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길 : 지평향교길 <민족의 흔적과 마주하는 역사의길>
만약 누군가가 지평에 대해 묻는다면 막걸리의 고장이라고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평 향교길을 걷는다고 하였을 때 막연히 농촌의 들녘을 걸어가는 길이라고 여겼는데 걷기에 앞서 안내 책자를 펼치니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평해 길 제7길은 ” 용문역에서 시작되어 지평을 거쳐 석불역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지평은 고구려 시대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던 지역입니다.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지평 의병과 조국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지평 전투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농촌의 풍경의 정취에 지평 막걸리의 한 모금의 여유를 느끼며 역사의 흔적을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 <경기 옛길 가이드북>
자연의 향기 속에 사람의 향기가 베여있는 지평향교길을 걷는다. 일행과 약속대로 대곡역에서 6시 59분 전철을 타고 공덕에 이르니 조 회장님이 탐승(7시 25분)하시고 양원역에 이르러서는(8시 17분) 김 총무가 탑승하여 용문역에 이르렀다.(9시 28분)
용문역에서 이제껏 함께하였던 물소리 길은 천년의 고찰 용문사로 향하고 평해 길은 지평으로 이어지어 마치 다정한 벗과 헤어지는 듯 다소 아쉬웠다. 용문역 1번 출구로 역을 나와 용문 천년 시장을 통과하여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용문 공영주차장을 지나 터미널로 향할 때 지평역 4.1km를 알린다. 고개를 들어 가는 방향을 확인할 때 도로 표지판에 그릇 고개가 표기되어 있다.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며 우리의 가는 길이 그릇 고개로 향하여지기를 은근히 바랬다.
면사무소에 이르니 바람대로 평해 길은 그릇 고개로 이어지고 있었다.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 기분이 좋은데 날씨도 맑고 주변의 산들이 고만고만하게 둥글둥글 솟아 있다. 비록 341번 국도의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길이었지만 발걸음이 가볍다.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되는 고갯길에서 이 도로를 넘어서면 지평역일 것이란 생각에 혹 고갯길을 자동차 도로가 아닌 예전의 고갯길로 넘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 걸어갈 때 그루 고개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또다시 바램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고개 ! 등짐 장수가 봇짐이 무거워 잠시 숨을 쉬고 원님이 넘나들고 도둑마저도 목을 축이며 넘어가던 옛 고갯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새로이 개설한 국도를 따라 걸어가면 조금은 편하고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테지만 도보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어찌 굽이쳐 돌아가는 길을 어찌 멀고 힘들다고 외면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기쁨 속에 그릇 고개를 돌고 돌아 넘어가는 곳에 아늑한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에게 조 회장님께서 마을의 이름을 물어보니 꽃반디 마을이라고 하면서 ‘이사 오세요.’라고 한다.
햇볕은 쨍쨍 내리쬐는 다소 더운 날씨에 고갯길을 넘으려니 땀이 나는데 이 고개를 도로 표지판에는 ‘그릇 고개’로 표기하고 옛길을 넘어가는 길목에 ‘그루 고개’로 새겨 놓아 혼선을 주고 있을까 ?
그릇 고개는 갈지산 남쪽 골짜기에 위치하는데 용문 다문리 ↔ 지평 송현리 역말로 넘나들던 고개로 그루가 그릇의 경상도 방언으로 표준어로 바꾸어 그릇 고개로 도로 표지판에 표기하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경상도 방언 그대로 그루 고개로 부르며 표지석을 세웠다.
그루 고개의 유래를 들어보니 문득 백두대간 덕유산 고갯길인 빼재가 생각난다. 빼재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고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 라는 이름이 붙어다고 전해지는데 뼈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로 발음되어 ’빼재’가 되었다.
고개의 지명을 방언으로 표기하는 것은 토속적인 멋이 있어 권장할 일이지만 뼈의 경상도 발음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여 빼어날 秀, 언덕 嶺자를 써서 수령秀嶺으로 바뀐 것처럼 ’ 그루 ‘가 그릇이 아닌 다른 뜻으로 전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 높지 않은 갈지산 자락의 그루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마을의 논에는 모내기의 푸른 싹이 덮여 있고 고추밭에는 아낙네들이 고추를 따고 있다. 저 멀리 동산들은 겹겹이 에워싸며 산줄기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바람도 솔솔 불어 더운 듯 하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돌고 돌아가며 고갯길을 넘어간다. 고즈넉한 풍경이란 우리말에 어울리는 곳이라고 할까 ? 걷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었다.
돌고 도는 굽이쳐 돌아가는 길을 내려서 농협 하나로 마트를 지나 지평의병로에 진입하여 지평역에 이르렀다. 지평 읍내가 펼쳐지고 그 유명한 막걸리의 맛을 보고자 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지평역에서 평해 길은 지평의병로를 따라 면사무소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지 않고 지평 향교로 우회토록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곧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무엇 때문에 길을 돌아가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 ?
지평 향교를 향하여 걸어갈 때 드넓게 펼쳐진 지평의 들판을 바라보니 마치 바다를 본것처럼 가슴이 탁 트인다. 대지의 끝에는 어김없이 고만한 봉우리가 수놓는 산들이 포개어 이어졌는데 협동교를 건너면서 눈에 띈 중원산은 群鷄一鶴이었다.
예전 사람들은 ”매일 산을 보면서 그 높음을 기리고 慕其高, 그 장중함을 배우며 學其重,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愛其麗 , 그 변하지 않음을 벗하고 友其舊, 그 참는 것을 본받는다 倣其忍 “ 하였다.
말없이 솟아 있는 산의 덕성에서 군자의 향기를 가슴에 안고 지평 향교에 이르렀다. 산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군자의 향기가 향교에 이르러 절정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향교의 내삼문은 코로나 19 때문인지 굳게 닫혀 있다.
군자의 덕성을 함양코자 세웠던 각 지방의 향교가 갑오경장 이후 교육 기능이 폐지된 후 지방 문화재로 남아 단지 성인 공자 孔子에 대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 그 본래의 사명을 잃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향교가 우리에게 들려줄 메시지는 정녕 없는 것인가 ?
먼지만이 자욱이 쌓인 향교 건너편 정자에서 배낭을 내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아쉬운 마음을 털어 내리지 못하고 면사무소로 향할 때 여러 개의 비석을 한곳에 모아놓았는데 그 가운데 을미 의병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지평 을미 의병 기념비는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화서학파의 문인들(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과 지평 출신 김백선을 주축으로 한 400여 명의 포수가 힘을 합쳐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양평 의병이 일어난지 100주년을 기념하고 의병 정신을 선양하고자 1996년에 세웠다.
지평 의병의 창의 정신은 그 이후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이어졌고 국권이 강탈된 일제[강점기에는 3.1만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그 이후 광복군, 독립군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을미 의병 기념비 옆에는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 UN군 승전 충혼비와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 프랑스군 참전 충혼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유엔이 중공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를 거둔 것을 선양하기 위한 비석이었고 비석 아래 지평리 전투 기념관이 있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하여 문은 닫혀 있었다.
단순히 막걸리의 고장으로 알았던 지평에 첫 발자국을 내디디고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고 대지의 포근하고 따뜻함과 안락함을 느끼었는데 그 오랜 세월을 뼈를 묻고 삶을 영위한 이 고장 사람들이 아늑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을 지키고자 어찌 목숨을 아까워했을까? 비로소 평해 길을 직선의 길인 지평 의병로로 걸어가지 않고 향교를 거치도록 빙 돌려 걸어가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행하신 조 용원 회장님은 ” 을미의병의 발상지요 힌국 전쟁 때에는 지평 전투로 중공군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평재 기념관의 8형제들은 병역의무로 공훈을 남겼고 월남전 참전용사도 있으니 평해길 7길 지평 향교길은 ’민족의 호국길’로 순례길이 됐으면 싶다고 그 소감을 피력하셨다. “
지평교를 건너 지평 읍내로 진입하였더니 지평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담장 너머 3층 석탑이 눈에 띄었다. 이 탑은 본래 지평리 야산에 있었는데 이곳에 옮겨 놓은 고려 전기 시대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담장 너머 있어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거리에 이르니 341번 국도인 지평의병로이다. 이곳에서 평해길은 또다시 직선의 길을 택하지 않고 지평1리 경로당을 지나 지평 면사무소를 이르러 341번 도로에 이르게 되어 있다.
불볕더위는 아니지만, 햇볕이 따가운데 341번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려니 땀이 베일 듯 할 때 산 자락인 지평 감상골로 진입하여 지재교 앞에서 햇골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그루 고개를 넘어오면서 바라보았던 배미산 자락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가파른 길은 아니지만 정오의 태양에 계속되는 오르막에서 땀이 베일 때 동원 농장이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배낭을 내리고 김 총무가 준비한 간식과 음료수를 마셨다. 이곳에서 오늘의 종착지인 석불역까지는 1.9km이다.
휴식을 취하고 석불역으로 향하자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이 되면서 야자매트가 깔린 산길로 이어졌다. 산바람을 온몸에 안으니 시원하였고 완만한 산등성이가 되어 걸어가기에 편하였다.
조 회장님은 산에 열정이 강하시어 힘 좋은 사람들 정상에 다녀와 라고 말씀하시니 김 총무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이 되지 않아서요? 라고 반문한다. 그렇다. 조 회장님은 젊은 시절에는 어느 산을 가시든지 반드시 고스락에 올랐기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배미산 자락에 올라 고스락을 밟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고 김 총무는 함께 왔기에 폐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뱀이 많아 뱀이산이 소리라는 대로 읽어 배미산일까? 그래서 선행자들은 뱀을 조심하라고 한 것일까? 배미산은 해발 39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원전 2300년경에 9년간의 대홍수가 있었을 때 산꼭대기에 배를 맨 바위가 있었다 하여 배미산이라 하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공군과 3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격전지였다고 하였다.
오늘은 그때의 상처를 치유하였는지 하늘이 청명하였다. 용문에서 그루 고개를 넘으니 지평면이었고 지평에서 배미산을 넘으면 오늘의 종착지 석불역이다. 배미산을 내려서니 포장도로였고 좌, 우측의 갈림길에서 좌측의 길을 선택하면 기차길 교량이다. 또다시 좌측으로 진행하는데 빨간색 지붕에 파란색의 벽면인 석불역이 보였고 예상치 못한 스탬프 확인함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같은 평해길 쉼터에는 앞서 걸어온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석불역에 내려서니 평해길 8길인 고래산길을 걸으려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팔다리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래산 길을 걷고자 청량리에서 11시 34분 기차를 타고 온 도보 여행가들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심하여 다녀가라는 인사말을 대신하고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석불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돌 석石, 부처 불佛 그렇다면 이곳 어느 곳에 돌부처가 있을 텐데 부처는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찬미의 나라를 읊조리며 오늘의 걷기를 마친다.
찬미의 나라 <정완영 작사. 박범훈 작곡>
부처님은 어디 계실까 봐 저 높은 산에 계실까?
저 넓은 바다에 계실까 아닐세 내 가슴에 와계시네
꽃들도 합장을 하고 우리들 배례드리니
한 오리 향연 저 너머 이 자리에 와계시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 일 시 : 2021년 6월 12일 토요일 맑음
● 동 행 : 조용원 회장님. 김헌영 총무
● 행선지
- 09시28분 : 용문역
- 10시40분 : 지평역
- 10시57분 : 지평향교
- 12시32분 : 석불역
● 소요시간 및 거리
- 거 리 : 10.0km
- 시 간 : 3시간4분