면 안 되고 정신이어야만 하며, 기독교적 로고스이어야만 하는지는 수수께끼다. 정신이야말로 무한한 물질의 특정 전개과정에 등장한 유한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실재적 조건에 부합하는 논리적 조건을 부단히 만들어가는 것, 무궁무진한 대상을 유한한 인식능력으로 좀 더 포괄적으로, 좀 더 심오하게 반영하는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분 아닌가. 실재적 조건과 구분되는 고정불변의 논리적 조건이나 선험적 원칙 혹은 어떤 제일원리를 무궁무진한 실재에 덮어씌우는 것이야말로 관념론의 본색 아닌가. 콜레티 역시 맑스로부터 헤겔 변증법의 흔적을 지우는 데에 한 몫 해낸 유공자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